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트리 웨스턴 스타일 '희망의 노래'동남아·미주까지 '노란 티셔츠 열풍'허스키 보이스로 미8군 가수시대 활짝… 3차례 재발매

한류열풍은 한국 대중문화의 우수성을 국제적으로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었다. 동남아를 넘어 서구인들도 한국의 대중음악, 영화, 드라마에까지 친밀감을 느낄 만큼 우리 대중문화 수준은 이제 국제적인 수준에 도달했다.

한류열풍의 역사가 배용준 주연의 드라마 ‘겨울연가’나 월드스타 ‘비’, 그리고 수많은 아이돌 스타들에 의해서 최근에 생성되었다고 생각한다면 굉장한 오해다. 한류열풍은 장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반세기에 걸친 대중문화예술인들의 해외도전사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한류열풍의 기원과 뿌리를 조명하기 위해서는 타임머신을 타고 1950년대로 돌아가 봐야 한다.

50년대는 전쟁의 후유증으로 온 나라가 잿빛 하늘처럼 우울했고 칙칙한 모노톤이었다.

당시 미군들의 여흥을 위해 생성된 미8군 무대는 서구의 새로운 대중문화를 경험시킨 거대 유입 통로였다. 미8군 무대와 AFKN 방송을 통해 당대 대중은 미국에서 유행하는 팝과 재즈 그리고 다양한 댄스들을 거의 동시대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했다.

중요한 사실은 그 무대를 통해 60년대 이후 한국대중음악을 주름잡는 일단의 음악인 그룹이 생성되었고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소위 미8군 출신 가수들이 바로 그들이다. 서구음악 장르로 무장해 다재다능한 능력을 펼쳐냈던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60년대에 들어서자 대거 일반무대로 진출했다. 그들로 인해 당대 국내 대중음악계에 일대 지각변동이 벌어졌던 것은 당연했다.

선봉장은 ‘노란 샤스의 사나이’를 들고 나온 ‘한명숙’이었다. 국내가요로는 최초로 동남아는 물론 미주지역까지 널리 알려져 지금껏 사랑 받는 손석우 작곡의 노래다. 한명숙은 당시로는 생경했던 컨트리&웨스턴 스타일의 새로운 창작곡으로 1960년대 미8군가수시대의 탄생을 세상에 힘차게 알렸다.

그녀가 밝고 명랑하게 노래한 명곡 <노란 샤스의 사나이>는 단순한 노래의 개념으로 보기엔 너무도 강력한 사회적 파장을 던졌다. 그녀의 노래는 색감이 없는 칙칙한 세상에 마치 갓 태어난 아기 병아리를 연상하게 하는 희망의 멜로디로 작용했다.

우울했던 당대 젊은 남성들에게 ‘노란 티셔츠 열풍’까지 선사한 이 노래는 기특하게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라는 국가재건의 기틀에 ‘활력 넘치는 분위기와 정서적 힘’을 보태는 화학작용을 일으켰다.

1952년, 한국전쟁 통에 이북에서 월남한 한명숙은 태양악극단의 무명가수로 대중가수 생활을 시작해 1954년 미8군 <세븐 스타 쇼>의 미8군 가수가 되었다.

당시 미8군 무대에서 활동했던 선배가수는 최초의 재즈가수 박단마, 홍청자가 있었고 동료 가수들로는 곽순옥, 이춘희, 로라 성, 이금희, 현미 그리고 후배로는 최희준, 박형준, 위키리, 유주용 등이었다. 하나같이 50-60년대 한국 대중 음악사에 빠트릴 수 없는 최고의 가수들이다.

그 중 후배이지만 그녀가 존경해 마지않는 최희준은 음악적 은인이다. 그의 소개로 작곡가 손석우를 만나 음반을 취입하는 정식가수가 될 수 있었다. 비너스레코드를 창설한 작곡가 손석우는 당시로는 뉴웨이브 음악인 서구의 스탠더드 팝계열의 노래를 세상에 전파하려는 야심을 품은 음악인이었다.

때마침 창립 작품을 기획 중이던 그가 중견 신인가수 한명숙에게 필생의 명곡 <노란 샤쓰의 사나이>를 선물했다. 1961년의 일이다. 악극단무대로 시작해 10년의 세월동안 천신만고 끝에 자신의 목소리를 10인치 데뷔음반에 담았다.

‘노란 샤스의 사나이’가 최초로 발표된 비너스레코드 1집은 ‘손석우 멜로디’ 타이틀로 한명숙, 최희군, 김성옥, 계수남, 오사라, 블루벨즈 등 가수 6명의 총 8곡이 수록된 전형적인 컴필레이션 음반이다. 더구나 타이틀곡은 한명숙의 노래가 아닌 김성옥의 ‘이것은 비밀’이었다.

아무도 ‘노오란 샤스의 사나이(원제목)’가 시대를 뛰어넘는 명곡으로 등극할 것을 꿈도 꾸지 못했음을 증명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2번째 트랙으로 수록된 한명곡의 노래는 이후 3차례에 걸쳐 재발매 시키는 마력을 발휘했다. 음반 발매 후 뜨거운 인기를 감지한 손석우는 한명숙의 노래를 타이틀로 내세운 비너스레코드 11집을 발 빠르게 발매했다.

하지만 꺼질 줄 모르고 확신되는 노래 열풍으로 노란 샤쓰를 입은 사나이의 그림까지 그려 세 번째 재발매 음반까지 제작해야 줄은 그 자신도 몰랐을 것이다.

당시는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는 꾀꼬리’ 예쁜 목소리로 노래해야 가수로 인정받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미군 병사들은 냇 킹 콜, 패티 패이지, 도리스 데이 같은 허스키 보컬을 선호했다.

이에 한명숙을 비롯해 현미, 최희준, 이금희 등 미8군 대표가수들 상당수는 맑은 허스키 보컬을 구사했다. 시원했지만 삼베같이 거친 이들의 노래는 미8군 무대에서는 인기가 대단했지만 일반 대중에겐 낯설고 괴상하게 여겨졌다.

어느 시대건 새로운 물결을 받아들이기엔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하듯 당대 대중이 최초의 허스키 가수 ‘한명숙’의 노래에 열광하기까지엔 반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