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 '비몽' 등 다양한 작품 개봉 준비… 열혈 영화 팬은 즐거워유통구조 개선·스크린 점유율 제한등 제도 보완 필요

최근 들어 비교적 적은 규모의 예산에 작품성을 갖춘 작은 영화들이 잇따라 개봉되었거나 개봉을 준비 중에 있어 매우 고무적인 일로 여겨진다. 류승완 감독의 '다찌마와 리', 장훈 감독의 '영화는 영화다', 그리고 윤종빈 감독의 '비스티 보이즈' 등과 같은 영화들이 개봉되어 비록 흥행대박은 터뜨리지 못했지만, 열혈 영화팬들의 성원에 힘입어 나름대로 선전(善戰)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김기덕 감독이 각본을 쓰고 제작을 맡은 '영화는 영화다'가 백만 관객을 돌파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이윤기 감독의 네 번째 작품인 '멋진 하루'는 칸느의 주인공 전도연과 하정우가 콤비를 맡아 호연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멋진 하루'는 하릴없이 빈둥거리며 한탕의 꿈을 키우고 있는 백수 청년 앞에 어느 날 옛 애인이 찾아오지만, 정(情) 때문이 아니라 빚 때문이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벌어지는 하루 동안의 해프닝을 매우 자연스런 투톱시스템의 연기로 묘사하고 있는 수작이다.

이에 앞서 지난 8월에 개봉됐던 엄성운 감독의 '달려라 자전거'도 흥행에 참패했다. 일련의 영화 및 드라마들을 통해서 탄탄한 연기력을 인정받고 있는 기대주 한효주가 사연 많은 여대생 역을 맡아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주었지만, 대중관객과의 접속에는 실패한 것이다. 이 영화는 전국적으로 고작 3개의 개봉관에서만 상영됐다.

강이관 감독의 '사과'가 제작 이후 근 4년여 만에 개봉을 준비하고 있지만, 그 성과는 여전히 미지수다. 연기파 배우들인 문소리, 김태우, 이선균이 삼각관계에 얽혀 연애와 결혼에 관한 매우 진솔한 리얼 토크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을 홍보 컨셉트로 내세우고 있다.

저예산 영화제작의 달인(達人)이라고 할 수 있는 김기덕 감독의 '비몽'도 일본의 청춘스타 오다기리 죠와 국내 인기배우 이나영을 기용하여 새로운 영화체험을 선사할 채비를 하고 있다. 남자가 꿈을 꾸면 여자가 몽유병(夢遊病) 상태에서 꿈 내용을 실현한다는 특이한 소재로 실험성이 매우 강한 작품이다.

감독 특유의 스타일이 배어 있는 전형적인 작가영화지만, 바로 그 이유 탓에 흥행대박을 기대하기는 난망인 듯하다. 무엇보다도 확보된 개봉관수가 한국형 블록버스터급 영화들의 경우와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부족할 뿐만 아니라 절대적으로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 여성 감독들의 부상

이경미 감독의 '미쓰 홍당무', 김은주 감독의 '여름, 속삭임, 부지영 감독의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 그리고 홍지영 감독의 '키친' 등과 같은 영화들도 목하 개봉을 준비 중이다. 모두 여성 감독들이다. '우생순'으로 대중관객과의 접속에 성공을 한 임순례 감독을 제외하고는 근래 와서 이렇다 할 활약을 보여주고 있는 여성감독이 부재하던 차에 젊은 여성감독들의 대거 진출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미쓰 홍당무'는 학창시절부터 얼굴의 홍조(안면홍조증) 탓에 급우들로부터 왕따를 당했던 한 처녀가 교사로 부임하여 학원 불륜사건에 휘말리게 된다는 얘기를 매우 코믹한 터치로 묘사하고 있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왕따 처녀 양미숙 역을 맡은 공효진의 연기가 물이 올랐다는 평을 들을 만큼 그녀가 연기하는 홍당무 캐릭터가 흥미진진하다. 그녀의 철부지 제자 역을 맡은 신예 서우의 독특한 매력도 함께 감상할 수 있다. 하지만 다소 야한 선정적인 대사들 탓에 청소년관람불가 등급을 받은 상태다.

'여름, 속삭임'은 지난해 촬영 및 후반작업을 모두 마쳤지만, 개봉관을 잡지 못해 이제야 관객 앞에 선을 보이게 되었다. TV 드라마 등을 통해서 연기력을 인정받은 이영은이 덜렁대면서도 활달한 성격의 문학소녀 영조 역을 맡았고, 최근 서서히 부상하고 있는 신인 하석진이 다소 까칠한 성격의 꽃집 청년 윤수 역을 맡았다

. 이 영화는 제자 영조가 노교수의 서재를 정리해주면서 펼쳐지는 자잘한 일상사를 통해서 사랑과 인생의 의미를 묻고 있는 매우 감동적인 소품이다. 영화 시사회 직후 섬세한 감성을 지닌 늦깎이 여성감독의 등장에 환영하는 분위기다.

역시 지난해 제작을 마친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는 씨가 다른 두 자매 명주(공효진)와 명은(신민아)이 서로 티격태격하면서도 결국은 떼려야 뗄 수 없이 얽힌 가족의 성원임을 깨닫게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언니 명주는 생선가게를 운영하고 동생 명은은 오피스레이디인데서 알 수 있듯이 성격이 판이하게 다른 두 자매 역에 공효진과 신민아는 적역인 듯 보인다. 김태용 감독의 '가족의 탄생'(2006)이후 모처럼 훈훈한 감동을 주는 신개념 ‘가족영화’를 만난 느낌이다.

'키친'은 결혼한 여자가 남편의 후배와 함께 한 집에 동거하게 되면서 그들 사이에 벌어지는 미묘한 감정의 변화를 약간은 도발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일본의 인기작가 요시모토 바나나의 동명소설을 바탕으로 했다. 아직 세상사에 덜 찌든 젊은 아내 신민아가 불현듯 찾아온 사랑의 감정에 빠져드는 장면이 무척 인상적이다.

일찍이 같은 원작을 각색한 엄호 감독의 홍콩영화 '키친'(1997)과 비교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김정권 감독의 '그 남자의 책 198쪽'도 잔잔한 여운을 주는 소품 같은 영화다. 이 영화에서는 슬픈 눈빛을 가진 터프가이 이동욱과 가수출신 유진이 서로의 상처(傷處)를 보듬으며 사랑을 찾아가는 연인 역을 맡아 일찍부터 화제를 모았다. 귀추가 주목된다.

1- 김기덕 감독과 일본의 스타배우 오다기리 죠, 그리고 이나영의 만남이 화제가 된 '비몽'
2- 제작 이후 4년여 만에 개봉하는 '사과'
3- 떠오르는 신예 하정우와 칸느 수상 배우 전도연의 호흡이 빛난 '멋진 하루'
4- 감독의 발랄한 연출과 물오른 공효진의 연기가 돋보임 '미쓰 홍당무'

■ 배급체계의 개선 수반되어야

이렇듯 우리나라 영화계는 이제 일백억 원대를 넘는 대형 프로젝트에 사활을 건 투자를 하기보다는 이른바 중간 내지 저예산 규모에 맞는 작품들을 지향하는 추세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러한 흐름이 대세라고 판단하기는 아직 이르지만 말이다. 어쨌든 영화문화의 다양성을 위해서는 매우 다행스런 현상이라고 본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 영화들이 과연 제대로 된 루트를 통해서 관객대중에게 어필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현행 멀티플렉스 시스템 내에서는 이른바 소품으로 분류되는 상기 작품들에게 할당되는 스크린 개수가 과연 몇 개나 될지 회의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단과 학계는 기회 있을 때마다 현행 유통구조(배급체제)의 개선을 주장해왔다.

정재형 동국대 교수는 지난 제9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치러진 세미나에서 우선 무엇보다도 “지난 10년간 사회가 민주화됨에 따라서 영화 검열의 철폐 및 표현의 자유가 주어졌다는 점은 큰 실적”이라고 전제한다.

이로 인해 한국영화의 양적 및 질적 성장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넘어가자는 얘기다. 그러면서도 정 교수는 지난 정권에서는 문화를 표방하면서도 산업에만 치중하는 이율배반적 정책을 구사했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아야 한다고 덧붙인다.

그리하여 향후 영화정책의 방향은 문화와 산업을 조화시키는 것에 초점에 맞추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정책 및 제도들이 시행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비상업영화(일명 작은 영화)의 무료보급 정책이 시행되어야 한다. 이를테면 국가가 도서를 대량으로 구입하여 도서관에 비치함으로써 국민들 모두가 무료로 책을 볼 수 있는 여건을 만들듯이 정부가 비상업영화를 무료로 보급하는 정책을 도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단편이든 장편이든, 장르영화든 예술영화든, 다큐멘터리든 극영화든 비상업적 목적으로 만들어진 모든 영화들의 판권을 정부가 일괄 구입하여 무료로 배급함으로써 영화문화의 활성화를 꾀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둘째는 비상업영화를 무료로 배급하는 한편, 상업영화의 해외 수출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는 기술혁명을 통한 네트워크 시네마의 구축이다. 넷째는 시장자율성과 공정거래를 위한 정책적 실천이다. 이에 대해 의도는 좋으나 현실성이 떨어지는 이상적인 주장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 영화다양성 확보 위한 보완 시급

약간 다른 맥락에서 강한섭 서울예대 교수는 우선 무엇보다도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는 정책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지난 10년간의 영화정책이 정부가 앞장서 종자돈(seed money)을 제공하고 민간자본을 유도하는 공급확대 정책이었고, 그것이 실패로 드러났음으로 앞으로는 수요 창출에 역점을 두어야 한다는 얘기다.

두 번째는 영화다양성 확보를 위한 법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독과점(獨寡占)은 시장을 위축시키는 주범이므로 스크린 점유율을 제한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괴물' 한 편이 전국 617개의 스크린에 걸림으로써 48.3%의 스크린 점유율을 기록했었는데, 이는 독과점의 한 표본이라는 비판이다. 영화다양성에 대한 중대한 침해였던 것이다. 이런 발언 이후 강 교수는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그의 이론적 주장에 실천력이 담보되기를 기대해본다.

요컨대 작은 영화들을 활성화시키기 위해서는 제도적 개선 및 보완이 시급하다는 것이다. 작품만 재미있게 잘 만들면 관객이 몰릴 것이라는 상투적인 주장은 이제 더 이상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이른바 의식 있는 영화감독 및 제작자들이 제아무리 선의(善意)를 가지고 좋은 작품을 만들고 싶어도, 또 만들었다고 해도 유통과정에서 배제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현행 부익부빈익빈 상영시스템을 개선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로서는 강 교수의 주장처럼 스크린 점유율 제한만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본다. 그것만이 시장의 확대와 문화다양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 보기 때문이다.


김시무 영화평론가 kim seemoo@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