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의 승리보다 희생의 가치를…'배트맨이 필요 없는 시대'의 불가능성 제시, 기존 선악의 이분법 재고

한국의 의적이 홍길동이라면 중국의 의적은 유협(遊俠)이며 구미의 의적은 로빈 훗이다. 의적은 민중의 영웅으로 숭배되고 문화 콘텐츠로 재탄생된다.

미국 영화는 의적보다는 영웅이 곤궁에 빠진 많은 사람들을 구해주는 수퍼 히어로를 선호한다. <수퍼맨>, <배트맨>, <아이언맨> 등 수많은 수퍼 히어로가 역사적 영웅의 자리를 대신하여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고 우상으로 숭배된다.

미국에서 현대 사회의 영웅은 영화의 캐릭터들이다. 영웅은 대체적으로 특별한 능력으로 세상을 악에서 구하는 일에 전념하며 윤리적 우월성으로 폭넓은 지지를 받게 된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 나이트>는 배트맨이라는 영웅을 등장시키는 시리즈다. 성공한 실업가인 브루스 웨인(크리스찬 베일)은 한 가지 희망에 자신의 삶을 바친다.

그것은 자신이 살고 있는 고담시가 정의와 평화가 유지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희망은 유사 이래로 모든 사상가들이 꿈꾸었던 것이며 가장 실현되기 어려운 일이라는 단순한 사실에서 이 영화는 출발한다. 브루스는 악당의 무리들에 대적하여 특별한 능력을 갖춘 배트맨으로 변장하여 악의 퇴치와 정의 실현을 위해 나선다.

하지만 세상에 대한 지루함을 해소하기 위해 배트맨에 대항하는 조커는 암흑가의 보스들을 모아놓고 배트맨과의 전쟁을 권유한다. 악의 무리들이 세상의 질서를 교란하자 배트맨과 검사 하비(아론 에크하트 분)와 경찰인 고든(게리 올드만 분)이 연대하여 위기의 고담시를 구하려 한다.

악의 대표자 조커는 시민의 목숨을 볼모로 배트맨의 가면을 벗기려 하며 배트맨의 아킬레스 건인 양심을 가책한다. 배트맨에게는 자신을 드러내느냐 시민의 목숨을 구하느냐가 죽느냐 사느냐 만큼 중요한 결단사항이다. 이때 검사 하비가 자신이 배트맨이다고 거짓 고백하고 조커의 체포에 미끼가 된다.

그리고 악당 조커가 체포된다. 대부분의 영화는 여기서 끝맺어야 관객은 안심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반전의 드라마가 펼쳐지며 그동안의 선악의 대결은 하나의 속임수에 불과했다.

조커는 영웅이 되려는 검사를 악의 무리로 추락시키려한다. 배트맨은 정의를 지키려는 검사와 자신이 사랑하는 레이첼에 대한 선택을 강요받는다. 그는 검사를 구하지만 이미 불/ 악에 얼굴이 정복된 상태였다.

선과 악의 대결은 정의와 진실의 가치 중 어디에 더 비중을 두어야하는가 하는 윤리적 논쟁으로 넘어간다.

배트맨은 정의를 지키기 위해서 진실을 희생하는 길을 선택하면서 조커와 싸움에서 승리하지만 결국 자신은 진실의 희생 댓가로 살인자의 누명을 쓰고 경찰의 추격을 받게 된다. 진실이 정의를 지켜내지 못한다는 사실은 관객들을 불편하게 하지만 이 영화는 선악의 이분법이 얼마나 단순 논리였는가를 확인시켜준다.

이 지점에서 관객은 의미를 되새겨야하는 불편함을 감수해야하고 평론가들은 철학적 논쟁과 삶의 성찰을 제공하는 대어(大漁)를 향해 낚싯줄을 던지는 의미의 낚시꾼이 되고 싶어할 것이다.

로저 애버트는 <다크 나이트>에 대해 “만화책을 원작으로 삼은 영화의 가능성”을 열었다고 극찬했다. 만화의 원작을 넘어선 것은 스펙터클과 인물의 선과 악에 대한 성찰에 대한 평가의 다른 말로 보인다.

애버트는 <다크 나이트>와 유사한 수퍼 히어로가 등장한 영화인 <로빈 훗의 모험>에 대한 리뷰에서 영웅에 대한 명쾌하면서 모든 할리우드 영웅들이 포함된 개념을 명쾌하게 규정한 바 있다. 그는 “이상적인 영웅은 착한 일을 하고 악당을 물리치며 좋은 시간을 보내면서 여자를 얻어야한다”고 했다.

선과 악의 대결에서 선의 승리 그리고 승리의 댓가로 부여된 여성의 사랑 획득은 하나의 공식이며 관객의 환타지를 채워주는 대중적 코드다.

하지만 <다크 나이트>는 이와 같은 영웅의 공식을 거절하고 선과 악의 대결에서 선의 승리라는 명쾌한 해답을 피한다. 동시에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서 여성의 사랑 획득이 아닌 여성과 결별이라는 가혹한 결말로 치닫는다. 여기서 관객은 당황하며 평론가들은 박수를 친다.

문장이 지적이며 날카로운 영화 평론가 안시환은 이 상황으로 서사를 몰고 간 이 영화는 ‘정신적 탈진’을 강요한다고 표현했다. 그리고 곧장 “내게 이 영화를 적절히 표현 할 수 있는 단어는 ‘걸작’이라는 것 외에는 없다”고 못을 박으며 지지를 표명했다. 정신적 탈진과 걸작의 거리는 멀다.

하지만 이 작품이, 아니 감독 아직 30대인 크리스토퍼 놀란이 보여준 상투적인 결말과 판에 박은 영웅 이미지에 대한 거절은 새로운 성찰의 깊이를 만들어낸다. 그것은 우리시대는 자생적인 악의 무리에 대항해야하는 배트맨이 여전히 필요하다는 사실의 동의와 정의는 진실의 힘으로만 지킬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아픈 수긍이다.

<배트맨>은 악의 세력이 정화되고 정의가 실현되어 사적인 연애감정을 충족시킬 만한 ‘배트맨이 필요없는 시대'의 도래 불가능성에 대해 정의를 지키려는 두 남자가 사랑하는 여성인 레이첼을 희생하는 것으로 응답한다.

선과 악의 대결에서 선의 승리라는 관습적 결말 보다 항구적인 악의 존재와 정의 실현의 불가능성에대해 방점을 찍는 무리수를 둔다. 또 하나는 <배트맨>이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두 번의 선택을 한다. 한번은 악당 조커를 체포하기 위해 불법 도청을 하여 그의 발신지를 추적하는 불법의 강요다.

다른 하나는 고담시의 정의를 위해 모진 고통을 감내해야했던 검사 하비에 대한 영웅 이미지를 남기기 위해 자신이 살인자로 자청하는 일이다.

두 가지 모두 하나의 문장으로 귀결된다. 그것은 정의를 위해서 진실조차도 희생해야하며 영웅조차도 희생양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블록버스터는 선과 악의 대결과 영웅의 승리 그리고 여성의 사랑 획득이라는 삼요소가 지배해왔지만 이제는 선과 악의 대결은 낡은 서사 공식이며 영웅의 승리보다 영웅의 희생이 보다 설득력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이 영화는 블록버스터의 가장 핵심적인 가치를 희생한다. 관객의 환타지를 충족시켜야한다는 블록버스터의 제 1조 1항을 폐기하고 현실에 대한 성찰이라는 무거운 철학적 주제를 암호문처럼 집어넣었다.

하지만 이 주제는 무겁지만 편하게 설득된다는 점에서 대중성을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고 있다.

<다크 나이트>는 흥행영화로서 대중성을 고수하면서 크리스토퍼 놀란은 연작의 상투성을 서사적 변형과 주제의 도입으로 넘어서는 성공적인 곡예를 보여준다. 이로 인해 관객은 신선한 할리우드 영화를 만나는 남다른 기쁨을 맛볼 것이며 진지한 평론가들은 지적인 발기를 강요하는 한편의 대작과 대면하게 된다.

■ 문학산 약력

영화평론가. 영화학 박사. 현 세종대 강사, 영등위 영화등급 소위원, 한국영화학회 이사.저서 <10인의 한국영화 감독>, <예술영화는 없다><한국 단편영화의 이해>. 영화 <타임캡슐 : 서울 2006 가을>, <유학, 결혼 그러므로 섹스> 연출.


문학산 cinemh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