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자기 그림에 화려하고 현대적 민화 입혀 해외시장 공략

“최근에 갑자기 민화가 뜨는 것 같다”며 그는 첫 마디를 꺼냈다. 한국의 민화를 현대적 그릇에 담아내는 도예가 이기영(53)씨. 서울 종로에 있는 그의 아담한 작업실로 향하며 그는 “이젠 서양화가들까지도 민화를 소재로 그리는 추세”라 전했다.

‘도예가 이기영’의 이름은 아직 국내에는 다소 생경한 편이다. 알만한 이들 사이에서만 입소문이 나 있다. ‘이기영 그릇 제작소’ 대표인 그는 목단과 모란, 나비 등 우리 전래 민화에 등장하는 소재들을 일상의 생활도자기로 만들어내고 있다. 한 눈에 보기에도 화려하고 강렬한 그림, 또는 아기자기하고 잔잔한 그림들과 독특한 디자인으로 눈길을 사로잡는 그릇들이다.

“우리 민화를 현대와 서양인의 시각에서 접근해 도예와 접목해 본 것들입니다. 저기 빨간 목단 그림의 그릇 세트가 아주 화려하죠? 저건 처음부터 서양의 크리스마스 테이블을 염두에 두고 만든 세트입니다. 모란 그릇 세트도 유럽 황실을 생각하면서 만든거고요. 저는 국내 시장보다 외국 시장을 뚫어 세계적 명품을 만드는 게 목표입니다. 실제로 저 식기들도 내년에 유럽 시장에 들고나갈 것들이고, 지금도 계속 그 준비 작업 중이지요.”

개인 도예인으로서 민화와 도예의 현대적 접목을 시도한 이로는 거의 유일한 주인공이다. 그가 민화를 바라보는 시각부터 남다르다.

“김홍도 그림이 좋다고 해서 그걸 그대로 그림으로 베껴 그려 모자로 만든다면 별로 사 가는 사람이 없을겁니다. 그간의 공부와 제 경험으로 보자면, 전통예술이라는 큰 틀은 유지하더라도 거기에 새로운 해석, 뭔가 현대인들의 취향과 문화적 트렌드에 맞는 변화가 있어야 발전이 있다고 봅니다.”

따로 홍보를 하지 않아도 아는 이들끼리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든다. 그의 그릇 일부는 캐나다 터론토의 한 백화점에도 인기리에 팔렸다. 이제껏 그가 만들어오거나 현재 만들고 있는 것들은 차 주전자와 찻잔, 접시 세트 등 일상생활에 쓰이는 것들이다. 실용적이면서도 고급스러운 민화의 파생물이다.

도예와 인연을 맺은 지 9년째. 원래 그는 유학파 출신 경제학 박사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프랑스 그르노블 2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 88년에 귀국했다. 국제민간경제협의회와 현대경제연구소를 거쳐 경기개발연구소에서 근무하던 2000년, 뜻하지 않은 ‘일’이 터졌다.

“당시 이천도자기엑스포가 열렸는데 그 엑스포 사후 관리 업무를 제가 맡게 됐어요. 그러면서 우리나라 도자기 산업실태와 현실에 대해서 공부하게 됐는데, 결론은 한마디로 ‘안타깝다’는 말 말고는 더 할 말이 없더군요. 그리고 연구차 현장 조사를 나갔다가 주위의 권유로 직접 도자기를 처음 만들어보게 됐는데 꽤 잘 만들어버린거예요. 주최측에서 ‘당신은 도자기를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라고 ‘뻥’을 쳤는데 그만 그 말에 넘어가서 정말 도자기를 배우며 만들게 됐죠.(웃음)”

한 대학의 도예과에서 한 학기 동안 청강, ‘기왕하는 거 제대로 체계적으로 해보자’는 생각에 명지대 산업대학원 도자기기술학과 석사과정을 수료하기에 이른다. 그리고는 주목받던 경제학자로서의 길을 과감히 접고, 도예인으로 전업했다.

“안그래도 경제학의 한계와 공허함, 게다가 중년에 접어들면서 삶이 허무하게 느껴지던 시기에 도자기를 만나면서 갑자기 제 생활이 윤택해졌어요. 특히 도자기는 과학이 반, 예술이 반인 것 같아요. 논리적인 측면에서 특히 제 취향에도 잘 맞았죠.”

도자기엑스포를 지켜보며 제일먼저 생각한 것이 세계 시장을 뚫는 것이었다. 석사 과정을 마치자마자 대학내의 벤처단지에서 직접 도자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동양적이면서도 서양생활에 맞는 고급품을 개발해 해외 시장에 내놓자’고 결심, 관련 연구과정에서 자료를 찾다가 가장 적합한 소재로 민화를 발견했다.

그림도 직접 그려넣고 도자기도 직접 구웠다. 얼마 뒤엔 경기도 이천에 ‘실크로드’라는 자신의 회사를 차리고 제법 큰 요(窯)까지 만들어 본격적인 제작에 돌입했다.

그렇게 만든 도자기를 가지고 200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국제가정용품박람회에 참가했다. 가져간 도자기만 컨테이너 1대 분량. 박람회의 부스 하나를 빌려 전 세계의 외국 바이어들을 상대로 직접 홍보와 판매에 나섰다.

“그런데 너무 의욕과 논리만 앞선 채 섣불리 접근한 거였어요. 제품만 좋으면 무조건 팔릴 거라는 생각으로 나갔는데, 그게 경제학자의 유치한 발상이었던거죠. 결과는 참패였어요. 시장의 트렌드나 마케팅에 대한 사전 준비도 없이 무모하게 덤빈 결과죠. 2004년에 결국 모든 것을 정리하고 이천의 사업을 접었어요.”

사업체는 정리했지만 의지를 접은 것은 아니었다. 서울로 돌아온 뒤 냉철히 자신의 실패원인을 되돌아보았고, 이를 바탕으로 재도전에 나섰다. 이전과는 사뭇 다른 접근이 시작됐다.

도자기의 외형적인 디자인보다는 사실상 도자기의 구매욕을 가장 결정적으로 좌우하는 도자기의 그림에 집중, 보다 화려하고 현대화된 민화를 입히는데 주력했다. 디자인면에서도 실용성을 보다 강화시켰다. 이 제2의 도전은 서서히 호평을 받으며 이미 국내의 애호가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러나 정말 그가 기다리는 것은 내년이다. 그의 개인적인 승부전일 뿐 아니라 한국 민화도자기의 승부가 판가름나는 두 번째 도전이 그를 설레게 한다.

“외국 명품 도자기들은 아무리 비싸더라도 몇 달씩 줄을 서서라도 기다려서 사람들이 사쟎아요. 그만큼 도자기 시장은 얼마든지 열려있는데, 문제는 얼마나 좋은 상품을 어떻게 외국에 갖고 나갈 것인가의 여부죠. 내년 유럽시장에 나갈 땐 그동안 새롭게 만들어 온 것들과 함께 특별 쇼케이스 등 이벤트도 펼치는 등 우리 민화로 만든 명품 그릇을 반드시 인정받고 돌아올 계획으로 철저히 준비하고 있습니다.”

■ 박스: 이기영은?

프랑스 그르노블 2대학 경제학 박사학위 취득(1986). 명지대 산업대학원 도자기기술학과 석사 수료. 국제민간경제협의회(IPECK)전문위원, 현대경제연구원 이사, 21C 지역경영연구원 대표 역임. 2003년 예술의전당 동문전 출품. 200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국제가정용품박람회 출품. 2003년 궁중음식연구원 食緣展, ‘세자빈 가례상’ 출품 등 전시회 다수. 현 이기영그릇제작소 대표. 작가해외진출지원 민간순수후원단체 aba그룹 대표.


정영주 기자 pinplus@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