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정조 시대 독자적 시각 재조명… 71년부터 1년에 2번 전시회 열어

주옥 같은 한국 고미술품들을 소장하고 있으면서, 일년에 두 번, 5월과 10월에만 문을 여는 간송미술관. 그래서 ‘비밀의 화원’이라 불리는 간송미술관이 올해 봄 전시회로 조선의 천재화가 장승업(1843~1897)과 그 제자들의 작품세계를 선보였다.

주말에는 말할 것도 없고, 평일에도 관람시간 1시간 전부터 미술관 밖에까지 관람객들이 길게 줄을 서서 입장순서를 기다릴 정도로 이번 전시는 큰 호응을 받았다.

간송미술관 관계자에 따르면 5월18일부터 6월1일까지, 보름 동안 전시회에 다녀간 관람인 수는 족히 5만 명을 넘는다. 2년 전, 간송 탄생 100주년 기념 특별대전 때도 10만 여명의 관람인파가 몰리는 등 간송미술관 전시회가 대성황을 이뤄 화제가 됐다.

서양 현대미술의 인기에 밀려 잊혀져 가는 것으로만 생각했던 옛 한국문화예술. 그러나 간송미술관의 이번 장승업 전을 계기로 우리 전통문화의 저력이 살아있음을 또 다시 실감하게 된다.

■ 간송학파 이끄는 학자

최완수 간송미술관 학예실장의 대학 입학 기념사진

간송미술관은 간송 전형필(1906~1962) 선생이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 손에 넘어가는 우리문화유산을 지키기 위해 사재를 털어 평생 사 모은 귀중한 조선시대 미술 작품들을 간직한 곳이다.

1962년 간송 선생이 죽은 뒤, 최완수(66) 한국민족미술연구소 연구실장이 간송미술관 소장품을 보존·연구하며 우리 문화유산의 긍지를 지켜가고 있다. 최 실장은 우리 문화에 대한 자신감을 불어넣었다고 평가 받는 간송학파를 이끄는 학자이자, 겸재와 추사 연구의 대가로 꼽힌다.

전시 때마다 관람객들 앞에서 한복에 두루마기를 걸치고 우리문화유산을 강의하는 그의 모습에서 깊은 인상을 받은 이들도 많다.

전시가 끝나자 미술관은 다시 고요한 연구실로 변했다. 그가 모시 한복을 입고 운치 있는 전통 다기(茶器)에 차를 따라준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시대로 돌아가 학식과 인품을 겸비한 선비와 마주 앉아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은 어느날 갑자기 생긴 게 아니라 늘 갈망해 오던 것이라고 봐. 내가 70년대 초반부터 서울대학에서 한국미술사를 강의했는데, 당시에도 학생들이 내 강의에 너무 많이 몰려들어서 학교측이 골치를 썩었지. 한학기에 500명도 넘는 학생들이 미술사 수강신청을 했는데, 서울대학에 그만한 학생을 수용할 수 있는 강의실이 없었거든. 아무리 재수강신청을 받아도 마찬가지로 500명 넘는 학생들이 몰려들어 결국 그 학생들 다 듣게 했어. 얼마 뒤부터 연세대에서도 강의를 시작했는데, 거기도 똑같았어. 전부터 우리 미술사를 배우고 싶어하는 열망은 컸지만, 교육이 그걸 외면했던 거지.”

서울대 사학과를 졸업한 그는 국립박물관 연구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어려서부터 우리 전통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던 그는 일제 식민사관을 깨겠다는 결심으로 사학과를 택했다. 그러나 대학시절 일제시대 교육 받은 교수들 밑에서는 식민사관에서 탈피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독자적인 시각으로 미술사를 연구하는 것이 일제가 왜곡해 놓은 우리문화의 가치를 복원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어. 문화재는 우리민족 고유의 얼과 혼이 담긴 유산이니까. 그래서 박물관에 입사했지. 박물관 안에서 유물에 대해 쓴 책을 보고 연구한 게 아니라 현장답사를 다니며, 내 눈으로 직접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확인하고 기록했어.”

국립박물관 연구원 시절, 그는 박물관장에게 문화유적이 풍부한 고도(古都) 경주로 발령 내달라고 졸랐다. 경주로 내려간 후 최 실장은 하루종일 답사를 다녔다.

그러던 어느날, 소문을 듣고 당대 최고의 미술사학자이자 간송의 절친한 친구였던 최순우 선생이 답사현장으로 그를 찾아왔다. 그와 간송미술관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한국미술을 연구하려면 대장경을 다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었지. 그런데 최순우 선생이 간송미술관에 <신수대장경>이 소장돼 있다는 걸 알려줬어. 100권짜리 신수대장경을 보려고 이곳에 왔다가 간송에 대해 들었는데, 간송의 정신이 내가 꼭 가야 할 길과 맞는 거야. 그때 마침 간송미술관에 한국민족미술연구소가 생겼고, 연구조건 같은 건 묻지도 않고 그 길로 이곳을 택했지.”

그가 간송미술관에 뿌리를 내리고 민족미술 연구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온지 어느덧 40년이 지났다.

그 동안 그가 이룬 업적은 대단하다.

간송탄생 100주년 기념 특별대전 마지막 날, 관람객들이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 밖에까지 길게 줄을 서서 입장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무엇보다 그는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 우리 고유의 색을 한껏 드러낸 성리학이 꽃피우며, 문화의 절정기를 이룬 영·정조시대 문화예술의 가치를 독자적 시각에서 재조명해냈다.

“이 시기의 문화적 산물이 김정희의 추사체와 정선의 진경 산수화지. 간송의 주요 소장품도 바로 겸재, 추사, 단원 같은 이 시기 작가들의 것이야. 간송학파는 이 시기를 ‘진경시대’로 정의하고, 우리문화의 자존을 찾을 수 있는 학문적 이상향으로 여기며 이 시대 작품을 연구해왔어.”

그는 “진경시대를 식민지사관으로는 ‘당쟁의 절정기’라 하지만 이는 완전히 잘못된 시각”이라고 비난한다.

“양당 이상이 존재해야 균형 잡히고 건강한 정치가 된다는 건 당연한 이치 아닌가? 나라가 망하는 건 독재정치 때문이지. 왜곡된 시각으로 우리문화의 절정기가 당쟁의 절정기로 해석되는 걸 바로잡았어. 그걸 현물로 입증해 주는 것이 진경시대 예술의 진수인 겸재의 진경 산수화와 풍속화 같은 걸작품들이지.”

겸재의 진경 산수화는 중국의 다양한 화법을 섭렵해 우리만의 독자적인 화법을 창출했고, 조선의 산수에 관한 독특한 시각을 그림으로 표현해냈다. 그의 작품은 중국이나 일본 화가들이 흉내낼 수 없는 독창적이면서 훌륭한 예술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 받는다.

그는 <겸재정선>, <추사실기>, <한국불상의 원류를 찾아서> 등 수많은 저서와 강연과 신문 기고 등을 통해 대중이 우리문화를 바로 보고, 자존심을 일깨울 수 있도록 하는데 앞장서 왔다. 요즘엔 어린이들에게 읽힐 겸재 서적을 집필 중이다. 71년부터 일년에 두 차례씩 전시회를 열게 된 것도 그의 공적이다.

그런데 그렇게 훌륭한 우리미술을 왜 좀더 자주 볼 수 있게 해주지 않느냐는 질문에, 최 실장은 단호히 답한다.

“박물관의 첫번째 기능은 수집과 보존이요. 두 번째가 연구. 그리고 맨 마지막이 전시라는 걸 대부분의 사람들은 몰라. 간송미술관 설립목적 자체가 한국 미술사의 연구를 위해 세워졌지, 상설 전시를 위한 것이 아니었거든.”

■ 한복 입고 조선시대 생활 그대로

한복을 입고, 컴퓨터도 핸드폰도 사용하지 않는 그는 “나는 조선시대 생활 그대로 산다”고 말한다. 늘 입고 다니는 하얀 도포는 어머니가 지어주신 것이다.

그는 이제껏 한번도 국토 밖을 벗어나 본적이 없다. 우리 땅에 볼게 너무 많은데, 아직도 다 보지 못했다는 게 그의 아쉬움 섞인 말이다. 그는 또, 외국에 나가 한국미술사를 배우는 이들이 많다며, 이를 비판했다. 우리 것을 왜 남의 시각에서 배워야 하느냐는 것이다.

“우리전통이 뭔지 모르면 안돼. 누군가는 전통을 지키는 사람이 있어야 해.”

온 국민이 영어교육에 모든 것을 걸고, 해외유학생이 넘쳐 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세계화의 흐름에서 낙오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다.

“그런 세계화는 자기상실이야. 우리문화를 상실케 하는 교육과 문화정책은 문화적 식민상태를 만들 수 있단 말이야.”

하지만 간송미술관으로 몰려든 관람인파는 우리 전통 문화에 대한 관심과 자부심이 되살아 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 아닐까.

“우리민족은 굉장히 독립심이 강해. 우리 전시에 관객들이 구름처럼 몰려드는 이유는 우리문화의 자존심을 찾고 싶기 때문이라고 봐. 고려 공민왕 때 몽고의 지배를 받았을 때도 꼭 지금 같았지. 80년 동안 몽고 옷을 입고, 몽고식 이름으로 개명하고, 몽고인과 혼인하도록 강요 받다가 몽고가 망하자 공민왕부터 당장 고려식 머리로 바꿨고, 전 백성이 이를 따랐지. 나는 요즘 같은 세태에도 우리 전통문화가 단절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어.”


전세화 기자 cand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