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리' '태극기 휘날리며'등 흥행 영화 음향감독 도맡아

#. 한 남자가 밀실에서 메스를 들고 있다. 드디어 준비한 닭의 배를 가른다. 닭의 내장에 케첩을 가득 채운 그는 닭의 내장을 문지르기 시작한다. 기괴한 소리가 방안을 가득 메운다.

애니메이션 영화 <원더풀데이즈>에서 죽은 사람의 배를 가르는 소리를 만들기 위해 음향팀이 한 일이다. 김석원(49) <블루캡 사운드웍스> 대표이사는 바로 그런 일을 한다.

<쉬리>, <태극기 휘날리며>, , <올드 보이>, <그놈 목소리>, <밀양> 등등. 그가 음향감독으로 참여해 흥행한 영화를 꼽기보다, 음향감독으로 참여하지 않았는데 성공한 영화를 꼽기가 수월할 정도다. 그는 영화음향 분야에서는 한마디로 ‘선수’로 통한다.

“퇴근 시간이 따로 없다.” 27일 오전 10시 경기 남양주시 서울종합촬영소 영상관에서 만난 김 감독의 대답이다. 오는 10월 개봉 예정인 영화 <고고70>의 음향 작업에 여념이 없다는 그의 낯빛은 밤샘의 피로함을 보여주듯 새까맣고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하지만 김 감독의 눈빛에는 윤이 났고 이를 보이며 자주 크게 웃었다.

■ '선수'는 '선수'를 알아본다


‘선수’가 웃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렇게 힘든데도 일하는 이유가 뭐냐고 묻자 김 감독은 “배운 게 이것뿐이라”면서도 “가장 좋아하고 잘하는 일이라 행복한 것 같다”며 ‘씨익’ 웃어 보인다. 남들이 보기에는 피곤해 보일 법도 하지만 좋아서 하는 일이라 피로감이 생각만큼 크지 않다는 것이다.

‘선수’는 ‘선수’를 알아본다. 김 감독은 작년 말부터 올해 3월까지 펑샤오강 감독으로부터 영화 <집결호>의 음향 의뢰를 받아 밤샘작업을 했었다. 평샤오강 감독은 장이머우, 천카이거와 함께 관객 동원능력이 5,000만 명이 넘어 중국의 3대 영화감독으로 꼽힌다. 평샤오강 감독은 전쟁장면이 많았던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음향에 매료돼 김 감독을 찾았다는 후문이다.

■ "볼륨을 낮춰라"


음향에 대한 김감독의 이해와 자부심 역시 ‘선수’답다. 영화에서 음향이 왜 중요한가라고 묻자 김 감독은 “소리를 끄고 영화를 본다고 생각해보라”고 답한다. 대중은 실제로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게 그의 관찰 결과다. 영화 <쉬리>에 대한 평가는 실제로 영화관마다 달랐다. 영상은 같지만 극장마다 다른 음향 시스템에 따라 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만족도는 판이하게 달랐다.

그는 특유의 ‘자동차론’으로 영화 음향을 설명한다. 그는 영화에서 음향작업은 “자동차 제작 단계로 치면 외관과 도장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김 감독은 “요즘은 엔진만큼 디자인이 중요한 시대”라며 영화에서 본질적으로 중요한 기능을 하는 음향에 대한 요구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올라갈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 현실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중요도에 대한 이해가 깊은 만큼 그는 열심히 뛰어왔다. <태극기 휘날리며>의 음향을 제작할 때는 “우리만의 소리로 영화를 채워보겠다”는 생각으로 총기를 수입하려 했지만 정부의 제지로 앞길이 막혔었다. 결국 김 감독은 어렵게 구한 수입총기로 서울종합촬영소의 야산에서 실탄을 발사해가며 녹음을 마쳤다. 포탄이 떨어지고 탱크가 굴러다니는 군부대 훈련장을 헤매기 일쑤였다.

그는 “증기기관차와 비행기 소리도 제 힘으로 만들려고 노력하려다 돈이 너무 많이 들어 결국 중국에 가서 녹음을 했고 돈과 시간이 배로 들었다”며 고생담을 털어놓는다.

■ 김도향이 없었으면 나도 없었다.


한국 영화 음향계의 ‘장인’으로 평가 받는 그를 처음 직업적인 음악인의 세계로 끌어들인 사람은 CM송의 대부로 불리는 가수 김도향 씨다. 김석원 감독은 어린 시절부터 음악을 좋아했지만, 공대에 진학한 후엔 동아리에서 취미로만 음악을 즐겼다. 서울오디오를 차려 우리나라 CM송 제작을 도맡아하던 김도향은 81년께 그를 눈여겨 보고 픽업했다. “어디로 가나, 그대~”라는 초콜릿의 CM송을 부르기도 했던 그는 결국 졸업 후 서울오디오에 부장으로 취업했다.

1991년 서울오디오를 그만두고 그는 사촌 형으로부터 사업자금을 끌어모아 압구정동에 <리드 사운드>라는 녹음실을 차렸다. 1995년에는 <블루캡 사운드 웍스>를 차려 오늘에 이르렀다. 그간 음향을 맡은 영화는 100여편에 이른다.

■▦ 목마른 '선수'의 호소


‘선수’에 필요한건 뭐? 그가 필요로 하는건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지원이다. 영화진흥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정부의 영화지원 정책이 지나친‘형평성’ 추구로 오히려 의욕을 꺾어왔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는 “천문학적으로 높아지는 영화제작비에 비해 음향 제작비는 오히려 줄어드는 추세”라며 “수억원 씩을 들여 지방의 학교에 음향시설을 갖추고 관리는 엉망으로 하기 보다는 영화산업을 발전시킬 저력 있는 녹음실을 집중 지원하는 게 오히려 합리적”이라고 설명한다.

‘전문가’에 인색한 사회 분위기 역시 그를 힘 빠지게 한다. 김 감독은 “영화진흥위원회를 비롯한 문화 분야 공무원들이 어떻게 돈을 쓰는 게 합리적인지 전문가들에게 문의해봤다는 소리를 한번도 들은 일이 없다”고 말한다. 배분된 예산을 집행하면 그만인 ‘공무원 마인드’의 한계가 영화산업을 ‘한류’의 원동력으로 발전시키는 데 한계가 있었다는 설명이다.

씁쓸하게 웃는 김 감독은 한국에도 폴리(FOLLY)와 같은 영화 음향인이 나올 수 있을지 걱정한다. 폴리(FOLLY)는 컵 놓는 소리 같은 영화음향 녹음기술의 대명사가 됐다. 김 감독은 “손기술에 능하고 창의력 있는 한국인들은 영화음향 전문가로 성장하기에 유리한 조건을 타고났다”고 말한다.


김청환기자 ch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