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죽음 키워드 통한 사실과 허구 사이 경계 허물기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류은희, 조현천 옮김 현암사 펴냄/ 14,800원

이 책의 저자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잉게보르흐 바흐만, 피터 한트케와 더불어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작가다. 외조부 영향 아래 성장한 그는 사생아로 태어난 것에 대한 상처와 굴욕, 전쟁과 빈곤에 점철된 삶을 살았다.

그의 작품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전쟁과 죽음이다. 평생 폐결핵과 심장 질환에 시달렸고 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즘의 영향을 받았다. 때문에 그는 고립과 광기, 질병과 죽음을 주제로 많은 작품을 써내려 갔다. 국내 소개된 <비트겐슈타인의 조카><옛 거장들>은 이런 그의 사유를 보여주는 일련의 작품이다.

신간 <소멸>은 그의 마지막 작품으로 나치즘과 정신세계에 대한 그의 사유가 돋보이는 명작이다.

30년 전 고향인 오스트리아 볼프스엑을 떠나 로마에서 감베티에게 독일문학을 가르치는 나(프란츠 요셉 무라우)는 여동생의 결혼식을 치르고 로마로 돌아온 지 이틀만에 부모와 형의 부음을 알리는 전보를 받는다.

나는 가족의 사진을 보며 고향을 떠올린다. 문화와 예술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보이는 ‘정신적인’ 나와 삼촌은 물질적 삶을 지향하는 ‘반정신적인’ 부모와 오랜 갈등을 겪는다.

물질적 삶을 살았던 아버지는 생전 나치에도 협력했다. 나는 이전부터 고향 볼프스엑으로 대변되는 가족과 조국 오스트리아를 가장 정직하게 바라보는 반자서전 ‘소멸’을 쓰려고 마음먹고 있다. 결국 삼촌은 반정신적인 병인 심장병으로, 부모는 물질문명의 산물인 자동차 교통사고로 삶을 마감했다.

부모를 닮아 물질지향적인 두 여동생은 장례식장에서 엄청난 재산을 받게 된 나의 눈치를 살핀다. 나는 장례식 동안 죽은 부모와 형을 내 마음에서 ‘소멸’시키고 여동생의 기대를 배반하고 모든 재산을 이스라엘 종교단체에 희사한다. 장례식이 끝나고 1년 동안 나는 내 작품 ‘소멸’을 완성하고 생을 마감한다.

이 작품의 흥미로운 점은 소설 속 주인공 무라우가 쓴 작품 제목 역시 ‘소멸’이란 사실이다. 베른하르트는 자신의 소설과 소설 속 주인공의 작품에 똑같은 제목을 붙임으로써 허구와 실제라는 이분법식 구분이 무의미함을 보여준다. 객관의 사실과 허구적 요소가 얽혀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경계 허물기, 이것이 작가가 즐겼던 게임이다.

기승전결의 갈등 구도 없이 작가는 주인공 무라우의 입을 빌어 자신의 생각을 작품에 녹여낸다. 긴 호흡의 문장과 단 두 문단으로 이뤄진 구성, 5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작품의 양이 만만치 않지만 책 곳곳에 숨겨진 날카로운 문장은 작품을 읽는 지적 재미를 선사해 준다.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