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조 무자년 연경당 진작례' 철저한 고증서 공연까지 6년 대장정

“저하, 궤 하시옵소서(‘무릎을 꿇으라’라는 말).”

세자가 대청 위로 인도되어 왕비 앞에 이르면 이처럼 중사(中使, 궁에서 심부름하는 내시)가 다음 순서를 알려준다. 이윽고 세자가 무릎을 꿇고 술잔을 올리면 중궁전(왕비가 거하는 곳) 상궁이 받아서 술잔을 왕비 앞의 원반에 올려놓는다.

사극의 한 장면이 아니다. 지난 6일 창덕궁 연경당 본채에서 진행된 ‘순조 무자년(1828년) 연경당(演慶堂) 진작례(進爵禮) 복원 공연’의 한 장면이다. 연경당은 순조 때인 1827년 효명세자가 창덕궁 후원에 창건한 건물로, 경축(慶祝) 행사를 연행(演行)한다는 의미에서 ‘연경(演慶)’이라고 이름붙여졌다.

특히 효명세자가 어머니인 순원왕후의 생일 축하 진작(進爵·경축 행사 때 왕과 왕비에게 술잔을 올리는 의식) 행사와 각종 정재(呈才·궁중 행사용 춤과 노래) 공연을 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번에 복원한 공연 역시 이 의식을 180년 만에 재현한 데서 의미를 두고 있다.

■ 2세기 만에 되살아난 연경당

이 공연을 주최한 곳은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부설 세계민족무용연구소와 서울국제문화교류회. 허영일 세계민족무용연구소 소장은 조선 후기의 궁중 음악과 춤, 복식과 요리 등 각 분야의 전문가들과 학생들을 이끌고 이 공연을 기획 총괄했다.

허 소장은 2003년 학술진흥재단에서 공모한 기초학문육성 과제로 「한국 근·현대사의 전통 무용의 굴절과 계승 방향」을 연구하다 순조 때의 효명세자 대리청정기와 한국무용사의 연관성에 주목하게 됐다.

“연경당 진작례를 거행한 순조 효명세자 대리청정기는 한국무용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전통무용 분야의 황금기로, 외래 당악정재 주도의 환경을 극복하고 창작정재를 활성화하여 역사적 전환 동기를 제공한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찾을 수 있습니다.”

학술진흥재단의 연구는 이론가라면 누구나 알 만한 부분이지만 그 연구로부터 이처럼 규모가 있는 공연을 시도하기란 쉽지 않다. 더욱이 허 소장은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이론과의 교수이기도 하다. 실제로 이번 공연에 이론과 학생들이 대거 참여하기도 했다.

“학술진흥재단 측과 얘기를 하다가 연구 결과들이 일반에 효과적으로 알려지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마침 저도 이론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평소 이론과 실기가 병행하는 교육을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학자가 학문으로만 머물러서는 안 되는 시대거든요. 지식을 대중과 공유하고 그들이 이해할 수 있게 업적을 만들어가는 것이 학자의 도리가 아닐까요. 그래서 연구 결과를 기반으로 연경당 진작례 공연이 시작된 것입니다.”

우연히도 올해는 진작례가 연행됐던 순조 무자년(1828년)과 같은 무자년이다. 오랫동안 외부의 출입을 불허했던 연경당은 허 소장의 노력으로 이제 공연과 관람이 이어지는 곳이 됐다. 모든 공연을 마친 허 소장은 연구를 통해서만 접하던 연경당에 처음 발을 들여놓던 그 순간을 회고하자 감회에 젖었다.

“처음 연경당의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그곳은 마치 아픈 과거를 안고 말 한 마디 하지 못한 사람처럼 그대로 말라버린 유물로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역사 속의 건축물 연경당에 21세기의 사람의 숨결을 불어넣고 활기를 찾게 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6년간의 노력이 일궈낸 성공

허영일 교수(위)
진작례에서 왕후의 생신을 경하하는 무동들(아래)

단편적이고 일회적인 그동안의 다른 복원 공연과 차별점을 두기 위해 허 소장은 음악, 춤, 의상, 의례절차, 음식 등 전 분야를 망라하는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치밀하고 정확한 고증에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당시의 진작례가 아침 7시부터 저녁 7시까지 치러졌고 오늘날 복원 시 총 17종에 이르는 궁중정재를 하루에 다 재현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해 3차년도 계획으로 구상한 것은 그의 공연에 대한 열의와 치밀함이 엿보이는 부분이다.

“첫 번째 해인 2006년에는 주로 궁중 복식과 음식의 고증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두 번째인 지난해에는 궁중정재 복원을 위해 연희의 분위기와 정조의 변화를 최대한 반영하는 등 궁중 춤에 집중했습니다. 세 번째인 올해는 음악에 비중을 두면서도 지난 2년을 집대성할 수 있도록 전통 진작례의 원형 복원에 주안점을 두었습니다.”

허 소장은 이러한 장기적 계획을 통해 2006년 망선문(望仙門) 등 5종, 2007년 경풍도(慶豐圖) 등 6종을 복원한 데 이어, 올해에는 만수무(萬壽舞)와 연화무(蓮花舞), 춘광호(春光好), 무산향(舞山香), 최화무(催花舞), 춘대옥촉(春臺玉燭) 등 6종을 재현함으로써 전체 17종의 궁중정재 연목을 완성시켰다.

물론 총 3회의 공연을 성공적으로 치르게 된 것은 허 소장 혼자만의 공은 아니다. 궁중 복식을 재현하는 데 많은 힘을 빌려준 한복디자이너 그레타 리는 드라마 <주몽>의 의상디자이너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공연을 위해 새로 디자인한 것 외에도 자신이 제작한 의상을 대여해주기도 해 세계민족무용연구소 측의 제작비 절감에 일조했다. 궁중음식의 재현은 한복려 궁중음식연구원 원장이 맡아 관객의 시각과 미각을 함께 자극시켰다. 허 소장은 “무엇보다 의례에서 너무 고생해준 한국예술종합학교의 학생들과 중앙대, 동덕여대, 서울종합예술학교 학생들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습니다”라며 공연의 공을 돌렸다.

■ 작지만 의미있는 한 걸음

이번 공연의 특이점은 순조 무자년 진작례 당시의 분위기를 그대로 살리려는 데 있었다. 허 소장은 궁중 의식이라는 점 외에도 ‘잔치문화’라는 점에 주목하고 이 점을 부각시키려 애썼다.

“세계 어떤 나라의 기록을 둘러봐도 우리나라처럼 잔치문화에 대해서 진찬, 진연, 진작의궤처럼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 것이 없습니다. 특히 의상부터 음식, 음악과 춤까지 다양하게 기록된 것은 더더욱 없습니다. 각각의 의궤에서 음악이나 춤 같은 것도 잔치문화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는 부분도 문화사적으로 연구해볼 가치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이론 연구에서 공연에 옮기기까지 6년간의 대장정을 마친 허 소장에게 다음 계획을 물어봤다. 특히 이번 공연을 끝으로 연경당 진작례 공연을 다시 볼 수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있었다. 허 소장은 이 공연을 하나의 문화상품으로서 발전시켜 한국을 상징하는 관광상품으로 변모시킬 가능성이 많다고 답한다.

“가령 외국인들이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접하게 되는 관광가이드 리스트에 문화상품으로 등장한다면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고 봅니다. 날씨가 좋은 봄과 가을에 연행해서 창덕궁에서 옛날 잔치를 볼 수 있다고 홍보하는 겁니다. 관광객들에게는 우리 떡을 나눠줘서 한국적 분위기를 몸소 느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어느덧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지만 수 년간의 프로젝트를 이제 막 끝내고 또 다음 계획을 생각하고 있는 그는 청년처럼 쉴 새 없이 아이디어를 내놓는다.

“예전에는 ‘무언실천(無言實踐)’의 시대여서 말없이 행동으로 옮기는 것만 높게 평가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유언불실천’의 시대에요. 실천은 굳이 못하더라도 말을 계속 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어떤 일을 벌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는 거죠. 저의 역할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후배들이 더 창의적인 연구와 공연을 계속할 수 있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계속 말해주는 거죠.”

허 소장은 연구소의 일을 마무리지으면 그가 몸담고 있는 또 하나의 단체, 서울국제문화교류회에서 서울국제무용콩쿠르를 준비할 생각이다. 서울국제무용콩쿠르는 한국에서도 세계적인 무용콩쿠르의 필요성을 느끼고 6년 전 허 소장이 개최를 시작한 행사다. 허 소장은 여기서 총괄책임자인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어 그의 발길은 당분간은 계속해서 분주할 듯하다.

요즈음 창덕궁에는 깊어가는 가을 저녁의 음악회가 시민들을 즐겁게 하고 있다. 어쩌면 춤 예술이 대중에게 더 가까이 가는 계기를 제공했다는 듯, 허 소장의 얼굴은 피곤하지만 밝아보인다.

◇ 허영일 교수 프로필

이화여대 및 동대학원 무용과 졸업, 하와이 대학교 대학원 수학(Unclassfied Graduate), 오차노미즈여대 인문과학과 박사전기과정

현재 세계민족무용연구소 소장, 서울국제무용콩쿠르 집행위원장, 한일 문화정책자문위원, 국립국악원 자문위원, UNESCO 국제무용협회 한국본부 공동회장, SIDance 서울 세계무용축제 조직위원장, 한국예술평론가 협회 회원, ITI(국제 극예술 협회) 회원, 한국 무용과학학회 부회장, 2001 국제교류기금 와세다대학 초빙교수, UCLA 한국학 연구소 초빙교수 등을 역임했다.



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