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호서 태권V까지 상전벽해 드라마90년대 중반 컴퓨터그래픽 첫 도입 이후 활용도·의존도 증가기술력은 할리우드 근접 불구 시장규모 작아 돌파구 마련 필요

오늘날 영화산업에서 컴퓨터그래픽(CG) 기술은 그야말로 ‘알라딘의 요술램프’와 같은 존재다.

제작자와 감독이 원하는 장면은 뭐든 뚝딱 만들어내니까 말이다. 물론 만만찮은 비용이 들지만 이마저도 그들이 요구하는 어마어마한 스케일과 초고난도의 장면에 비하면 매우 저렴한 대가라고 하는 게 옳다.

수천억 원의 제작비를 쏟아 붓는 할리우드 초특급 블록버스터들은 CG 기술에 대부분의 빚을 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약 CG가 없다면 이들 작품 상당수는 아예 기획단계조차 통과하지 못했을 것이다. 상상을 현실로 바꾸는 CG 기술의 ‘조화’ 덕분에 할리우드의 물량공세도 먹히는 셈이다.

한국 영화산업에서도 CG 활용도 혹은 의존도가 점차 높아지고 있다. 어떤 영화에서는 완성도를 높이는 화룡점정 구실을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영화에서는 전체 작품 제작의 뼈대를 이루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거의 모든 대작 영화에는 CG가 핵심 요소 중 하나로 자리잡아가는 추세라는 점이다.

이런 반론이 제기될 수도 있겠다. “한국 영화 중에서 컴퓨터그래픽을 멋지게 구사한 작품이 과연 몇 개나 있었나?” 부분적으로는 맞는 말이고, 또 부분적으로는 틀린 말이다.

사실 한국 영화 가운데 CG를 핵심 제작수단으로 삼아 만든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또한 대부분은 작품 속 일부 장면에만 CG를 활용했기 때문에 관객들의 뇌리에 각인되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쉬리>(1999), <태극기 휘날리며>(2004), <웰컴투 동막골>(2005) 등 1990년대 이후 한국 영화 흥행역사를 다시 쓴 작품들은 한결같이 CG 기술 덕택에 완성도를 최대치로 끌어올릴 수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역대 최고 흥행작으로 남아 있는 <괴물>(2006)은 미국 업체에 CG 작업을 맡겼지만 어쨌든 ‘CG의 승리’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다.

최근에는 아예 CG 기술을 미리 전제로 깔고 기획, 제작되는 영화도 부쩍 늘고 있다. 얼마 전 역대 흥행 순위 10위 안에 진입한 올 상반기 최대 히트작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은 시대물의 특성상 상당 부분의 배경 장면을 CG에 기댔다. CG 분량은 약 400컷으로 전체 러닝타임의 20%에 달했다고 한다.

한국 영화에서 본격적인 CG 기술이 첫 선을 보인 것은 1994년작 <구미호>다. 이 작품에서는 여자 주인공이 구미호로 변신하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연출하기 위해 ‘모핑’ 기법을 처음 활용했다. 모핑 기법은 어떤 사물의 형상을 전혀 다른 형상으로 서서히 변형시키는 기술이다.

이후 <은행나무침대>(1996), <쉬리>, <자귀모>(1999) 등 작품에서 새로운 시도를 거듭한 한국 영화의 CG 기술은 2004년작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확고한 경쟁력을 입증했다. 이 작품에서는 50년대 평양 시가지와 1ㆍ4후퇴, 수십만 중공군의 대대적 진격 장면 등이 국내 CG 기술에 의해 거의 완벽하게 재현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국 영화산업이 CG 분야에 관심을 기울인 지 불과 10년 만의 쾌거였다.

지난해 극과 극의 평판 속에서도 842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역대 한국 영화 흥행 5위에 오른 심형래 감독의 <디워>는 국내 영화산업 CG 기술의 발전 궤적을 되돌아볼 수 있는 안성맞춤의 사례다. 이 작품은 괴수 영화라는 한 우물만을 파온 심 감독의 인간승리이자 국산 CG 기술의 변천사가 농축된 결정판이기 때문이다.

국산 영화 CG 기술은 이제 해외에서도 인정받고 있다.

지난 4월 개봉된 할리우드 영화 <포비든 킹덤>은 청룽(성룡)과 리롄제(이연걸)가 함께 출연해 대결하는 구도로 흥미를 자아냈는데, 국내 시각효과(VFX) 업체 3곳이 이 작품의 CG를 전담 제작했다는 점이 큰 화제를 불러모았다. 톱스타 장동건이 주연으로 캐스팅된 할리우드 영화 <런드리 워리어>도 국내 업체가 CG 작업의 1/3을 수주해 관심을 모으고 있다.

현재 한국 영화의 CG 기술력은 영화산업의 본산인 미국, <반지의 제왕> 시리즈를 통해 단숨에 CG 강국으로 도약한 뉴질랜드에 근접하는 수준이라는 평가도 받는다. 또 일본, 유럽과 비교하면 일부 분야에서 더 앞섰다는 분석이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국내 영화시장 자체가 협소하기 때문에 할리우드의 CG 기술력을 따라잡을 만한 ‘규모의 경제’를 이루기 어렵다는 한계도 엄존한다. 그래서 해외 영화시장 진출을 통해 더 많은 경험과 노하우를 쌓고 이를 국내 영화시장으로 선순환하는 구조로 가야 한다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국산 영화 CG 기술력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국내 30여개의 VFX 업체가 프로젝트 별로 ‘연합군’을 형성하는 방안도 유력하게 거론된다. 사후세계를 배경으로 한 2006년작 판타지 영화 <중천>에서는 10여개 업체가 함께 참여해 상당한 수준의 CG 작업을 선보인 바 있다.

DTI 픽처스 김욱 이사는 “국내 업계 실정상 한 회사가 CG 분야의 기술력을 모두 할리우드 수준으로 확보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며 “다만 각각의 특장을 살려 컨소시엄을 구성한다면 할리우드와도 겨뤄볼 만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점에서 1976년 김청기 감독 원작 만화영화를 실사 영화로 제작하고 있는 <로보트태권V>는 매우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내년 개봉을 목표로 200억 원의 예산을 투입할 예정인 SF 블록버스터 <로보트태권V>의 CG 작업에 국내의 내로라 하는 7개 VFX 업체가 동참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작사인 ㈜신씨네 측은 <로보트태권V>를 2007년 할리우드 영화 <트랜스포머>에 비견될 만한 걸작으로 만들겠다는 포부다. <트랜스포머>는 자동차, 항공기 등이 로봇으로 변신해 전투를 벌이는 장면을 극사실적인 CG로 구현해 전 세계 영화팬들의 찬사를 받은 작품이다. 대다수 영화 전문가들도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CG를 선보인 <트랜스포머>에 대해 “놀랍다”, “경이롭다”는 반응을 나타냈을 정도다.

그런 <트랜스포머>를 과연 국산 기술로 만들 <로보트태권V>가 뛰어넘을 수 있을까. 한갓 호기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분명 <로보트태권V> 제작진은 자신감을 나타내고 있다.

이와 관련, 한 CG 제작 컨소시엄 업체 관계자는 “우리의 목표는 ‘트랜스포머 그 이상’으로 잡고 있다. 보완할 점도 있지만 1차 테스트를 통해 우리의 목표가 가능하다는 것을 이미 검증했다”고 강조했다. 연출을 맡은 원신연 감독 역시 “국산 CG 기술로 충분히 소화할 수 있다”는 확신을 여러 차례 드러낸 바 있다.

공교롭게도 <로보트태권V> 제작사가 <구미호> 등 작품을 통해 CG 분야를 개척해온 신씨네라는 점도 눈길을 끈다. 한국 영화산업에 CG 기술 활용의 씨앗을 뿌린 신씨네가 <로보트태권V>를 통해 거대한 결실을 거둬들일 것인지도 지켜볼 일이다.

■ "기술과 드라마 합쳐 트랜스포머 넘을 것"
로보트태권V 박관우 프로듀서 인터뷰


어릴 적 태권V를 보고 자란 30~40대들은 실사 영화로 구현될 태권V가 과연 어떤 모습일지 무척 궁금할 것이다. 로보트태권V의 컴퓨터그래픽(CG) 작업을 총괄하고 있는 박관우 프로듀서에게서 몇 가지 귀띔을 들어봤다.

-로보트태권V 실사 영화에서 CG가 차지하는 비중은 얼마나 되나.

“영화의 가장 중요한 캐릭터가 태권V다. 주요 악당들도 로보트들이다. 이런 캐릭터들을 CG 기술로 만들어내게 된다. CG 기술이 없다면 만들어질 수 없는 영화인 셈이다. CG가 차지하는 비중은 지배적이다.”

-국내 영화산업의 CG기술은 어떤 분야에 강점이 있는지.

“배경처리 기술은 세계적인 수준에 와 있다. 배경처리는 캐릭터와 부분적인 세트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공간)을 CG를 이용해 새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기술은 CG 이전의 아날로그 시절부터 할리우드에서는 활발하게 써 왔던 것이다. 영화는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이야기로 구성해내는 만큼 공간이 의미하는 비중은 막대하다. 역사극을 만드는데, 가령 일제 강점기의 서울 시내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라면, 다 세트로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때 CG를 이용하면 손쉽게 예전 서울 모습을 재현해낼 수 있다.”

-로보트태권V 제작에 필요한 CG기술을 모두 국내 기술로 충당할 수 있나.

“대부분의 기술들은 국내에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한 곳에 집중되어 있지 않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는 것이다. 어떤 것들은 국내에 분명히 존재하지만 영화산업 안에 있지 않은 것들도 있다. 태권V에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이런 흩어져 있는 기술들을 한 곳에 모아 멋진 영상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국내에 없다고 판단되는 기술적인 문제가 있으면 과감히 해외에서 찾을 생각이다.”

-어떤 CG기술들이 제작 과정에 동원될 예정인지.

“3가지 주요 기술이 쓰인다. 첫째는 태권V와 악당 로보트를 만들어내는 CG 캐릭터 기술이다. CG 캐릭터는 액션연기를 해야 하기에 그 질감과 움직임이 그럴 듯하게 보여야 한다. 둘째는 배경처리 기술이다. 태권V는 도시에서 전투를 하게 된다. 도시란 태권V와 같은 거대한 물체를 대상으로 촬영하기에 부적합한 공간이다. 보다 효율적인 카메라 워크를 표현하기 위해선 도시 전체를 CG로 재구성해야 한다. 셋째는 시뮬레이션 기술이다. 태권V와 악당 로보트의 전투로 부득이하게 건물이 부서지고 무너질 것이다. 실제 건물을 대상으로 그런 촬영을 할 수는 없다. 이때 시뮬레이션 기술이 필요하다. 컴퓨터 안에서 물리적인 공식을 이용해 그대로 시뮬레이션하는 것인데, 컴퓨터의 계산능력에 의존해야 하기 때문에 방대한 컴퓨팅 파워가 필요하다.”

-태권V는 여러 모로 할리우드 영화 트랜스포머와 비교되는데, 순수 국내 기술로 트랜스포머에 전혀 손색이 없는 결과를 만들 수 있나.

“트랜스포머는 엄청난 물량을 투입해 만들어낸 영화다. 그것 이상 가는 CG기술을 적용하겠다면 거짓일 것이다. 그러나 기술적으론 비슷한 수준으로 만들어낼 생각이다. 한국 사람들은 할리우드가 갖지 않은 특유의 집념이 있다. 이 집념이 물량을 능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영화는 기술을 뽐내는 장이 아니다. 기술만으로 영화의 완성도를 가졌던 작품은 존재하지 않는다. 기술은 영화를 표현하는 많은 소재 중의 하나이다. 트랜스포머에 손색이 없는 기술과 트랜스포머와 비교할 수 없는 탄탄한 드라마가 있다면 당연히 태권V가 더 좋은 영화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태권V와 배경 화면은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지는지.

“태권V의 디자인이 완성된 후에 모델링(Modeling) 작업에 들어간다. 모델링은 와이어프레임 형태로 3차원으로 구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모델링 후에 컬러와 질감을 적용하는 텍스처링과 쉐이딩(Texturing & Shading) 과정을 거치면 태권V의 모습이 완성된다. 이제 태권V를 움직이기 위해 리깅(Rigging)을 해야 한다. 말대로 엮는다는 의미인데 사람도 움직이려면 뼈가 있고 뼈에 붙어있는 살이 있어야 하듯이 그러한 메커니즘을 CG 캐릭터에 적용시키는 작업이다. 그 이후에 애니메이터가 태권V에 움직임을 주게 되고, 렌더링(Rendering)이란 과정을 거치면 사실적인 느낌의 태권V가 이미지의 형태로 나오게 된다. 배경은 실사로 촬영된 것일 수도 있고 배경처리 기술로 만들어진 가상 공간일 수도 있다. 태권V와 배경은 합성(Compositing)이란 과정을 거쳐 우리가 극장에서 볼 수 있는 완성된 형태의 영상이 된다.”


김윤현 기자 uny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