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성 담론과 대중문화 차용 등 형식·내용 다양한 변화 시도

최근 수년 내에 국내 미술계에서 감지되는 가장 두드러진 현상으로는 미술경매 시스템의 정착 및 아트페어의 활성화와 함께 미술시장이 눈에 띠게 호황기를 맞고 있는 점이다.

일부 거품운운과 함께 미술시장이 조정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조심스런 전망이 나오기도 하지만, 예년에 비해 미술시장이 양적으로 팽창했다는 사실만큼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 내막을 알고 보면 반드시 반길 일만은 아닌 것 같다.

양적 팽창과 더불어 미술시장이 덩달아 건전해진 것으로 보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유통되는 작가나 작품을 보면 서양화 중심으로 편중돼 있고, 그 마저도 일부 경향(하이포리얼리즘과 네오팝)의 편애 현상이 뚜렷한 편이다. 더욱이 한국화는 미술시장에서 상대적으로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이러한 사정은 조각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문제는 미술시장에서의 열세를 곧바로 한국화단의 침체로 연결시킬 일은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개인적으론 최근 수년 내에 가장 뚜렷한 변화와 성과를 내놓고 있는 분야가 한국화라고 생각한다.

돌이켜보면 사실 한국화는 그 역사가 오래된 만큼이나 전통성이 강해 답보 상태에 놓여져 있던 시절이 있었다. 이처럼 도무지 변화할 조짐이 보이지 않았던 한국화가 최근 변화하기 시작했다. 시대가 변하면 환경이 변하고, 의식이 변하고, 표현도 덩달아 바뀐다. 이에 따라 전통적인 산수화 역시 달라진 환경에 맞게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순수한 의미에서의 전원이나 자연으로 부를 만한 전망이나 장소 같은 것은 없다.

한적하다싶으면 송전탑이 가로 막고 서 있고, 숲 속의 자투리 터에는 어김없이 크고 작은 공원들이 조성돼 있다. 이제 군 초소는 전원풍경의 일부가 되었으며, 산 정상에는 헬리콥터를 유도하기 위한 H자가 흰 페인트로 칠해져 있다.

그런가하면 험한 곳일수록 산세도 빼어나 그만큼 등산객도 더 많이 찾는다. 이처럼 사람이 찾는 산이 아닌, 적막강산을 생각하기도 어렵고 현실성도 없다. 등산객은 말하자면 현대판 산수풍경에 빠질 수 없는 한 요소가 된 것이다. 그리고 지필묵으로 한정되던 재료적 한계도 더 이상 작가들의 발목을 잡는 구실일 수 없게 되었다.

이와 함께 일단 관념적인 표현에서 현실적인 표현으로 선회한 한국화는 일상성 담론과 함께 각종 대중문화를 차용하고 각색하기에 거침이 없다. 자기내면을 파고드는가 하면,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소통수단으로서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

그 대략적인 변화와 성과의 양상을 보면, 공간 가득히 설치해 놓은 라면으로써 전통적인 준법을 대신한다든지(박병춘의 라면준), 공사장의 구부러진 철사나 길에 난 잡풀로써 전통적인 사군자의 난 그림을 대체한다든지(김학량), 그림 속의 산수를 공간 밖으로 불러내 유람하게 한다(임택의 입체산수).

이와 함께 전통적인 산수화를(석철주의 신몽유도원도), 민화를(김근중, 홍지연), 책거리 그림을(김지혜) 현대적으로 차용하고 변용하고 각색한다. 세계와 사물을 보는 관점이 달라진 만큼 전통 역시 현대적인 감각에 맞게 재해석되어져야 한다. 그리고 그 재해석의 한 방법으로서 차용이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4- 김학량. '금산오경' 사진인화, 유성펜
5- 임택 '옮겨진 산수' 설치 전경
6- 고영미.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한지붙이기, 채색, 먹, 콘테, 프라모델

차용은 옛 그림 속에 자신을 그려 넣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고(서은애), 전통적인 옻칠을 현대적으로 변용해 마치 발굴된 현대인의 미라를 보는 것 같은 아이러니를 발생시키기도 하고(홍승용), 서양의 대중매체에 등장하는 유명 캐릭터를 전통적인 먹그림으로 재현하기도 하고(손동현), 나아가 데미안 허스트의 알약 그림과 겸제 정선의 금강전도가 오버랩 되기도 한다(노자영).

차용은 원본의 권위를 숙주삼아 이에 기생하는 논리로서, 원본에도 그렇다고 사본에도 속하지 않는 어떤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전략적 의미를 갖는다. 모든 결정적인 의미로 굳어진 것들에 개입하고 간섭해 이질성의 박테리아를 퍼트린다는 점에서 아방가르드의 낯설게 하기와도 통한다.

현대한국화의 변화 양상으로는 자기반성적인 경향성 역시 예외일 수 없다.

포탄이 빗발치듯 쏟아지는 전쟁터 한 가운데 적나라하게 노출된 벌거벗은 여인을 통해 개인과 제도가 대립하는 현실을 은유적으로 표현한다든지(고영미), 자기 자신에게마저도 낯 설은 무의식적 자아와 대면하게 한다든지(김정욱), 일종의 정신병리학적 풍경을 통해 몽환적이고 비현실적인 비전을 예시한다(이진주).

전통적인 한국화가 관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지평으로부터 인간 내면의 욕망을 해부하고 밝히는, 모든 금기시되고 터부시된 것들이 자유롭게 거주하고 교류하는 형이하학적 장소로 내려온 것이다.

이외에도 현대한국화는 일상성 담론(유근택, 신하순), 하이퍼리얼리즘과 시점의 문제(김건일), 오브제의 차용(변정현의 테이프 그림), 캐릭터와 아바타(권기수), 허구적 서사 만들기(박윤영), 그리고 혼성(홍주희의 퓨전동양화) 등 형식면에서나 내용면에서 거침이나 막힘이 없다. 그 양상은 현대미술과 관련한 다양한 담론의 지점들과 맞물리며, 나아가 담론을 리드하기조차 한다.

이상으로 그 변화양상을 살펴보았지만, 정작 자신의 직무에 충실한 작가들은 한국화로 분류되는 장르 구분이나 장르 특정성에 괘념치 않는다.

평면에 한정되지도 않거니와, 지필묵에 발목 잡히지도 않는다. 특정 소재에 한정되지도 않고, 어떤 기법을 고집하지도 않는다. 종이에 그린 먹그림은 물론이거니와 오브제와 콜라주, 조각과 설치, 디지털과 인터넷을 종횡무진 가로지른다. 일각에선 한때 반짝거리다 말 트랜드 현상을 우려하기도 한다.

깊이가 없고 가볍다고도 한다. 이런 우려가 기우는 아니지만, 큰 틀에서 볼 때 일종의 지각변동을 겪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듯싶다. 예술이란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 이질성의 계기를 심는 것임을 인정한다면, 한국화호는 현재 순탄하게 항해 중이다.


고충환 미술평론가 arthan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