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 그림·평민 그림·겨레 그림 다분히 민족적·감상적 이해부터 바로 잡아야

민화는 흔히 ‘서민그림’ 또는 ‘평민그림’ 심지어 ‘겨레그림’이라 부르기도 한다. 비전문적 화가나 일반 대중들이 사회의 요구에 따라서 그린 그림으로 수묵으로 그린 정통회화와 대립적인 존재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한 것이다. 그러나 민화에 대한 이해는 다분히 민족적이거나 감상적인 측면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이제는 실증적 연구에 기반을 둔 성숙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본다.

■ 민화연구의 시작


민화라는 용어는 일본의 철학자이자 미술이론가인 야나기 무네요시(柳宗烈: 1889-1961)의 조어이다.

야나기는 “민중 속에 태어나고 민중을 위하여 그려지고 민중에 의해서 구입되는 그림”을 민화라 정의한 바 있다. 야나기는 우리나라 미술 특히 민속공예품에 대하여 각별한 애정을 가져 민중적 공예 곧 ‘민예(民藝)’라는 단어를 만들기도 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민화는 야나기가 민예의 개념을 그림에도 적용한 것이다.

그의 민화 예찬을 들어보면 얼핏 우리 민족의 순박한 감성과 조형능력을 높이 평가한 것으로 보기 쉽지만 사실은 작품제작자의 익명성과 손재주에 대한 예찬에 지나지 않는다. “무명의 장인이 만든 작위 없는 자연스러움”을 극구 찬양한 것은 우리의 예술을 정신적 산물이 아닌 민속학 또는 인류학적 대상으로 취급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민예와 민화를 강조하면 석굴암을 위시한 정교한 조각이나 전통시대 당시의 첨단과학의 산물이라 할 수 있는 금속공예, 문인들의 정신과 사상을 표현한 수묵화 등은 그 의의가 삭감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야나기에 의해 제창된 민화는 1970년대 조자용, 김철순, 김호연, 이우환 등 민화연구가들의 활동으로 인하여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민화연구의 한국인 1세대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의 연구는 민화를 “민족의 미의식과 정감이 표현된 겨레의 그림인 민족화(김호연)”, “평민·서민의 습관화된 대중적인 그림(이우환)” 등으로 보았다.

야나기의 주장을 심화시키고 확대한 것으로 평가되는 이들의 연구와 주장이 민화를 보는 우리의 인식틀을 규정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민화를 민족적=한국적 미술의 원형으로 강조하면서 ‘한화(韓畵)’ 또는 ‘겨레그림’으로 부르자는 주장은 일본 야마토에(大和繪)‘의 개념과 범주 및 특성과 상통되는 점이 많아 이들의 주장도 이를 원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운보 김기창 作 '바보산수'(위·왼), 운보 김기창 作 '호상'(위·오른)
나정태 作 '설송지운'(아래)

■ 민화연구의 새로운 지평


민화에 대한 연구는 1980년대를 풍미했던 민중사관에 의해 봉건 사회의 해체기에 드러나는 서민의식 또는 민중의식의 성장에 따른 진보나 변혁의 소산으로 보기도 하였다.

민화에 대한 연구 열기에 비하여 미술사학계는 민화의 작가를 알 수 없고 창의성이 없다는 등 미술사 사료로서 보기 어렵다는 입장이 강하여 연구가 시도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서 점차 미술사학적 관점에서의 연구가 점차 시작되었다. 유홍준, 이태호는 민화를 조선 후기 이후 향촌사회의 변동과 민(民)의 성장과 연관시켜 하나의 시대적 조류로 강조하였다.

1세대 연구자들의 통시대적 개념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 것이지만 아직 향촌사회 및 민중생활과 민화와의 관령성이 구체적으로 입증된 바 없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으며, 조선 후기 민화가 많이 남아 있는 것도 민화 자체가 세화(歲畵), 문화(門畵) 등과 같이 소모품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이 시기의 것이 가장 많이 남아있을 수밖에 없는 속성이 있다는 지적(홍선표)이 제기되고 있다.

이에 반하여 안휘준은 민속학적 측면에서의 문화침강설을 강조하였고 홍선표는 민화를 정통회화와 대립적 가치로 비교할 수 없는 측면의 다른 영역의 용도를 지닌 것으로 보았다. 이 두 관점은 기존의 국수적이고 감상적인 접근을 넘어 민화연구에의 새로운 지평을 연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홍선표는 어떤 특정 계층과 관련된 경향이기 보다는 주거장식과 세시풍속 등의 민속과 관련된 범계층적 실용치레물로 분석하였다.

19세기에 이르러 회화 애호층이 저변화되면서 채색민화보다 값싼 수묵민화가 서민용으로 크게 범람한 것도 상층 문인문화를 통해 정신적 상승효과를 누리기 위한 보상심리로 파악하였다.

민화는 특히 ‘국적있는 교육’ 등을 강조한 1970년대의 시대적 분위기와 연결되어 주목받았음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민화야말로 순수한 우리 그림이라는 의미에서 ‘겨레그림’이라는 국수적 시각에 의해 이 방면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고 아울러 현실 비판적 시각이라 할 수 있는 민중적 입장에서의 연구자들과 작가들에 의하여 새로이 조명되었던 것이다. 유명작가인 운보 김기창의 이른바 ‘바보산수’ 역시 민화적인 시각과 기법을 통해 작품을 제작한 것으로서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데에 중요한 몫을 담당했다고 본다.

다만 이러한 경향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여 시대를 선도를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작업인가에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양식을 재현하는 데에 그치거나 외형을 답습하는 반복적 경향을 노정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음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

현재 활동하고 있는 이른바 ‘민화작가’들에 대해서도 동일한 지적을 할 수 있다고 본다. 민화 특유의 치졸미를 넘어선 예술적 승화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 민화에 대한 비판적 검토


미술에 대한 인식도 그렇고 세계에 대한 인식도 대개 그렇듯이 대립적 각도로 보는 것이 편하다. 선과 악이 그렇고 민족과 사대, 보수와 진보 등이 그렇다. 민화를 보는 시각도 상층문화 곧 양반문화는 수묵화, 서민문화는 채색화라는 이분법적 대립구도로 인식하고 있는 것도 유사한 경향으로 여겨진다.

현재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민화관계 책들을 보면 왕실에서 사용한 일월오봉병, 십장생도에서 절집과 무당집에서 사용한 그림까지 채색이 들어간 것은 모두 수록되어 있다.

이러한 경향은 민화가 “민중에 의해 태어나고 민중을 위해 그려진 그림”이라면 논리에 맞지 않는다. 민화의 개념이나 범위·용도 등에 대한 검토나 성찰 없이 채색으로 그려졌다는 이유만으로 민화라 평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채색장식화 전반을 민화로 확대 해석하고 이를 고급과 저급으로 나누고 고급 민화를 우수 민화로 높게 평가하기도 하고, 저급 민화를 민화로 보는 혼란이 야기되기도 했다.

이처럼 민화라는 존재에 대한 인식이 철저하지 못한 와중에 여러 문화센터 등에서 인기리에 설강되고 있는 민화반 또는 민화그리기 강좌는 전통에의 제대로 된 이해가 아닌 외형 모사에 지나지 않을 것으로 여겨진다. 정신과 의미, 용도에 대한 천착이 아닌 단순한 외형모방을 그것도 왜곡된 이해를 통해 답습하고 확산하는 우를 범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우려되는 상황이다.

민화를 정확히 이해하려면 우선 시급한 것은 오래된 고택 등을 중심으로 현장조사를 하는 기초적 실증작업이 선행될 필요가 있다. 민화는 감상화가 아닌 실용화이기 때문에 그 용도와 실용성에 대한 이해와 분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우리의 민화와 중국의 연화(年畵), 일본의 우키요에(浮世繪), 베트남의 민간판화 등과의 비교연구도 요구된다.


김상엽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 happybard@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