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힘들 일도 시간이 흐르면 잊혀지고 아무리 좋은 일도 결국은 순간인 것 같다. 계절의 흐름을 거스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그리 뜨겁고 후덥지근 하던 날씨가 어느 새 출근길에 선뜩한 느낌을 준다. 박주가리는 지난 여름의 가장 막바지에 이곳 저곳 조사를 떠났던 산과 들에서 가장 흔히 보았던 식물의 하나였다.

박주가리는 깊은 산에 자라는 풀이 아니다. 시골 마을 울타리 옆, 밭에 쳐놓을 철망, 숲으로 가는 길목의 무엇인가 기대고 감고 올라갈 무엇이 있는 곳에서 자란다.

그런 탓에 평소엔 귀히 생각 않고 스쳐지나갔는데 이번에 자꾸 만나지는 이 풀을 가까이 들여다보니 여간 고운 것이 아니다. 이리저리 무엇이든 감고 올라가는 그리 굵지 않아 날렵하고도 아름다운 덩굴은, 이 풀이 감고 올라가는 다소 삭박했던 철망이나 울타리까지 어울어져 특별한 모습으로 바꾸어 놓는다.

한창피고 있던 꽃은 볼수록 예쁘다. 분홍색도 보라색도 아닌 은은하면서고 개성 넘치는 빛깔도 좋고, 종같은 모양의 작은 꽃송이들은 5갈래로 갈라져 뒤로 말리듯 젖혀져서 귀엽고 꽃잎 안에 털이 가득하여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모습으로 피어난다.

적절히 간격을 두고 달리는 긴 심장 모양의 잎은 가장자리도 매끈하고 잎도 다소 두껍고 반질거려 단정한 모습으로 꽃의 독특함을 조화롭게 어우른다.

이제 계절이 더욱 가고 난 후 그 모습을 드러낼 열매는 더욱 개성있다. 추 같기도 하고, 표주박을 닮았다고 말할 수 있는 열매는 그 표면이 도톨 도톨 거리며 익으면 벌어지고 그 속에 고운 솜털이 가득 들어있다.

박주가리를 잘라보면 흰 유액이 나온다. 보통 이러한 유액이 나오는 식물들은 독성이 있어 함부로 먹는 것을 주의해야 하고, 대신 특별한 증상에 처방약이 되기도 하는데 이 박주가리도 마찬가지이다.

민간에선 사마귀가 날 때 줄기의 흰 유액을 바르기도 했고, 피를 멎게 할 때 열매속의 털을 붙여 멈추게 했다고 하며, 뱀에 물리면 이 식물의 신선한 잎을 즙내어 발라 독을 풀어주었다고 한다. 한번에서는 열매를 자양 강정제 잎을 해독제등으로 이용했다. 하지만 아주 연한 새순은 나물로 먹기도 한다. 박주가리에는 노아등, 뢰과, 비래학, 학광표 등의 이름이 있으며, 한방에서는 나마등 이라고 한다

재미난 쓰임새는 열매속의 가득한 솜털을 도장밥이나 바늘쌈지의 속으로 이용했다는 기록인데 세월이 변하고 물자는 흔하여 이를 만들려고 박주가리 열매를 기다리는 일은 없을 듯하다.

하지만, 이 열매가 익어 솜털이 터져나갈 즈음을 기다려 눈여겨보면, 바람을 따라 바람도 없으면 입으로 “후” 불어 날아가는 솜털은 무명 솜이 아닌 비단실처럼 가늘고 아름다워 가을 햇살을 받아 반짝이며 눈부시게 비상하는 모습을 마음에 담을 수 있다.


이유미 국립수목원 연구관 ymlee99@foa.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