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9편 묶어 '지금 행복해' 출간… 특유의 입담과 유머 돋보여

여기, 재미있는 남자가 있다. 그의 서사를 거치고 나면 70,80년대 지식인의 의기도, 바보 농부의 애절한 생애도 그저 ‘할머니 옛날이야기’가 되고 만다. 시로 등단했지만 시보다 소설로 이름을 알린 이 사람은 성석제 작가다. 그가 펼치는 구수한 입담에는 인생의 희노애락이 담겨 있다.

86년 문학사상에 시 ‘유리 닦는 사람’으로 등단한 그는 시 이외의 틈틈이 쓴 글을 모아 94년 ‘그곳에는 어처구니가 산다’를 발표했고 독자들의 “열화와 같은 호응 속에” 단편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를 쓰며 소설가로 방향을 바꾸었다. 상복도 많아 한국일보 문학상, 이효석문학상과 동인문학상,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

지난 주 경희궁에서 만난 그는 재간둥이 방송인 김재동을 연상케 했다. 서울북페스티벌 기간 ‘작가와의 대화’에 참석한 그는 캐주얼 재킷을 입고 중학생이 들고 다닐 것 같은 책가방을 껴 앉은 채 ‘대화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함께 이 행사에 참가한 소설가 김훈은 성 작가의 모습을 보고 “그 가방 좀 갖고 다니지 말라”고 했고, 성 작가는 “선배님 모자랑 비슷한 것”이라고 맞받았다(김훈의 모자는 자전거와 함께 그의 트레이드마크이다). 무대에 서기 전, 정확하게 무대에 서서 입을 열기 전까지 진가를 알아보기가 참으로 어렵다는 점에서 그는 김재동과 비슷했다.

저자와의 대화 무대에 선 그는 소설 속 입담을 과시했다.

“소설 말고 에세이도 많이 쓰는데 둘은 어떻게 다르냐?”는 사회자의 질문에 “소설은 논농사, 에세이는 깨농사”라고 비유했다. 음식 에세이를 많이 쓰는 그에게 다시 사회자는 “맛있는 음식점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고 “텔레비전이 있거나, 테이블 마다 벨이 있는 식당은 가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음식점 주인의 관상을 보는 데, 식당 들어간 후에 관상보고 나올 수는 없으니 이 방법은 그다지 쓸모 있는 조언이 아닌 것 같다”고 말해 좌중을 웃겼다. 그리고 지난 주 태어나서 생전 처음으로 사주를 보았노라며 자신의 사주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식당주인 관상은 볼 줄 아는 데 자기 사주를 48년 동안 모르고 살았다니 참, 아이러니다.

놀이판이 펼쳐지는 곳에서 성석제는 최고의 입담을 자랑한다.

■ 다시 희극으로 유턴

멋쩍게 놀이판을 접고 나면 작가 본연의 모습으로 변신이다. 저자와의 대화와 사인회가 끝난 후 그는 중학생 가방을 들고 잔디밭에 천막을 쳐 만들어 둔 ‘출연자 대기소’로 들어왔다.

“가을에 행사가 많네요. 9,10월 계속 바쁘셨죠?”

“오늘이 마지막이에요. 이제 글 써야지요. 너무 외부활동을 많이 해서.”

그는 신간 <지금 행복해> 출간과 9~10월 독서관련 행사가 맞물려 한동안 외부활동을 해오던 터였다. 작가의 외부활동은 인터뷰를 기다리는 동안 구경했고, 이제 신간을 이야기할 차례다.

2003년부터 올해까지 발표한 단편 9편을 묶어 발표한 <지금 행복해>는 성석제 특유의 입담과 재치 넘치는 유머감각이 돋보인다. 표제작 ‘지금 행복해’는 당구와 노름, 마약, 술 등 온갖 중독의 집합체 같은 아버지와 이런 아버지를 친구처럼 바라보는 아들의 이야기다. 중독 생활로 가정을 방치하고 수감생활까지 한 뒤 아들에게 나타난 아버지는 무기력한 한량의 전형이다. 동시에 그는 아들에게 ‘친구로 지내자’고 말하는 독특한 아버지다.

아들은 아버지를 덤덤하게 친구처럼 대한다. 다른 남자와 열애중인 어머니를 위해 이혼서류에 ‘쿨 하게’ 도장 찍어 주라고 말하면서.

“예전부터 써보고 싶었던 이야기에요. (작품 속) 아버지는 유전적 요인에 의해서 남보다 중독될 여지가 많은 사람이죠. 갖가지 중독을 경험하고 아버지란 존재가 가족 해체까지 이르게 했지만, 과연 아버지를 비난할 수 있는가. 논리적으로 말하는 게 아니라 밑바닥에 있는 인간 본연의 친애, 사람이 사람에 대한 감정이나 사랑이 느리고 약하지만 천천히 차올라서 우리가 거의 정상적인 관계로 복원 시켜주는 그런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어요.”

실제로 극중 아버지와 성 작가는 닮은 듯 보였다. ‘마약, 술, 노름 중독’을 ‘바둑, 여행 몰입’으로 바꾼다면 말이다. “친구 같은 아버지일 것 같다”는 기자의 말에 그는 “난 그냥 평범한 아버지”라고 대답했다. 소설 속 부자 관계의 설정은 아버지가 했지만, 이 시대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자식이 방향키를 갖고 있는 것 같다는 대답도 덧붙였다.

이번 작품집에서 눈에 띄는 것은 유난히 여행을 소재로 한 작품이 많다는 점이다. 언론에서 “여행 3부작”으로 꼽은 ‘여행’‘설악 풍경’‘피서지에서 생긴 일’을 비롯해 낚시를 소재로 한 ‘낚다 섞다 낚이다 엮이다’와 산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기적처럼 살아 돌아온 이야기를 다룬 ‘기적처럼’을 포함하면 절반 이상이 여행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그는 일상과 여행의 관계는 현실과 문학의 관계와 비슷한 것 같다고 말했다. 여행이 딱딱한 일상에서 떠나 재충전하는 것이라면 문학은 현실의 이면을 볼 수 있도록 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위안을 준다는 말도 덧붙였다.

“2005년 ‘어머님이 들려주신 노래’ 출간하면서 ‘소설에 물기가 많아졌다’고 했죠. 이전 작품이 유희성이 강했다면 그때부터 무겁고 슬프고 비극적인 상황 비중이 커졌죠. 재작년 ‘참말로 좋은 날’에서는 비극을 썼고. 이번 작품집은 다시 희극이에요. 유턴한 거죠. 앞으로 장편을 쓸 건데 그건 희비극이 교차하겠지요.”

■ 2002년 서울 사투리 넣어볼까

성석제의 입담을 빛나게 하는 것 중 하나가 사투리다. 고향인 경북 상주 사투리는 물론이고 충청도와 전라도, 강원도 사투리도 자유자재로 구술한다. 물론 작품 속에서 말이다. “사투리가 구수하다”는 말에 “경상도 사투리도 다 같은 사투리가 아니다. 경남, 경북의 스펙트럼이 있다”고 대답한다.

“대학가서 여러 지방에서 온 친구들을 만났고, 또 여행을 많이 다니면서 지방에서 있기도 하고 하면서 제가 남보다 금방 사투리를 배우는 걸 알았어요. 전라도 가서 며칠 있으면 전라도 말 하고. 경상도 말도 스펙트럼이 많아요. 사투리 중에서도 경북 북부 사투리는 잘 없어요. 이병주 선생의 <지리산>은 경남 진구 하동 쪽, 박경리 선생 <토지>에서도 경남 서부지역 사투리를 많이 썼지만, 경상도 북부 사투리는 잘 없어요. 넣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진 건 아니고, 쓰다보면 재미있어요. 그런 걸 한번 넣었었지요. 요즘은 그것도 하나의 기성 제품이 되다 보니까, 다른 부분에서 재미를 주려고 해요.”

얼리어탑터답게 디지털카메라가 선보일 때쯤 카메라를 사기 시작했다는 그는 문자도 곧잘 보내며 이야기 했다. 요즘말로 ‘신상’을 좋아하는 성 작가답게 언어를 쓰는 방식도 새로운 시도를 한다. 그는 “2020년 서울 사투리를 넣어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시대 변화와 함께 언제나 새로운 모습을 선보였던 그는 좋아하는 작품으로 연암 박지원의 소설과 홍명희의 <임꺽정>,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와 같은 고전을 꼽았다. 이들 작품은 재미난 문장에 시대상을 담아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 작품을 두고 성 작가는 “소설 문장이 참 좋다”고 말했다. 이어 “임꺽정을 보면 이 분이 ‘글을 갖고 노는 구나’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이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는 소설을 통해서 그 시대의 상을 아주 리얼하게 그려냈기 때문이지요. 남들이 말하는 것처럼 해학과 풍자로 세상을 비꼬았다고 좋아하는 건 아니에요. 저도 마찬가지로 글 읽는 사람을 각성하게 만들거나 깨달음을 줄 생각은 없어요. 소설은 그냥 만들어 지는 거고 독자가 읽고 공감하느냐가 중요하겠지요.”

이런 생각은 작품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그의 글을 읽으며 실컷 웃고 나면 공허한 기분이 든다. ‘슬프다’고 간단히 규정할 수 없는 비극미가 남는다. 인터넷 서평에서 한 독자는 “그의 책을 읽으면 마치 입담 좋은 동네 아주머니랑 수다를 떠는 기분이다. 하지만 마지막엔 눈물 한 방울의 페이소스도 잊지 않는 작가다”고 표현했다.

“전 문학을 통해서 전형을 보여주기 보다는 패턴을 제시하고 싶어요. ‘나는 좌파다, 우파다’ 말하기보다 ‘이런 경우도 있다’는 상황을 제시하고 “이 사람은 이렇게 했다. 언제나 옳은 건 아니지만,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물음을 던지고 싶어요. 독자가 작품 속 인물을 보고 참고할 만한 전형을 발견하게 된다면 제 몫을 한 것이겠지요. 전 그게 문학이라고 생각합니다.”

■ 성석제 프로필

1960년 7월 5일 경상북도 상주 출생

1986년 문학사상에 시 ‘유리닦는 사람으로 등단

1994년 소설집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로 소설가로 전환

1997년〈유랑〉으로 제30회 한국일보문학상, 2000년 <홀림>으로 제13회 동서문학상,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로 제2회 이효석문학상과 제33회 동인문학상, 2005년 제13회 오영수문학상 수상

◇ 주요 작품

장편소설 <왕을 찾아서><궁전의 새><순정>

중편소설 <호랑이를 봤다>

소설집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새가 되었네><재미나는 인생><아빠 아빠 오, 불쌍한 우리 아빠><홀림><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번쩍하는 황홀한 순간><어머님이 들려주신 노래><참말로 좋은 날> 등 다수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