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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합리성을 뛰어넘는 '센티멘털 가치'
짠돌이 미국인도 '사연있는' 물건엔 아낌없이 돈을 쓴다






나종미 자유기고가 najongmi@netzero.net





차고 세일에서 나온 드레스 드라마 '초원의 집'의 등장 인물이 입은 것과 유사하다.


초등학교 이 학년 때인가 처음 받아 본 우등상.

나 혼자 받은 것도 아니고 반에서 무려 다섯 여섯 명인가가 받은, 그것도 한 달에 한 번씩 자주 주는 바람에 요즘 아이들 숙제에 선생님이 부쳐주는 “참 잘했어요” 스티커보다 약간의 가치가 더 있었을 그런 종류의 상이었건만 당시 어린 마음에 얼마나 기뻤던지.

때마침 내린 장맛비에 젖어 내 이름 석 자 적은 검정 잉크가 흘러내리는 것도 모르고 그 종이 상장을 놓칠세라 손에 꼭 쥐고 콩닥거리는 가슴으로 집으로 달려가던 어릴 적 내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 검소와 인색의 차이점은?



첫 눈, 첫 사랑, 첫 아이, 처음 장만한 집, 모든 ‘첫’ 자 들어간 것은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

유학 생활 9년 만에 홀랑 까먹어 버린 한글 자판을 기억하느라 한 페이지 반 겨우 되는 글을 쓰는데 무려 열 시간이 넘게 고생한 “나종미의 미국 문화읽기”의 첫 글도,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어느 독자님이 남긴 첫 댓글도 나에겐 아주 소중한 기억이다.

그때 미국 사람들 참 검소하더란 나의 글에 그 독자분이 말하시길, 검소한 것 맞긴 맞는데 큰돈 들여 여행도 가고 비싼 레스토랑도 가더라라는 요지의 글을 남기셨는데. 맞습니다! 한데 ‘검소’한 것과 ‘인색’한 것은 다르지요.

평소에 소금기 풀풀 날리며 ‘짜게’ 사는 미국 사람들도 자신이 의미 있고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일에 큰 돈을 물 쓰듯 ‘펑펑’ 쓰는 일을 적지 않게 볼 수 있으니 말이다. 결혼 삼십 주년 기념일에 크루즈 관광 가기, 또는 자선단체에 기부하기 등등이 그 예가 되겠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한번 손에 들어온 물건을 마르고 닳도록 쓰고 심지어는 대까지 물려 가는 미국인의 검소함, 절약이라는 경제언어만으로는 도저히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이 있기는 하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센티멘털 가치” (sentimental value) 라는 나로서도 비교적 최근에 알게 된 말과 관련이 있다. 이곳 켈리포니아의 단골 시계 수리 점에 배터리를 갈러 갔다가 그날 따라 좀 바빴던 가게에서 나의 차례를 기다리면서 목격한 일이다. 한 중년의 미국여인이 들고 온 여행용 알람시계 (travel clock).

군데군데 손때 묻은 자국이 선명한 언뜻 보기에도 금전적인 가치가 거의 없어 보이는 그 구형시계를 우리 돈으로 환산하여 무려 육만 오천 원이란 적지 않은 비용을 들여 수선을 의뢰하는 것이었다.

그 돈이면 저런 고물이 아닌 신형 여행용 알람시계를 적어도 두 개는 더 사겠다 싶어서 물어보았더니 지금은 고인이 된 아버지가 다른 주로 출장 갈 때마다 갖고 다녔던 ‘사연 있는’ 시계란다.

백발이 하얗게 내려 않은 자기 엄마랑 같이 온 또 다른 중년의 미국여인은 그 엄마가 젊은 적에 차다가 대물려 주었다는 무려 오십년 이상 묵은, 크리스털 뚜껑도 없이 망가진 미키 마우스 손목시계를 우리 돈 십만 원이 넘는 큰돈을 선뜻 지불하며 수선을 의뢰하는 것이었다.

그만한 돈이면 잘 나가는 메이커 신형 손목시계 하나쯤은 사겠다 싶어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았지만 주인아저씨 장사에 고춧가루를 뿌릴 수 없어 차마 아무 소리 못했다.

손님들이 다 가기를 기다렸다가 저런 손님들이 많으냐고 슬쩍 물어보았더니 놀랍게도 자기 집 고가 수리 시계의 삼분의 일 정도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지녔던 물건들을 몸에 지니고 다니며 생각하고 싶어 하는 동기, 즉 센티멘털 가치, 때문이란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이 센티멘털 가치라는 것, 늘 수지 타산 안 맞는 장사만은 아니다.

새벽 두세 시경 잠이 안 와 이리저리 TV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발견한 미국 판 “진기명기” 프로. 운이 억세게 좋은 어떤 미국 아줌마가 차고 세일에서 헐값에 건졌다는, 영국의 어느 유명한 장인이 만들은 것으로 판명된 보기에도 우아한 고가구.

미국의 한 시대 한 화풍을 대표하는 어떤 화가가 당시 이웃집 소녀였던 이 프로에 나온 할머니를 모델로 그렸다는 석탄 스케치화. 흥미 진진 사연도 가지가지.

■ 수십만 원 호가하는 털 빠진 곰 인형





여기까지는 한국의 “진기명기” 프로와 거의 비슷한 컨셉으로 나간 것 같은데, 어떤 미국 아저씨가 들고 나온 곰 인형, 자기 아버지가 어릴 적 갖고 놀던 것을 대물림해서 자신이 어릴 적 갖고 놀던 것을 보관해오다 가지고 나왔다는데, 그 인형을 가지고 나온 아저씨의 앞이마만큼이나 ‘휑하니’ 털이 빠져나간 나달나달한 곰 인형의 몸통 한 부분이 클로즈업되는 순간 “저 아저씨가 어쩌자고 저런 것을 들고 나왔나” 하는 생각에 오던 잠이 반쯤은 달아났고, 이 어처구니없어 보이던 인형의 몸값이 무려 수십만 원을 호가한다는 감정가의 말에 잠이 아예 ‘확’ 달아나버렸다.

대를 물려가며 얽힌 끈적끈적한 정 때문에 차마 못 버리고 보관해왔을 것이 분명한 그 곰 인형, 그 만한 애정이면 큰돈 준다고 팔 사람들도 아니겠지만, 그 인형을 버리지 못할 결정적인 또 다른 이유 하나가 생긴 것은 분명한 일이다. 한데 이런 물건 사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곰 인형의 경우처럼 운 좋게도 ‘돈 되는’ 투자로 끝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을듯하고, 비교적 실용적으로 사고하는 나인지라 처음엔 이들의 계산 안 맞는 행동이 언뜻 이해가 안됐지만 이후 곱씹어 생각해보니 아주 이해 못할 일도 아니었다.

예를 들면 십 년 전 유학 나오면서 소형 아파트 하나를 채울 분량의 고가의 가구와 가전제품들을 ‘입양’ 시키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주위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적이 있다.

헐값에라도 처분하면 미국행 왕복비행기표 한 장 살 돈 정도를 거뜬히 건질 수 도 있었다. 내 손때 묻고 또 이런 저런 사연이 얽힌 물건들을 생판 안면 없는 남에게 준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생각하기 힘든 일이었다.

대다수의 보통 미국 사람들 정든 물건 버리는 일을 나보다 훨씬 못한다. 얼마 전 은퇴한 노인들이 모여 사는 근처 노인아파트에서 주최하는 대규모 차고 세일에 갔을 때이다.

골동품 (Antique) 또는 수집용 물건 (Collectable, 콜렉터블이 꼭 앤틱일 필요는 없다) 이라는 푯말아래 품목별로 정리되어 진열된 ‘나이 먹은’ 물건들. 우선은 그 규모와 다양함에 있어 나의 입을 벌어지게 했는데, 액세서리, 인형, 생활용품, 트로피, 훈장, 옛날 엽서, 우표 책, 생활 잡지 등등 거의 없는 것 빼곤 다 있었다.

■ 정에 연연하는 연약한 미국인 발견





이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품목은 옛날 <초원의 집>이란 미국 드라마의 등장 인물들이 입고 지녔을 듯해 보이는 드레스와 모자 장갑 등 이었다.

한국엔 빈티지 제품이 유행이라 하지만 구경하라고 내놓은 건지 아니면 진짜 팔리리라고 믿고 내놓은 건지 아직도 아리송하다. 가격표 붙여 놓은 것 보면 팔려고 내놓은 것, 맞는 것 같은데...

비록 싼값에 나왔지만, 센티멘털 가치로 따지자면 계산이 안 나올 만큼 가치 있는 물건들. 지금까지 살아온 날이 앞으로 살날 보다 많다는 겸손한 깨달음과 이것들을 팔아 동료 노인들의 복지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자 정든 물건을 ‘희생’하는 귀한 정신이 돋보인다.

이날 아름다운 독일산 은쟁반을 단돈 천원에 건졌다. 하지만 그날 내가 얻은 더 큰 소득은 정에 연연하는 연약한 미국인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다.

인간관계에 있어 “예스” (Yes) “노” (No) 가 분명한, 어찌 보면 좀 차고 냉정한 면이 있는 것 같은 ‘이성적인’ 미국인, 또는 국가 간 이권관계라도 얽혔을 땐 강대국으로서 힘 과시에 주저하지 않는 강한 나라의 ‘강한 국민’ 미국인 이라는 나의 선입견을 조금이나마 누그러뜨리는 계기가 되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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