역사 속에서 배우는 세종의 정치력, 꽉 막힌 현실정치에 큰 귀감

국가 리더십이 완전 실종됐다. 미국 쇠고기 수입 졸속협상 문제로 폭발한 민심이반 때문에 대통령도, 정부도, 여당도 모두 국정운영 동력을 잃었다. 야당의 대안적인 리더십도 보이지 않는다. 가히 난세(亂世)가 따로 없다. 이럴 때 사람들은 희구한다. 안정과 통합, 번영을 안겨줄 수 있는 영웅적 리더십을.

답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고 했다. 옛것을 익혀 그것으로 미루어 새것을 안다는 뜻이다. 리더십도 마찬가지다. 역사 속에 우뚝 선 위인들의 그것은 시대를 초월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특히 요즘 새삼스럽게 주목받는 리더십이 있다. 우리 역사상 가장 찬란한 시대를 일궜던 세종대왕의 리더십이다.

세종은 우리 국민 모두가 위대한 군왕으로 인정한다. 하지만 그 유명세와는 달리 우리는 세종의 진면목을 잘 모르는 게 사실이다. 그저 훈민정음 창제, 측우기, 해시계 발명 등 민족문화의 큰 발전을 이룬 업적만 피상적으로 알 뿐이다.

그런데 최근 정치 지도자로서 세종의 리더십을 재조명하려는 움직임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 세종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각종 저술이 잇달아 출간되는가 하면, 세종시대를 생생하게 복원하는 방송 드라마도 시청자들의 시선을 잡고 있다.

이런 흐름에는 문화계 전반의 역사 대중화 노력도 가세하고 있지만, 무엇보다 세종의 리더십이 역사의 박제 속에 갇혀 있기에는 너무나 빛났다는 게 더 큰 이유일 것이다. 세종 연구자들이 위대하다고 평가하는 세종 리더십의 요체를 살펴본다.

■ 어짊과 섬김의 정치

세종은 1418년 8월11일 근정전에서 반포한 즉위 교서에서 ‘시인발정(施仁發政)’이라는 통치철학을 선포했다. ‘어짊을 베풀어 정치를 일으킨다’라는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이도 세종대왕>(추수밭)의 저자 이상각 작가는 세종이 “상쟁이 아니라 상생의 시대를 열겠다”고 공언한 것으로 풀이한다. 부왕 태종 대까지 이어진 대립과 배척, 숙청의 시대를 접고 덕으로서 나라를 다스리려는 의지를 표명했다는 것이다.

군왕의 권력이 어디에서 나오는지에 대한 깊은 성찰도 돋보인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해야만 나라가 평안하게 된다. 내가 박덕한 사람으로서 외람되이 군주가 되었으니, 오직 백성을 기르고 어루만지고 달래주는 방법만이 마음속에 간절하여….”(중략) 세종 재위 5년째 되던 해 7월에 남긴 말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박현모 박사는 저서 <세종처럼>(미다스북스)에서 “세종은 재위기간 내내 일평생을 백성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정성을 쏟았다”고 평가했다. 실제 세종은 노비의 출산휴가를 파격적으로 개선하는가 하면 질병으로 인한 사망을 줄이기 위해 의료제도를 바꾸는 등 요즘말로 ‘민생정치’에 큰 노력을 기울였다.

민의를 살피고 헤아리려는 세종의 진정성은 세금제도 확립을 위해 무려 17만여 명의 백성에게 의견을 물은 일에서도 드러난다. 당시가 왕조시대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획기적인 시도였던 셈이다. 세종의 한없는 백성 사랑은 훗날 민족 최대의 발명인 훈민정음 창제로 이어졌다.

■ 인재경영의 대가

세종은 인재를 발탁하고 활용하는 데 가히 천재적인 노하우를 갖고 있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배적인 평가다. 현대식으로 말하자면 ‘인재경영’의 대가였던 것이다. 세종 당대에 유달리 명재상과 뛰어난 학자, 신료들이 많이 배출됐던 것도 그 덕분이다.

세종의 인사원칙은 다음과 같은 세종실록의 한 대목에서 잘 읽혀진다. “정치하는 요체는 인재를 얻는 것이 가장 급선무이다. 관원이 그 직무에 적당한 자라면, 모든 일이 다 다스려지나니….”(중략)

<한 권으로 읽는 세종대왕실록>(웅진지식하우스)의 저자 박영규 작가는 “세종은 여러 모로 탁월한 군주였지만 특히 인재 발탁과 활용에 안목이 매우 높았다”며 “다소 흠결 있는 황희나 조말생을 중용해 장점과 능력을 충분히 뽑아냈던 점, 그리고 장영실, 이순지 등 과학기술자의 역량을 한눈에 알아보고 발탁한 점 등에서 이를 잘 읽을 수 있다”라고 평가했다.

박 작가에 따르면 세종은 전문가를 적재적소에 배치해 오랫동안 헌신토록 함으로써 국가 전체의 역량을 골고루 끌어올리는 용인술을 썼다. 지방관 임기를 30개월에서 60개월로 늘린 것도 중앙의 통제가 잘 미치지 못하는 지방행정의 안정을 위한 포석이었다.

세종이 자질과 능력 위주로 폭넓게 인재를 등용했던 것은 조선 초기 인재 풀이 매우 협소했던 까닭도 있다. 옛 고려왕조의 인재들이 대거 초야에 묻혀 현실정치를 외면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인사가 만사’라는 진리를 일찌감치 실천한 세종의 인재경영은 인사 때문에 망사(亡事)를 초래하는 오늘날 정치현실에서 귀감이 될 만하다.

■ 소통과 헌신의 리더십

세종대왕 탄신 610돌 기념 숭모제전이 지난해 5월 경기도 여주 세종대왕릉에서 봉행되었다

“내가 인물을 잘 알지 못하니, 좌의정ㆍ우의정과 이조ㆍ병조의 당상관과 함께 의논하여 관리를 임명하고자 한다.” 세종은 즉위하자마자 ‘토론정치’의 서막을 힘차게 열었다.

세종 스스로 토론하고 궁구하는 것을 즐겼지만 당대의 정치상황도 군왕과 신하의 소통, 군왕과 백성의 소통을 크게 필요로 하던 시기였다. 이와 관련, 박현모 박사는 “조선 개국 27년 즈음에 왕위를 계승한 세종은 나라를 어디로 끌고 갈 것인지에 대해 컨센서스(국민적 합의)가 필요했다”며 “그 스스로 백성과 신하의 마음이 하나로 합쳐지지 않으면 나라가 안정될 수 없다고 누차 강조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소통의 리더십은 군신(君臣)간에 생산적인 토론과 논쟁을 가능케 해 국가 주요정책 결정과정이 독선으로 흐르지 않도록 여과기능을 했다. 실제 세종실록에는 신하들이 거침없이 직언과 간언을 하는 대목이 수도 없이 나타난다.

무엇보다 세종의 리더십이 돋보이는 대목은 군주로서 누릴 수 있는 편안함을 물리치고 헌신적으로 정사(政事)에 매진했다는 점이다. 단순히 명령만 내리는 지도자가 아니라 국가 대소사에 솔선수범을 보였다는 것이다. 세종 당대에 법과 제도, 과학과 문물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일대 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것도 ‘소통에 기반을 둔 헌신의 리더십’ 덕분에 가능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박영규 작가는 “세종 리더십의 교훈은 충분히 지도자 공부가 된 사람이 리더가 돼야 한다는 것”이라며 “지도자는 모름지기 정치철학과 가치관은 물론 문화적 교양도 함께 지녀야만 바른 정치를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윤현 기자 uny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