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데렐라가 된 빈민가 처녀의 사랑 찾기

엄연히 원작이 유명한 대중적인 작품을 재구성하는 것만큼 용감하거나 또는 무모한 일도 없다. 더구나 아카데미상 8개부문을 석권하며 전 세계적으로 히트한 영화를 무대 위 라이브로 변환하는 작업은 더욱 위험부담률이 높다. 침몰을 면하는 길은 두 가지밖에 없다. 원작을 능가하거나, 최소한 동급은 유지하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 신화 <피그말리온>에서 출발, 이를 바탕으로 한 조지 버나드 쇼의 원작과 이를 영화로 옮기며 오드리 햅번의 잔상을 영원히 각인시킨 명화 <마이 페어 레이디(My Fair Lady)>를 선택한 이번 공연은 적어도 전자에 해당돼 보인다.

영화와는 또 다른 재미와 감동으로 한국 관객들을 사로잡고 있다. 현재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공연중인 뮤지컬 <마이 페어 레이디>. 전세계 17개국에 공연된 이 공연은 국내에선 초연 중이다.

공연은 2부로 나뉘어 약 3시간에 걸쳐 진행되지만 장편의 지루함을 잊을만큼 위트있고 밀도있다. 음성학의 대가로 알려진 헨리 히긴스 교수는 런던 빈민가에서 우연히 꽃 파는 처녀 일라이자와 마주친다.

일라이자는 아름답지만 초라하고 언행이 거칠다. 히긴스는 그녀의 지독한 사투리와 행동에 장난 반, 호기심 반으로 ‘내 교습만 받으면 당신도 금세 귀공녀로 바뀔 수 있다’고 확언한다. 그러나 즉석에서 이 제의를 거절했던 일라이자는 결국 제 발로 히긴스 교수를 찾아가 교습받기를 자청한다. 히긴스는 그녀의 기본 발성은 물론 의상에서부터 몸짓까지 상류층에 맞도록 혹독하게 뜯어고친다.

우여곡절끝에 마침내 그녀는 아름답고 우아한 매력녀로 변신한다. 예정대로 사교계에 화려하게 데뷔, 뭇 귀족 남성들의 구애를 받는 몸이 된다.

그러나 어느 밤, 히긴스 교수와 피커링 대령이 자신의 변신여부에 대해 서로 내기를 걸고 있었다는 사실을 우연히 엿듣고 심한 수치심을 느낀다. 냉혈한처럼 차가운 히긴스 교수와 한바탕 싸운 뒤 일라이자는 짐을 싸들고 사라져버린다. 히긴스는 뒤늦게야 자신이 일라이자를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고 그녀를 찾아헤맨다.

1부의 후반부, 일라이자의 첫 경마대회 참석때의 담소 대목은 특히 압권이다. 짧지만 폭탄급 웃음을 선사한다. 2부는 전혀 다른 분위기로 객석을 사로잡는다. 이후 일라이자와 히긴스 간의 사랑의 줄다리기가 진지하게 다뤄진다. 밑바닥 삶을 살던 여성을 일순간에 신데렐라로 재탄생시키며 스스로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은 또 다른 영화 <귀여운 여인>과도 일부분 오버랩된다.

무대에는 낯익은 얼굴이 다수 눈에 띈다. 연기력을 운운할 필요조차 없는 관록의 대배우 윤복희와 중견배우 김진태를 비롯, 탤런트 출신 이형철, 김소현, 그리고 김성기, 유혜정 등 실력파 배우들이 대거 출연, 호연한다. 특히 히긴스 교수 역의 이형철은 브라운관에서 미처 보지못한 매력을 이번 무대에서 재발견할 수 있다.

1956년 필라델피아에서 초연된 이 뮤지컬은 이번 한국 공연에서 정명주 번역, 데이빗 스완 연출로 제작되었다. 전반적인 흐름은 물론 디테일까지 서정적이고 스펙터클하다. 조명과 무대 전환도 매끄럽다. 섬세한 무대 미술 또한 중요한 감상포인트다. 대형 세트 전환시에 발생하는 시간, 공간적 공백을 무대 한 켠 핀조명 아래 막간 에피소드 형식으로 관객들의 시선을 유도, 공백감을 상쇄시킨 발상도 호감을 산다.

후반부, 비로소 자아에 눈을 뜬 일라이자의 노래 한 편은 특히 시적이다. “당신 없어도 봄은 와요, 당신 없어도 해는 떠요,....(후략)” 스스로 사랑을 피하려 애쓰는, 그러나 사실상 이미 빠진 사랑을 이겨낼 수 없는 여인의 마음이 이만큼 절절히 역으로 묻어나는 노래 가사도 오랜만에 만난다. 공연은 9월 14일까지 계속.


정영주 기자 pinplus@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