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연방 알프스 산록 마을, 생 피에르 드 클라주를 찾는 기차여행열차 서너 번 갈아타야 하는 산골마을… 스위스 출판의 높은 수준 보여줘

생 피에르 드 클라주는 스위스 주네브에서 열차를 서 너 번 갈아타야 찾을 수 있는 마을이다. 하도 작은 마을이라 지도나 시간표에도 그보다 큰 샤모종 역의 이름만 보인다. 가파른 돌산들이 멀리 만년설을 이고 있는 연봉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틈새에 들어앉은 마을이다.

알프스 산골을 찾는 스위스 기차 여행은 수첩만한 단말기를 목에 건 여객전무가 친절함을 너머 깜짝 놀랄만한 유능함을 보여주기 때문에 심심치 않다. 여러 나라 언어에 능통한 여객전무는 영어로 질문을 하며 안달하는 미국 아주머니를 모른 척 제쳐놓고 불어로 통하는 이 사람에게 자세히 가장 쉽고 빠르게 목적지로 가는 방법을 찾아 느긋하게, 일일이 메모해 주었다. 이런 시간표는 역에서 주는 책자에도 등장하지 않는 비법이라는 점에서 흐믓하다. 그렇지 않다면 한 나절을 훌쩍 까먹을 수도 있을 텐데, 얼마나 대단한 절약인가!

주네브에서 시작한 여로는 레만 호수를 끼고 달리는 동안 크고 작은 미술관들과, 또 올림픽 기념관처럼 유명한 박물관들을 지나치거나 돛배가 자연스레 그림의 정취를 돋구어 주는 등 바쁜 사람이라도 잠시 게슴츠레한 눈으로 여유를 만끽할 수 있다. 레만 호수는 이렇게 멀리서 바라볼 때가 더 낫다. 실제로 호숫가를 거닌다고 해야, 막상 그 고장 주민보다는 아프리카, 아랍을 비롯한 이방인들이 더 많이 눈에 띈다. 이들이 이방인이어서가 아니라, 대체로 과거 못된 짓을 많이 했던 정권에서 도피해온 인사들과 그 식솔이기 때문이다. 레만 호수는 훌륭한 망명객을 감싸주기도 했지만 고약한 악당에게도 안식처를 내준다. 이것이 단지 넓은 아량 때문만은 아니다. 80퍼센트가 넘는 국민이 금융업에 종사하는 나라의 관행일 뿐이다.

그런 정치적 배경이 시원한 풍광과 어떻게 뒤섞이든 간에 주네브에서 기차를 타기 전에 먹었던 점심은 한마디로 최고였다. 우리네 식당음식이 값만 비싸지고 부실한 재료로 위기를 맞고 있는 것에 비한다면 이곳 물가가 비싸다는 편견은 일찍부터 접어야 했다. 해물로만 치더라도 홍콩과, 싱가포르의 세련된 접시를 연상시키고, 제노아의 맛깔스런 솜씨에, 프랑스 같은 푸짐함이 어울린 진짜 바람직한 ‘퓨전’을 선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시내 한 구석이나 산동네가 아닌 곳이 없는 이 나라 어느 산골에서도 고기나 치즈, 소시지 등의 서민적 음식은 늘 푸짐하고 저렴하다. 우리 외식비가 터무니없이 치솟다보니, 최근 더욱 간편해진 이곳 식단이 새삼 기분 좋게 다가왔던 셈이다.

포도밭을 끼고 있는 생피에르 드 클라주 마을의 초입(왼쪽) 책 마을에서 맨 처음 서점을 차린 피에르 앙투안 파브르(오른쪽)
포도밭을 끼고 있는 생피에르 드 클라주 마을의 초입(왼쪽), 책 마을에서 맨 처음 서점을 차린 피에르 앙투안 파브르(오른쪽)

그런데 나는 왜 그 산골마을을 찾아가고 있었을까? 그곳에 책방들이 모여 있는 ‘책마을’이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이웃나라들에서 시작되었던 농촌 문화 살리기를 위한 운동이 그 산골에서도 한창이라고 하니 안 가 볼 수 없었다. 미술사를 공부한 나는 수십 년 전 유학시절부터 스위스 출판의 높은 수준을 늘 감탄하고 부러워했었다. 화가와 미술사를 다룬 총서 가운데 독창적이고 중요한 몇 가지를 꼽으라고 한다면 틀림없이 이 나라 것들이 여럿 수위에 오를 것이다.

더구나 냉전 시대와 군부통치의 억압 속에서 청소년기를 보냈기 때문에 내 마음 한 구석에는 여전히 그 응어리가 깊이 남아 있다. 터무니없고 야만적인 금서의 시대를 살았던 나로서는 주네브와 취리히를 비롯한 스위스 출판사들이 펴낸 영어판, 불어판 번역서들이 없었다면, 일찌기 동유럽과 소비에트에서 시도했던 혁명적인 현대미술의 위대한 실험에도 까막눈이었을 것이다. 또 수백 년 이상 소중한 증언을 전해주는 이탈리아 미술의 고전에도 판무식했을 것이다.

물론 알프스 이북의 독일인들과 스위스 사람 자신으로 독일어권 인사들이 알프스 이남의 미술을 공부하고 써낸 수많은 주옥같은 에세이에도 깜깜하기만 했을 것이다.

러시아 혁명기에 산골 구석구석으로 촌부들을 찾아가 새로운 세상을 알리려고 분주히 선전활동에 나선 예술가들과, 미술관에서 보초를 서면서 누구나 드나들고 즐길 수 있는 새 시대의 예술을 꿈꾸었던 꽤나 낭만적인 선구자들의 활동은 단지 그런 정보를 접하는 것만으로 가슴 벅찬 일이었다. 그때 우리나라에서는, 러시아 혁명을 피해 서방으로 망명했던 과거 귀족과 부르주아 예술가들에 대한 예찬뿐이었다. 이런 사정이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스위스 출판은, 프랑스나 이탈리아라는 제국적 중심에서 바라본다면 변두리의 성격이 없지도 않다. 하지만 이런저런 파벌적이고 경쟁적인 이유로 파리와 피렌체에서 홀대받던 청년학자들이 이곳에 정착해 훌륭한 걸작들을 써내곤 했다.

이런 추억을 떠올리다보면, 그토록 오랜 세월 애증을 교차하며, 서로 깊은 주름살을 새기고 영향을 주고받은 우리 이웃들인, 일본이나 중국이나 몽고의 미술에 대해서 우리가 찾아가 배우고 이해하려 노력한 글을 거의 찾아볼 수 어렵다는 것도 펄쩍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아직도 유치한 적개심이나 애국심으로 이웃나라들을 헐뜯거나 무시하는 책이 대중적 인기를 끌고, 이웃의 좋은 점을 칭찬이라도 한다면 법으로라도 막아야 할 듯이 근거 없는 자만심을 더욱 키우고만 있는 우리의 풍토가 어떻게 수치스럽지 않을까.

험난한 현대사에서 바빠 살다보니 그랬다고 하기만은 쑥스러운 면이 없지 않다. 유럽인도 우리 못지않은 비참한 세월을 겪으면서도 이웃의 문화를 일방적으로 수입하기에만 급급하지는 않았다. 비록 일반 대중은 그렇게 했더라도, 지식인들은 늘 상대방을 이해하고 올바르게 파악하려고 동분서주했고 그 결과는 항상 이웃과 다른 형태의 책 속에서 의젓하고 멋진 자태로 나타나곤 했다.

그러니 포도가 성큼 익어가는 이 한적한 마을, 이렇다 할 해묵은 유적도 없는 가난한 벽촌에서 온 세상의 지적 유산을 만난다는 흥분을 억누르기는 어렵다. 갖은 신기술을 동원해서 원작의 효과를 재현하려고 애썼던 초대형 화집에서부터, 가장 소박한 납활자로 인쇄한 몇 십 쪽에서, 방대한 벽화와 걸작의 세계를 오직 반짝이는 지성의 힘으로써 겨루어보려 했던 문인들의 소책자에 이르기까지 다 읽어보기도 전에 우리를 사로잡는 책들이 얼마나 산더미처럼, 알프스 산록에 기대어 기다리고 있던가!

스위스 발레의 생피에르 드 클라주 마을 초입에 있는 서점. '나스네 집'의 입구. 알프스 산골 건물의 소박한 양식이다(왼쪽) '개양귀비꽃' 서점 앞에 마련된 탁자. 필자가 대접받은 커피와 과자가 놓여 있다.(오른쪽)
스위스 발레의 생피에르 드 클라주 마을 초입에 있는 서점. '나스네 집'의 입구. 알프스 산골 건물의 소박한 양식이다(왼쪽), '개양귀비꽃' 서점 앞에 마련된 탁자. 필자가 대접받은 커피와 과자가 놓여 있다.(오른쪽)

그 뿐만이 아니다. 등산을 즐기는 사람들을 위한 ‘코스’ 안내용 지도는 그 자체가 관심과 연구대상이라고 할 만큼 산과 더불어 살던 사람들만이 남길 수 있는 기막힌 자취의 기록이다. 영국과 네덜란드가 방대하고 세련된 대양의 해도(海圖)로서 물길따라 살아온 인간의 자취를 역사로서 기념했면, 스위스 사람들은 바로 산길을 따라 대자연과 산짐승이며 풀꽃들과 더불어 살아온 우리의 자취를 기억하는 커다란 저장고를 갖고 있는 셈이다.

그런 자리에서 일본과 북한에서 펴낸 우리 역사와 문화에 대한 책을 불어판, 영어판으로 보는 기분은 차라리 착잡하다. 일본이 식민통치기에 우리의 역사를 자신들의 틀 안에서 다루었던 이런 책자도 누군가 연구하고 있지 않을까? 이런 것은 ‘동북공정’이라며 고대사 문제를 두고서 호들갑을 떨기 훨씬 전부터 무섭게 공부해야 하지 않았을까?

이렇게 유럽 대륙에서 사람이 사는 가장 높은 지대에 책방들이 옹기종기 자리 잡은 이 마을에서 지구촌 가족의 이야기와 역사가 한 자리에서 만난다.

희귀본을 찾은 감흥이 식기도 전에 파리로 돌아오는 늦은 밤열차에 올랐다. 텅 빈 객차 속에 차창 밖 깊은 어둠 사이로 뿌옇게 흔들리는 암벽과 나무들의 우수수 스쳐가는 이미지를 바라보았다. 그때 몇 번을 오가며 이 사람을 주시했던 승무원들이 뒷자리에서 고속열차의 소음을 뚫고 ‘크게 속삭이는’말이 들렸다. 나는 간혹 벌어지듯이 남녀 일개조의 마약단속반이나 특별한 임무를 띤 승무원인 줄로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두 사람은 파리에 도착하고 나서 서로 만날 밀애를 속삭이고 있었다. 보통 사이가 아니거나 보통 사이를 넘어서고 싶은 동료의 애절한 대화가 어둠 속에 이어졌다. 아마 두 사람은 남몰래 약속을 하려고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줄 알고 이방인이 앉은 객실까지 찾아왔던 모양이다.

“ 장바! (장 바티스트라는 이름의 줄인 말), 이따 거긴 곤란해...”

“ 그럼 그 건너 지난 번... 있잖아...”

“ 언제까지 올 건데”

“ 금방, 내가 얼마나 급한지 알지 ...”

“ 이그, 짐승 같으니...”

이렇게 딱하고 애처로운 짐승처럼 될 때 아름다워지기도 하는 사람들이다. 인간이 짐승이 될 때 늘 잔혹하고 끔찍해지던 것만 보던 것보다야 백 번 더 나은 변신이다. 아무튼 두 사람은 자유가 넘치는 세상에서도 사랑이란 여전히 숨 죽여 속삭여야 한다는 듯이 대화에 몰두했다. 야간근무의 피로 같은 것도 모두 잊혔으리라. 이렇게 본의 아니게 엿듣게 된 두 사람의 간절한 목소리는 책마을에서 답답했던 가슴을 한꺼번에 식혀주면서, 때때로 여로만이 약속하는 작은 기적처럼 다가왔다.

■ 정진국 약력

저서로 서구회화에서 사랑의 주제를 해부한 <사랑의 이미지>, 기록사진에 대한 비평서 <사진 속의 세상살이>, <가족 앨범>, 유럽의 책마을 순례기인 <유럽의 책마을을 가다>, 에세이 <잃어버린 앨범> 등이 있다. 미술평론가로서 사진가의 사진집에 수많은 평론을 발표했다.


정진국 미술평론가 tabularium@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