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원과 더블캐스팅 화제… 벨마역 선배들에 연기 수업도 받아

“보기엔 쉬울지 몰라도…….”

뮤지컬 배우 김지현은 인터뷰 내내 <시카고>의 삽입곡인 이 노래를 몇 번 불렀다. 배우로 살아온 지난 십여 년의 세월과 곧 무대에 오를 작품에 대한 중압감을 이 곡으로 에둘러 표현하는 듯 했다. 일본 최대 뮤지컬 극단인 시키(四季)에서 <라이온킹> <캣츠>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와 같은 굵직한 작품의 주인공을 꿰찼던 그녀는 한국보다 일본에서 더 유명한 배우다. 재작년 시키에서 독립한 그녀는 오는 7월 뮤지컬 <시카고>로 10년 만에 국내 무대에 복귀한다.

■ 일본서 더 유명한 배우

뮤지컬 배우 김지현을 처음 본 것은 뮤지컬 <라이온킹> 제작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였다. 한국인 최초로 일본 극단 시키의 정극단(월급제 대우를 받는 최고 배우)으로 활동하던 그녀는 이 작품의 라피키 역으로 800회 이상 무대에 올랐다. <라이온킹>의 한국 공연을 앞두고 후배들과 노래를 부르는 자리에서 그녀는 감격에 북받쳐 눈물을 쏟아냈고 이 모습이 지상파 방송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통해 소개됐다.

같은 노래를 수천 번 부르고도 감정을 이끌어 내는 모습은 깊은 인상을 남겼고, 이후 국내 뮤지컬 팬의 머릿속에 배우 김지현을 또렷이 새겨 놓은 계기가 됐다. 그러나 김지현의 한국공연은 불발됐고, 시키에서 독립한 그녀는 공연제작사를 만들어 직접 콘서트를 열었다. 국내 팬들은 뉴스를 통해서 그녀의 ‘메모리(뮤지컬 <캣츠>의 아리아. 김지현은 <캣츠> 그리자벨라로 800회 이상을 열연했다)’ 열창을 감상할 수 있었다.

97년 일본에 진출했던 김지현은 오는 7월, 뮤지컬 <시카고>의 벨마 역으로 10년 만에 국내 팬 앞에 선다. 그녀는 ‘시카고 선배들(지난 해 <시카고> 배역을 소화했던 배우들을 그녀는 이렇게 불렀다)’에게 열심히 배우고 있다며 작품을 소개했다.

“제가 시키에서 10년 동안 했던 작품과 거리가 있어요. <라이온킹>이나 <캣츠><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는 움직임이 많지 않은 작품이거든요. <시카고>는 댄스 위주의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특히 벨마는 춤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부분이 있어요. 불안감도 있고 한편으로는 ‘해봐야지’란 욕심도 생기죠.”

<시카고>는 1920년대 미국의 두 여죄수를 주인공으로 쇼 비즈니스계의 생리, 성공을 향한 열망, 살인과 협잡을 그린 재즈 뮤지컬이다. 김지현은 남편과 여동생의 불륜현장을 목격하고 살인을 저지른 벨마 켈리 역을 맡았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자신의 생각을 실현시킬 방법을 찾는 주도면밀한 캐릭터다. 그녀는 벨마와 자신이 닮은 점이 많다고 말했다.

감정을 숨긴다는 점에서 벨라는 김지현이 일본에서 주로 공연했던 <라이온킹>의 라피키와 <캣츠>의 그리자벨라와도 닮은 캐릭터다. 그녀는 오랜 일본 생활로 감정을 바로 드러내기 보다는 돌아서서 생각을 정리하는 성격으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어떤 배우가 역할을 맡아도 일정 수준 이상의 공연의 질을 보장하기 위해서 똑같은 연기를 훈련시키죠. 그래서 무대에서 배우가 개인적인 감정을 표출하면 안돼요. 그런 쿨한 모습이 벨마를 소화하기에는 장점으로 작용하는 것 같아요.”

■ 극단 '시키'의 최초 한국 배우

십년 전 한국을 떠날 때만 해도 그녀는 무명에 가까운 배우였다. 어학연수차 찾은 일본에서 극단 시키의 오디션을 보았고, 1,800명 중 35명의 배우를 선발하는 오디션에서 합격해 본격적인 일본 활동을 시작했다. 일본은 시키 극단 하나로 아시아에서 가장 큰 뮤지컬 시장을 차지하고 있는 독특한 구조다.

시키극단은 뮤지컬 전용극장을 갖고 있어 한해 1,000회 이상 작품을 공연하는 초대형 기획사. 국내 뮤지컬 시장이 커진 현재에도 여전히 배우들에게는 꿈의 무대다. 이 극단의 ‘최초 한국인 배우’였던 그녀는 처음에는 일본생활에, 두 번째는 언어문제로 고충을 겪어야 했다.

“처음 맡았던 공연이 <캣츠>인데, 대사가 없고 모두 노래로 처리되는 작품이에요. 2년 반, 3년이 지나 <라이온킹>을 역할을 맡았는데, 이 작품은 대사가 많죠. 완벽한 일본식 발음을 구사해야 하니까, 어려움이 많았죠.”

배우 개인의 역량이 뛰어난 우리나라와 달리 일본은 제작 시스템에 배우가 투입되어 연기를 지도받는 형식이다. 앙상블, 조연, 주연 별로 연기의 틀을 만들어 놓고 선배가 후배연기자를 가르치기도 한다. 어떤 배우가 연기를 하든 똑같은 캐릭터와 공연의 질을 만드는 것이 일본 뮤지컬의 특징이다.

김지현은 “시키의 훈련은 혹독하다. 대본 한 권을 하루에 외워 오라면 실제로 그렇게 한다. 외우는 데는 일본 배우를 못 따라 가는 것 같다. 한국 배우는 성량과 감수성, 감정 등 자질이 좋다”고 말했다.

“관객 반응도 일본보다는 한국이 더 감정적이고 적극적이죠. 어떤 게 좋다 나쁘다는 없는 것 같고 한국과 일본의 문화가 각기 다른 거라고 생각해요.”

그녀의 일본 진출 후, 시키극단의 한국인 배우는 이제 70여 명으로 늘었다. 외국에 진출하는 후배들에게 그녀는 “외국에 나갈 수 있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축복이다. 본 것만으로도 공부가 된다. 외로운 환경이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조언했다.

한동안 일본에서의 활동을 말하던 그녀는 “일본어로 10년을 공연하다 보니 이제 얼굴 근육도 바뀌어서 한국 공연이 더 힘들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받침 있는 말과 우리말의 장단음을 자주 틀려 지적을 받는다는 것이다. 대화는 다시 <시카고>로 넘어왔다. 이번 공연에는 지난 해 벨마 역을 맡은 최정원과 더블캐스팅돼 화제를 낳기도 했다.

“지난해 시카고 팀이 완성도와 흥행성 모두 호평을 받은 터라 부담감이 엄청 커요. 다들 도와줘서 재미있게 하고 있어요. 노래 선생님, 춤 선생님, 연기 선생님의 주문을 받아 훈련하다 보면 하나의 캐릭터가 완성돼있죠. 이 작품을 통해서 나도 모르는 나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어요.”

김지현은 오전 10시부터 6시까지 단체 연습을 마치고 나서 밤 10시까지 개인연습을 한다. 지난해 한 번 공연을 했던 다른 배우들보다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다. 저녁시간을 쪼개 인터뷰를 하던 그녀는 오후 8시 반 인터뷰가 끝나면 다시 극장에 돌아가 개인 연습을 할 거라고 말했다.

“벨마는 모든 복선을 다 갖고 있는 캐릭터예요. <올 댓 재즈>와 같이 아주 맛깔스러운 장면을 연출하기도 하고요. 벨마가 나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기대하고 봐도 좋으실 겁니다.”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