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의 생산·유통·소비 시스템 개선하고 예술 창작 주력 경쟁력 키워야

춤은 진화하고 있는가? 이 물음에 한국의 춤은 어떠한 답을 내놓을까. 역사가 긴 전통춤에서부터 신무용 형태로 발전해 온 모던댄스, 그리고 다소 늦게 뿌리를 내린 발레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춤은 발전과 퇴보, 정체를 거듭해 왔기에 ‘진화’라는 명제에 확실한 방점을 찍기는 곤란할 듯하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춤은 ‘변화’를 했다. 물론 춤마다 걸음의 폭과 세련됨의 정도, 춤사위에 따라 관객의 호응도 달랐지만 춤은 시간의 무게를 안고 진화했다.

그렇게 많은 굴곡을 헤쳐오며 성장한 춤은 이제 또다른 현실적 과제와 맞서 있다.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은 물론, 외부의 반(反)기류도 넘어서야 한다. 세계화의 압력과 장벽도 만만치 않다. 격변기와 과도기를 거쳐 온 한국의 춤이 앞으로 어떤 사위를 하느냐에 따라 ‘진화’의 윤곽이 달라지는 배경이다.

지난달 27일 대학로에 위치한 춤자료관 연낙제에서 성기숙 교수(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를 만나 한국춤의 현주소와 과제, 향후 전망 등에 대해 들어봤다.

- 춤(무용)은 어려운 예술이라고 한다. 춤은 이해하기 쉽고 접근하기 쉬운 ‘대중성’을 확보하는 전문성을 지녀야 한다고 보는데 춤이 대중과의 같은 호흡 속에서 존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일반 관객의 입장에서 춤은 확정된 텍스트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렵게 느껴지는 것 같다. 순수예술의 속성이 강한 춤에 있어 예술성과 대중성,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것은 쉽지 않은 문제다. 대중의 기호와 상통하는 발레를 제외하고 춤은 태생적으로 대중성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일반적으로 춤은 대중을 설득하는 힘이 부족한데. 여기엔 무용가들이 의도적으로 대중성을 외면하는 다소 보수적이고 완고한 엘리트주의벅 측면도 작용하는 것같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대중주의는 엘리트주의적 문화가 질적으로 하향평준화하는 것이 아니라, 고급문화에 내재된 질과 취향이 대중에게로 더 확산되는 것에 있다고 본다.

따라서 무용가들이 가지고 있는 대중주의에 대한 편견 혹은 왜곡된 인식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다음 단계에서 대중의 기호 혹은 심미안을 채워줄 수 있는 질높은 작품을 내놓아야 한다. 순수 춤에서의 전문성뿐만 아니라 대중을 매개할 수 있는 여타 분야로의 영역확장에서도 분발해야 한다. 아울러 대중들이 춤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가이드적 성격의 춤해설과 비평을 비롯 기획력과 홍보전략도 중요하다고 본다“.

- 한국 춤의 과제로 전통에 대한 공정한 평가와 계승, 그리고 외래문화의 주체적 수용을 통한 우리 춤의 ‘토착화’와 세계적인 ‘보편화’가 제기되곤 한다. 전통의 현대화를 비롯 춤의 토착화와 보편화를 위한 방안, 또는 지향을 말한다면.

“우리나라에 예술로서의 외래춤(서양춤)이 본격적으로 유입된 것은 일제강점기다. 1926년 일본 무용가 이시이 바쿠(石井漠)에 의해서인데 서양 본토를 통해 직수입된 것이 아니라 일본을 거쳐 들어온 일종의 ‘다단계 박래품’이라 할 수 있다. 그후 이시이 바쿠에게 입문한 최승희ㆍ조택원이 여기에 우리 전통과 접목하여 신무용이라는 새로운 춤사조를 창출했다.

엄밀하게 말해 신무용은 ‘서양춤의 한국화(토착화)’, ‘전통의 현대화’를 통해 미학적 완성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최승희ㆍ조택원의 경우 철저하게 동도서기(東道西器)적 입장에서 창작에 임했다. 서양의 기(器. 기술)를 배워 동양의 도(道. 정신)를 투영하는 것, 이러한 창작정신 속에서 우리 춤의 토착화는 물론 세계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었다. 서양의 모던댄스에서 출발했지만, 자국의 전통을 내면화하여 변용, 재창조 작업을 통해 세계무대로 진출한 것이다. 외래문화의 주체적 수용 내지 전통의 현대화, 춤의 토착화⋅보편화를 위한 길이 무엇인지 고민할 때 최승희ㆍ조택원의 활동을 반추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 한국춤 중 전통춤, 모던댄스, 발레는 다양한 수용과 창작, 대중성 확보에도 불구하고 '예술적 정체성'에서 의문을 받고 있다. 이들 장르의 정체성 확보와 미학적 진화를 위해 어떤 노력은 해야 한다고 보는가

“최근 춤의 공연량은 증가했지만 미학적 성과는 미약한 편이다. 작금의 창작현장에서 포착되는 제일 큰 문제는 안무가들이 매너리즘에 빠져있거나 지나치게 기술주의에 함몰되어 있다는 점이다. 창조적 사유 없이 이미 저장된 행위의 반복적 남발, 답습에 안주하고 있는 모습이 심각할 정도이다. 안무역량이 입증된 무용가나 대중성을 확보하고 있는 안무가들 조차 최근에는 작가적 진정성을 상실한채 대중의 취향에 영합하거나 쉽게 타협하려는 경향이 있다. 또 서양의 춤사조나 형식을 모방, 답습하는 것이 춤의 선진화 내지 진보라 착각하는 경향들이 있다. 춤사대주의 내지 탈(脫)식민성을 탈피하기 위한 노력과 함께 민족적 아이덴티티가 투영된 자생력있는 예술창조가 요구된다. 춤은 몸 움직임 이전, 이성의 작동을 매개한 지적활동이다. 신체활동 못지않게 심미적 활동이라는 점, 즉 정신문화의 산물이라는 춤내부로부터의 자각과 반성이 필요한다.

춤계는 다른 예술분야에 비해 폐쇄적이고 완고하다는 평가와 함께 변화하는 예술환경에 다소 둔감하다는 지적도 있다. 이는 춤이 진화하는데 장애 요인이라고 보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전통적으로 예술 혹은 미학에 대한 개념이 현대에 이르러 급속히 와해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춤계는 오랫동안 순수무용을 신봉하고 이에 집착하고 있는 것 같다. 오늘날 공연예술의 경향성은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예술장르간 뒤섞여진 크로스 오버, 퓨전 형식에 이어 기존의 장르개념으로는 포섭할 수 없는 다원예술이라는 새로운 장르가 도래했다. 또 순수무용과 대중무용의 결합, 대중춤으로 부상한 댄스스포츠의 확산, 산업화에 성공하여 공연계를 잠식하고 있는 뮤지컬의 비약적 발전은 부러울 정도다. 이러한 흐름에서 춤이 담당할 고유 영역이 무궁무진한데 이를 놓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현재의 공연예술계의 흐름을 예측하지 못하고 순수무용만을 추구한 대학 무용교육의 책임의 크다고 본다. 매년 1,500여명이 넘는 대학 무용과 졸업생이 배출되지만 갈 곳이 없는 실정이다. 그동안 춤사회가 아카데미즘 위주로 너무 폐쇄적으로 협소하게 진행되어 왔기 때문에 자본과 시장의 요구에 부흥하는 새로운 영역창출의 기회를 놓쳐 버린게 아닌가 한다. 이는 무용계가 처절하게 반성할 부분이다”

- 한국 춤의 긍정적인 미래상을 세우기 위해서 춤계 내부에서 해결해야 할 과제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중견무용가들의 역할이 지나치게 위축되어 있는 점이 개선되야 한다. 중견은 한 사회를 지탱하는 중추적인 ‘힘’이다. 그런데 현재 중견무용가들은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것같다. 원로세대의 억압과 치고 올라오는 젊은 세대의 압박, 그리고 스스로의 문제의식의 약화, 예술적 상상력의 고갈, 경제적 빈곤 등으로 창작 자체를 회피하고 있는 형국이다. 춤계를 지탱하는‘허리’로서의 중견무용가들의 활동이 활성화되어야 한다. 한마디로 세대교체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창작정신의 회복이 절실하다. 요즘 무용가들의 의식속에는 정부의 지원을 받으면 공연하고, 지원에서 탈락하면 공연 안한다’라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다. 과거에 비해 풍부해진 지원제도가 역설적으로 무용가들의 자생력을 저하시키고 창작정신을 고갈시키는 역기능을 초래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이러니하다. 예전에 비해 창작여건은 좋아졌는데, 좋은 작품이 나오지 않는다는 점에서 현재의 춤계는 한마디로 ‘위기’라고 본다. 문제는 춤의 ‘위기’를 구원해야 할 비평기능마저 제역할을 하지 못하고 무기력해져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과거에 비해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춤의 생산과 유통, 소비의 구조 역시 여전히 전근대적 시스템으로 되어 있다. 국제화시대에 걸맞는 비즈니스 모델이 될 만한 예술창작에 주력해야 하고 춤의 창조적 영역 이외의 부분에서도 직업화, 전문화를 꽤하여 경쟁력을 키워가야 한다. 아울러 일회성의 예술로서 기록의 부재성을 갖는 춤의 속성을 감안, 공연이라는 창조력의 결과인 일차적 생산물을 어떻게 물적 자산화하고 자원화할 것인가, 즉 춤을 문명사적 혹은 정신사적 맥락에서 수집, 기록, 보존하는 작업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 한국 춤의 발전을 위해 새정부나 관계 기관에 주문하고 싶은 사항은

“새정부 춤정책은 일회성의 정례적 지원이 아닌 장기적인 로드맵 속에서 이른바 철학이 반영된 제도 또는 지원정책으로 예술가들에게 희망을 안겨주는 실현가능한 정책을 구현해 달라는 주문을 해 본다. 아울러 문화예술의 본질인 다양성과 창의성을 존중한 정책이 필요하다. 그동안에는 제도와 정책에 따라 춤계가 양극화되는 현상이 나타나 춤의 인기/비인기 분야에 따라 ‘부익부 빈익빈’양상이 빚어지곤했다. 제도와 정책으로 인한 양극화를 해소할 수 있는 방안과 더불어 소외된 춤분야 내지 집단에 대한 관심과 애정어린 정책도 필요하다. 또 예술가에 대한 직접 지원보다는 민간영역의 인프라구축 등 전체 춤계(사회)의 토양을 견고하게 다지는 정책이 구현되야 한다. 이러한 토대위에서 진정한 의미의 춤의 ‘진화’ 내지 ‘선진화’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한다”.

■ 성기숙 약력

성기숙 교수는 성균관대 대학원 동양철학과를 졸업(철학박사)했으며 현재 춤학술전문지 <춤과 담론> 발행인, 춤자료관 연낙재 관장으로 있다. 저서에 <전통의 변용과 춤창조>, <한국무용학 연구의 지평>. <정재의 예악론과 공연미학>, <아시아 춤의 근대화와 한국의 근대춤>(공저), <춤의 선구자 조택원>, <춤의 정책은 있는가> 등이 있다.


박종진 기자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