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 번역가 3인의 분석… 물량은 OECD국가 중 최다, 문학적 성숙도는 '글쎄'

■ 번역 강국 코리아(?)

OECD국가 가운데 번역서를 가장 많이 출간하는 나라는 어디일까. 놀랍게도 정답은 ‘대한민국’이다. 우리나라에서 매해 발행하는 5만여종 이상의 책 가운데 1/4 정도가 번역서다. 어찌 보면 우리 사회가 ‘다문화’하는 데 이런 경향이 큰 영향을 줄 법도 하다.

하지만 찬찬히 뜯어보면 이는 ‘기대’에 그친다. 전체 번역물의 원서 대부분이 일부 국가에 집중돼 있기 때문이다. 전체번역물의 90%이상이 여전히 미국, 일본, 영국, 프랑스, 독일 작품이다. 과거 영미문학 일변도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아직도 지나치게 그 비율이 높은 게 사실이다. 중국이나 베트남 등 문학의 역사와 전통이 깊은 나라들도 있지만 전체 번역서 중에 이들 작품은 소수에 불과하다.

백원근 한국출판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처세서를 비롯한 상업적 번역물만 범람하다보니 학술, 교양서가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지고 있다”며 “이는 다시 국내 문학의 빈곤화를 불러 번역서에 더욱더 의존화하는 현상을 가속화시키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한다.

■ 성공하는 번역서의 두가지 원칙? 이세욱 번역가

‘쏠림 현상’이 그 원인이라는 지적이다. 프랑스 문학 번역서는 이런 경향을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96년 프랑스 정부 공식통계에 따르면 한국은 이탈리아에 이은 제 2의 프랑스 문학 수입국이었다. 베르베르나 움베르토 에코를 비롯한 ‘스타 작가’ 외에는 프랑스 문학이 과거에 비해 홀대 받고 있는 요즘 분위기와 대비된다.

베르베르의 소설 <개미>를 번역한 이세욱 번역가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남들이 읽은 작품을 자신이 읽지 않으면 뒤쳐진다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며 ‘유명 작가’에 열광하는 우리나라 독자층을 분석했다.

‘세계화’ 열풍은 이런 현상을 더욱 가속화했다. 베스트셀러를 차지하는 대부분의 번역 작품이 실용서이거나 가벼운 내용이다. ‘무한경쟁’의 세계화 파고 속에서 직접적인 도움을 주는 실용서나 스트레스를 날려버릴 가벼운 내용의 책이 인기를 얻는 것이다. 처세서로 분류할 수 있는 <시크릿>은 최고의 베스트셀러 자리를 고수했다. 판타지 소설인 <해리포터> 시리즈는 1,100만부가 넘게 팔렸다.

<연금술>은 국내에서 ‘먹히는’ 번역서 서사의 비결이다. 전문가들은 유럽의 지적 전통에서 연금술사는 단순히 돌덩이를 황금으로 만드는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위대한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정신의 본질, 자아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파올로 코엘료의 <연금술사>에 묘사하는 바와 같다.

국내에서 히트한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 움베르토 에코의 <푸코의 진자>도 한결같이 주인공이 자아를 찾기 위한 여행, 모험담을 하는 이야기다.

이세욱 번역가는 “자아를 찾으려 주인공이 노력하는 과정이 집단무의식에 호소하는 바가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 일본문학은 왜 먹히나? 양억관 번역가

일본문학의 약진 역시 세계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는 번역서 트렌드를 보여준다. 무라카미 하루키에서 시작해 요시모토 바나나에 이르기까지 국내에서 큰 성공을 거둔 일본 소설은 일일이 나열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대형서점의 소설류 인기순위 톱 10에는 보통 3개 이상의 일본작품이 끼어있다.

‘경쾌함’내지는 ‘가벼움’이 강점인 일본 소설이 ‘먹히는’ 이유다. 독자들의 취향이 그만큼 가벼워졌다는 얘기다. 전후 세대에게 일본에 대한 거부감이 크게 줄어든 것 역시 이런 경향에 일조하고 있다. <모방범>, <냉정과 열정 사이> 등의 일본소설을 번역한 양억관 번역가는 “문화적으로 우리와 매우 비슷한 일본 소설류의 가볍고 경쾌한 느낌이 젊은 독자들에게 호소력을 얻는 것 같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는 마냥 경쾌한 현상은 아니다. 일제시대에 강제로 주어진 일본문화가 우리에게 거의 무의식이 돼버린 결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는 앞으로 더욱 심각해 질 수 있다는 게 전문가 지적이다.

양억관 번역가는 “지금 일본소설에 열광하는 젊은이들 대부분은 어릴 때 닌텐도 게임기로 놀기 시작한 사람들”이라며 번역서에 대한 지나친 의존은 문화 종속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한다.

■ '시장성'이라는 한가지 잣대의 빈곤함? 김석희 번역가

번역문학의 급증은 ‘편식’으로 인한 ‘부작용’을 우려하게 한다. 감각적이고 실용적인 번역서가 문학작품의 종류를 다양화할 수 있지만, 같은 종류의 작품 일변도로 가게 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지나친 편식이 꼭 필요한 무겁지만 깊이 있는 문학의 자리를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

198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소설가 출신으로 <로마인 이야기>를 번역한 김석희 번역가는 “독자의 취향을 번역서가 따라가는 것은 자연스럽다”면서도 “토지, 혼불, 태백산맥 같이 문학사에서 봉우리 같은 역할을 하는 작품이 더 이상 나오지 않는 것은 문제”라고 꼬집었다. ‘가벼움’과 ‘무거움’이 공존해야 문학의 성숙이 있다는 말이다. 번역문학과 국내문학의 상호 보완성 때문이다.

소득수준이 높아지면서 치열한 시대의식과 고민을 담은 무거운 작품보다는 실용서나 에세이, 판타지, 추리소설 같은 가벼운 번역물이 우대 받는 풍토다. 국내 문단 역시 이런 분위기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실제로 신세대 작가들의 작품 유형은 대부분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신변잡기적인 일상을 다루는 소설이 급증했다.

문단 원로들이 “요새는 문학에 전생을 바치겠다는 이들도, 하룻밤새 술 먹고 토해가며 고뇌하는 문단 분위기도 없다”며 걱정하는 이유다. 김석희 번역가는 “고민할 게 없어진 세대이기 때문인 것 같다”면서도 “신세대 작가들이 깊이 있는 작품을 많이 읽고 경험을 많이 하며 상상력을 키워가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는 “고민하지 않는 문학은 문학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 국민의 '조급성' 번역 출판에 영향

우리 번역물은 한국민의 조급성을 닮아있다. 조앤롤링의 <해리포터와 죽음의 성물> 한국 판은 원판이 출간한지 다섯달만에 나와 180만부가 팔려나갔다. 1년 넘게 세세한 번역작업을 거친 일본 출판계와 비견할만 하다.

눈앞의 이익에 급급한 출판사가 무리수를 두는 경우도 다반사다. 2006년 출간한 <마시멜로 이야기>는 SBS 아나운서 출신 MC 정지영의 대리번역 의혹을 받았다. 지난 1월 발간한 켄필드의 자기계발서 <1%의 행운> 역시 공동번역자 이름을 빼고 고도원 씨만 번역자로 내세웠다 대리 번역 논란에 휩싸였다.

백원근 한국출판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출판사도 회사인 이상 수익을 내려 노력하는 것을 탓할 수만은 없다”면서도 “출판자본의 잘못된 욕망은 고쳐야 한다”고 꼬집는다.

출판사의 ‘상업성 최우선 주의’는 자연스럽게 열악한 번역 작업 환경으로 이어진다. 번역자가 심사숙고나 조사가 부족한 상태에서 번역작업을 해 원작을 훼손할 뿐 아니라 독자의 이해를 어렵게 하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작가 이자 번역가이기도 한 움베르토 에코는 제라르 드 네르발의 <실비>를 이탈리아어로 번역하면서 소설의 배경이 된 프랑스 발루아 지방을 탐문한다. 150년전에 쓰여진 소설이지만 실제로 <실비> 주인공이 살았을 법한 집과 길 호수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원작의 주인공과 지역배경을 이해한 번역은 그렇지 못한 번역보다 수준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이름난 소수의 전문번역가 외에 우리나라 번역자들은 대부분 단기간 안에 책상 앞에서 단순히 원문을 우리말로 바꾸는 번역 작업을 한다.

최근에는 원서와 동시에 출간하는 국내 번역서도 늘고 있다. 이세욱 번역가는 “번역가에게 작가와 작품에 대한 진정한 애정과 장인정신이 필요하다”며 “이를 제대로 발휘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말한다.

■ 독자-출판사-번역가 3자가 변해야 번역문학이 변한다

“번역가 한 사람이 바뀐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번역가들은 번역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독자와 출판사, 번역가 모두가 변해야 하며 넓은 안목에서 보면 사회 전체가 바뀌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출판강국 일본은 이런 면에서 모범적인 사회다. 88년 일본의 한 대학교수가 비트겐슈타인 전집을 번역하자 <아사히 신문>은 전문가를 모아 서평위원회를 만든다. 아사히 신문은 비트겐슈타인 전공교수가 두달간 번역본을 검토한 후에 서평을 게재하게 만든다. 이 서평에는 총 110군데의 오역이 실렸다. 전집을 출간한 출판사와 번역가는 오역을 인정하고 개정증보판을 발행한다.

이를 두고 양역관 번역가는 “비트겐슈타인 전집을 번역한 번역가의 열정, 이를 꼼꼼히 검토한 교수의 학자정신, 잘못을 인정하는 출판사 모두가 대단하다”며 “번역이 성숙하고 이를 통해 국내문학과 문화가 발전하려면 결국 사회 전체의 성숙이 함께 이뤄져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PD수첩 번역 논란과 관련해 전문번역가들은 “이는 정치적인 의도에서 논란을 일으킨 것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오역문제가 논란의 중심이 아니라 정치적 의도가 있는 사람들이 오역을 핑계 삼아 시빗거리를 만들고 있을 뿐”이라는 견해다.

백원근 한국출판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양적 성장 뒤에는 질적 성장을 위한 진통이 있게 마련이다”라며 “이번 오역 논란은 문화발전의 과도기에 나타난 진통으로 본다”고 말한다. 백 연구원은 “이번 사건을 번역, 출판 문화 전반의 체질을 개선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작고한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은 2003년 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산문집 ‘우리들의 하느님’이란 책을 우수도서로 선정하려 하자 "도서관이나 책방에서 아이들이 스스로 책을 고르는 기쁨을 왜 뺏으려 하느냐"며 거부했다. 급증한 번역서로 우리 독자들이 더 행복해졌는지 되돌아 볼 일이다.


김청환 기자 ch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