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은애·임태규·홍주희 등 산수화·수묵 재해석, 개성과 참신한 시각 반영

지난 몇 년간 후끈 달아오른 미술시장은 온갖 꽃들을 화려하게 피워냈다. 그 중 캔버스를 화분으로 삼아 유화, 혹은 아크릴의 요염한 색채로 피어난 서양화는 줄곧 상종가를 기록했다. 특히 보기 좋은 극사실계열의 꽃들이 사랑을 받았고 꽃을 키우는 농부가 젊은 사람이라면 더더욱 환영을 받았었다.

반면 미지근한 볕뉘도 쬐지 못한 채 야생화처럼 어렵사리 작고 성근 꽃을 피워낸 이들이 있다. 온갖 역경과 고난을 감내하며 모진 생명력을 지켜 온 일단의 한국화가들이다.

물론 한국화에도 봄날은 있었다. 지난 1970년대 중ㆍ후반은 한국화의 전성기였다. 그러나 이후 줄곧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해 급기야 그 정체성마저 회의되고 있는 실정에 이르렀다. 변화하는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환경과 그 요구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한 결과였다.

결국 한국화는 미술시장에서의 외면은 물론이거니와 전통미술로서의 존엄은 고사하고 현대미술로서 응당 받아야 할 대접마저 받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왜곡되고 참담한 현실을 타개하며 오롯이 자신의 모양을 드러내고 있는 이들은 기성의 작가들이 아니라 모두 신진작가로 분류될 수 있는 일단의 청년작가들이다.

많은 이들이 몰락한 전통의 정원을 가로질러 떠나 버렸지만, 이들은 여전히 종가의 내력을 가슴 속 깊숙한 곳에 간직한 채 내일을 기약하고 있는 이들이다.

본래 동양화로 불리던 한국화는 1982년 교과서에 처음으로 한국화라는 명칭으로 개재됨으로써 비로소 오늘의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동양화에서 한국화로의 개명은 일본 식민잔재의 극복은 물론이거니와 중국미술에 대한 사대주의를 극복하고 우리미술의 정체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의지의 발현이라 할 것이다.

이에 현대라는 수식어가 붙은 것은 그저 전통미술로서의 소극적인 의미가 아니라 건강한 현대미술로서 당당히 나서겠다는 자신감의 반영인 셈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한국화는 소재의 개방은 물론 재료의 확대에 이르기까지 그 외연을 무한대로 넓혀 나아갔다.

얼핏 백화제방을 방불케 하는 다양한 실험들과 재기발랄한 작품들이 등장하였지만 역설적으로 이는 한국화의 정체성 상실과 이어지게 되었다. 한국화와 서양화의 구분은 모호해 졌으며, 전통으로 불릴만한 뚜렷한 가치관마저 상실된 체 한국화는 표류하며 깊은 나락 속에 빠져들게 되었다.

시장은 한국화를 철저히 외면하였고 한국화를 지향하는 작가들마저 급속히 감소하여 지방대학에서는 한국화과가 폐과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급기야 한국화 쇠망론, 혹은 무용론까지 등장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인 것이다.

현재 한국화를 견인하고 있는 청년작가들의 작품들은 전통적인 심미관이나 감상체계와는 사뭇 다른 것이다. 이들은 특정한 경향이나 이즘으로 구분 지을 수 없을 정도로 분방하고 개별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는 한국화가 처한 상황에 대한 개별적인 적응과 생존을 위한 모색의 결과일 것이다.

이들에게 과거 전통에 대한 어떠한 부담감이나 종속의 그림자도 찾아보기 어렵다. 단지 개인의 개성을 바탕으로 한 자유롭고 개방적이며 분방한 펼침이 있을 뿐이다. 그럼으로 이들의 작품에는 법칙이나 원칙과 같은 공성(共性)이 발견되기 보다는 개별적인 개성(個性)이 두드러진다.

그렇다고 이들은 굳이 의식적으로 전통과의 단절과의 단절이나 일탈을 추구하지 않는다. 단지 개인의 필요에 따라 전통을 차용하고 재해석하며 자신의 시각과 입장을 반영할 뿐이다. 이는 결국 과거 전통시대의 심미관으로부터의 해방으로 나타나게 되고, 이전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면모로 오늘에 발현되고 있는 것이다.

1- 구본아 <物-夢遊桃源(몽유도원)> 한지위에 먹, 채색2- 홍주희 <푸른 별의 아담과 이브> 한지에 수묵,채색3- 지요상 <적한(寂寥)> 200X135cm, 화선지위에 수묵4- 임태규 _ print5- 우종택 <줄서기> 한지에 수묵 혼합
비록 전통의 부담감에서 벗어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작품들은 전통과의 일정한 연대를 유지하면서 개인의 개성과 참신한 시각을 반영해 내고 있다. 전통과의 연계는 전통이 지니고 있는 저력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전통을 대신할만한 새로운 형식이 여전히 확보되지 않았다는 반증일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와중에 눈여겨 볼 대목은 바로 전통적 양식에 대한 주관적인 해석과 개별화 노력이다.

예를 들면 서은애, 홍주희와 같은 작가들은 전통적인 산수화를 재해석하고 재구성함으로써 전통과의 연계를 유지하고 있다 할 것이다. 더욱이 이들이 차용하고 있는 산수화는 동양회화 전통에서 한 걸음 물러난 곳에 자리하는 청록산수화이다.

남종일색의 경직된 전통 해석에서 벗어나 북종에 속하는 장식적이고 현란한 색채의 산수화는 서구적인 풍경과는 또 다른 것으로 전통의 재해석, 혹은 현대적 발현이라는 내용으로 정리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김보민의 경우 한국미술의 태두로 추앙되고 있는 겸제 정선의 진경산수를 모티프로 한 독특한 작품들을 선보이고 있다.

일정 부분 전통으로부터의 차용이 여실히 드러나는 화면에 운필의 묘가 배제된 기계적이고 기하학적인 선들로 돌연 현대식 건축물들을 배치하는 화면 운용 방식은 그야말로 전통과 현대의 절충과 융합이라 할 것이다.

수묵은 동양회화의 가장 보편적이며 전통적인 표현 수단이다.

그것은 특정한 사상을 전제로 지고한 정신성을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현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수묵의 이해에서 벗어나 새로운 수묵의 표정을 추구하는 이들의 작품들 역시 충분히 주목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지요상, 우종택, 임태규, 구본아 등의 작업은 수묵을 기저로 삼고 있지만 제각기 다른 해석과 수용을 통한 독창적인 작업을 선보이는 경우이다.

지요상의 작업은 수묵을 주요 표현 수단으로 삼고 있고 여백을 십분 살린 구조를 지니고 있지만 이를 전통적인 수묵 해석에 적용시켜 읽어내기 어려운 독특한 것이다.

수묵의 물성과 작가의 기교적인 운용이 어우러진 그의 화면은 수묵의 정신성이나 형이상학적 해석에서 벗어나 일단 수묵을 물질로서 수용함으로써 고루한 전통의 질곡에 빠져드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구축되어진 그의 화면은 오히려 더욱 사변적인 것이다.

결국 그는 수묵이라는 아주 오래된 표현 형식에서 일탈함으로써 오히려 수묵의 새로운 표정과 깊이를 찾아내고, 이를 주관화시켜 자신만의 조형으로 안착시킨 경우라 할 것이다.

임태규는 서화동원(書畵同源)이라는 고전적인 필묵관에서 벗어나 전혀 새로운 일탈의 묘미를 선보이고 있다. 섬세하며 날카로운 운필은 과거 중봉을 근본으로 한 유려하고 부드러운 서예적인 필법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신경질적이고 격에 얽매이지 않는 그의 작업 방식은 분명 정통의 그것으로부터 일정 부분 벗어난 것이지만, 그 결과로 구현되어 나타나는 조형들은 오히려 전통적인 수묵의 그것보다 더욱 풍부한 감성을 표출해 내고 있다.

우종택과 구본아는 붓끝에서 발현되는 현란한 운필의 변화 대신 수묵 자체가 지니고 있는 깊이와 무작위적인 표현성에 주목하는 경우라 할 것이다. 수용성 안료 특유의 분방한 표현력을 십분 수용하지만, 이를 적절히 통제하고 운용하여 형상을 구축해 나아가는 방법은 상대적으로 점진적이고 절충적인 방식이라 할 것이다.

수묵은 극히 오랜 전통을 지닌 재료로 이미 충분히 풍부한 조형적 경험을 축적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기성의 표현방식에서 새로운 표정을 찾아낸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지만, 이들은 개별적인 감수성을 바탕으로 대단히 오래된 수묵의 엄숙한 표정에 생기를 돌게 하고 있다.

이들에게 있어서 수묵은 해묵은 전통의 굴레가 아니라 자신의 개성을 발현하고 오늘을 표현할 수 있는 효과적인 매재로 선택한 것이다. 이들의 작업은 비록 점진적이고 절충적인 방식이지만 이러한 모색이 근본적인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기에, 그 결과는 오히려 더욱 큰 것일 수 있다는 기대를 가능케 하는 경우이기도 하다.

사실 한국화는 그 외연의 확대에 따라 무수히 많은 양태들로 분화되고 있다.

여전히 한국화에 대한 규정이 모호한 상황에서 특정한 경향만을 거론한다는 것은 그만큼 제한적이고 부분적인 것이 될 수 밖에 없다. 혹자는 이러한 상황을 혼란기로 보기도 하고, 또 누구는 전에 없던 다양성의 전개를 통한 새로운 가능성의 도래를 점치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오늘의 한국화가 여전히 오늘의 시대가 요구하는 가치와 심미조건에 부합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나마 일단의 작가들의 작업을 통해 한국화의 새로운 생명력을 확인 할 수 있음은 그나마 다행이라 할 것이며, 이들이 개별적인 노력과 분투의 결과로 쌓아올린 오늘의 성취는 작금의 한국화가 처한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더 없이 소중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이제 필요한 것은 그저 한국화이기에 아끼고 존중하여야 한다는 편협한 억지가 아니라 현대를 호흡할 수 있는 자생력 있는 건강한 우리미술로서의 한국화일 것이다. 앞서 거론한 몇 몇 작가들이 한국화의 새로운 경향을 대변한다고는 말하기 어렵겠지만, 적어도 우리는 이들의 성장과 좌절을 통해 한국화의 새로운 이정과 그 전개추이를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김상철 미술평론가 ksx@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