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연히 드러나는 미국 내 남녀 차별 속 여자의 '성 카드'는 당연

힐러리 클린턴의 민주당 경선 하차는 거의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분위기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대세는 이미 돌이킬 수 없어서 그녀가 사퇴하는 것은 시간문제로 여겨지고 있고, ‘언제’ ‘어떻게’ 가야 모양새 있고, 실속 있게 떠날 수 있겠는가가 언론에서 공공연히 논의되고 있는 중이다. 그간 심정적으로 힐러리 보다는 오바마를 응원해 온 나이지만, 막상 그녀를 보내야 한다니 조금은 섭섭한 느낌이다.

객관적으로 볼 때, 힐러리는 여러모로 괜찮은 후보이다. 그녀의 백악관 시절 ‘베개 밑 송사’식의 정치 참여를 정치 경력으로 쳐줄 수 없다는 사람들도 적잖이 있기에, 과연 그녀가 본인 주장대로 임기 첫날부터 대통령 임무를 감당할 수 있는 경험 있는 후보인가에 대해서는 의견들이 엇갈리지만, 힐러리의 날카로운 ‘지력’을 의심하는 사람들을 아직까지 보지 못했다.

따라서 경선 초반부터 힐러리 지원 유세에 열을 내며 ‘바지바람’ 을 일으켜 심심찮니 비난을 받아 온 남편 빌 클린턴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힐러리의 대통령 당선이 ‘클린턴의 집권 삼기’를 의미한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는 듯하다. 미국 선거는 무엇보다 정책 대결이라고 이전 글에서 언급한 적이 있는데, 정책면에서도 힐러리의 공약이 라이벌 오바마의 것과 그 기본 골격에 있어서 크게 다르지 않다.

■ 힐러리 비호감 현상

능력과 정책이 경쟁력 있고, 텃밭인 민주당의 기반도 튼튼하고, 무엇보다 전직 대통령인 남편의 빵빵한 외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힐러리가 오바마에게 질 수 밖에 없는 가장 큰 요인으로 꼽히는 것은 바로 그녀의 ‘비호감 문제’ 때문이라는 것이 여론의 중론이다.

비교적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미국 사람들이 나라의 장래를 결정하는 중대사에 있어 감정 문제에 휘둘린다는 것이 언뜻 이해가 가지 않을 수도 있지만 받는 것 없이 예쁜 사람이 있고, 주는 것 없이 왠지 싫은 사람이 있는 것은 인종과 국경을 초월한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오바마 열풍에 집단 히스테리적인 면이 없지 않아 있듯이, ‘힐러리 비호감 현상’에도 이성과 논리만으로 설명하기 힘든 면이 있다.

아침 뉴스쇼에서 힐러리를 본떠 만들어진 인형의 다리 사이로 호두를 넣어 까는 ‘힐러리 호두까기’ 기구가 미국의 어느 공항 매점에서 팔리고 있다고 들었다. 웃자고 하는 일인지 아니면 힐러리에 대한 공개적인 모욕인지, 이 기구로 호두 까먹는 사람들의 심리를 알다가도 모르겠다.

게다가 힐러리를 싫어하는 공화당 남자들이 민주당 투표소에 몰려가 오바마에게 투표를 해서 오바마와 공화당의 합성어인 ‘오바미니칸(Obamikans)’이란 신조어까지 생겨났고, ‘힐러리를 혐오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란 안티-힐러리 웹 사이트까지 생겨났다 들었다.

■ 무시할 수 없는 성차별적 요소

도가 지나친 듯한 ‘힐러리 혐오 현상’은 나의 마음을 편치 않게 하는 뭔가가 있다.

특히 그녀의 머리 스타일, 즐겨 입는 바지 정장, 왠지 이상해 보인다는 눈 등 그녀의 외모가 집중적인 공격의 대상이 될 때는, 힐러리가 전통적으로 남자의 직책이었던 대통령에 도전한 최초의 여자이기 때문에 부당한 대접을 받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어 같은 여자로서 맘이 언짢다.

참고로 아직까지 남자 후보의 외모를 가지고 비난 하는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여성 호스트 네 명이 진행하는 ‘더 뷰(The View)’라는 TV 토크 쇼에 게스트로 출연한 오바마 후보가 ‘섹시하다’고 칭찬받는 것을 본적이 있다. 사실 힐러리에 대한 비호감에는 성차별적인 요소가 없지 않아 있다.

유튜브(You Tube)를 통해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힐러리 선거 유세 비디오 한 장면을 보면, 중년 남자 둘이 “내 셔츠나 다려라”라고 쓴 피켓을 들고 외치며 유세 방해를 하다가 안전 요원들에게 강제 퇴장 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여성의 인권 문제에 있어 우리보다 훨씬 선진국인 미국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에 놀랄 한국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리 놀랄 일만은 아니다.

비행기 한번 못타보고 평생을 마치는 미국 사람들도 많다는 사실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지구는 남성을 중심으로 돌아야만 한다”는 시대착오적인 세계관을 가지고도 별 도전을 받지 않고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사는 미국 남자들이(일부 여자들도 포함) 많기 때문이다.

재밌는 사실은 이런 유의 노골적인 성차별은 힐러리를 해치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돕는 일이라는 점이다. 분개한 여성표가 그녀에게 몰려갈 것이 불을 보듯 환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소동이 있었던 뉴 햄프셔(New Hampshire) 경선에서 힐러리가 오바마를 제치고 승리했다.

■ 강한 여자는 무섭다?

‘터커 칼슨(Tucker Carlson)’이란 정치관련 뉴스 전문 언론인이 “힐러리에게는 거세 공포를 느끼게 하는 뭔가가 있어서, 그녀만 보면 다리를 저절로 오므리게 된다”는 발언을 해서 논란이 된 적이 있다.

또 54세 된 어떤 남자는 힐러리가 “잔소리하고 꾸짖는 엄마를 연상시킨다”고 인터넷 사이트에 불평을 털어 놓기도 했다. 이런 유의 비호감 발언들은 힐러리 편의 일차적인 원인 제공이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더 이상 희망 없어 보이는 경선에 대해 도에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집착하는 그녀는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권력의 추구로 보여 ‘거세(Castrating)’ 운운하는 발언의 저변에 깔린 강하고 힘 있는 여자에 대한 남자들의 원초적인 두려움, 또는 거부감을 자극하고 악화 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여자가 권력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됐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전혀 없다. 아무튼 강한 여자에 대한 두려움이 그 ‘근본동기’라는 점에서, 집에서 다림질이나 해야 하는 미천한(?) 여자가 대통령이 웬 말이냐는 식의 힐러리 혐오 보다는 어떤 의미로는 ‘덜’ 여성비하 적이라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두 경우 모두 궁극적으로는 여성을 남성의 통제가 가능한 역할과 공간에 제한시키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성차별’이 맞다.

■ 두 개의 카드 다 쓸 수밖에

그간 미국 남성 정치인과 언론인이 힐러리에 대해 갖는 가장 큰 불만 중의 하나는 그녀가 ‘성’과 관련하여 한입으로 두말을 해왔다는 것이다.

즉, 불리한 상황에 처할 때마다 “내가 여자 후보라서 나를 괴롭힌다!”라며 연약한 피해자의 역할을 자청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가 남자 못지않게 강하고 능력 있는 정치가라는 이미지를 강조한다는 것이다. 힐러리가 ‘성차별 카드’를 사용해왔다는 말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특히 최근 한두 달간 그녀에게 가해진 경선 사퇴 압력이 자신이 여자 후보여서 ‘성차별’ 받는 것이라며 설득력 없는 주장을 들을 때는 말이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인권 선진국이랄 수 있는 미국에서도 비록 눈에 확연히 들어나지 않는 형태 일지라도 성차별은 엄연히 존재 한다. 바로 이것이 남자들의 룰을 가지고 남자들의 게임에 뛰어 든 ‘바지 정장 입은 여자’ 힐러리가 한 입으로 두 말을 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최종 결과가 어떠하든 눈에 보이지 않는 장애를 극복하고 최고 권력의 자리라고 할 수 있는 미국 대통령직에 유사 이래 가장 가까이 갔던 여성 후보 힐러리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 나종미 약력

나종미 씨는 1998 년 미국으로 유학 와서 프린스톤 신학교 기독교 교육석사, 유니온 신학교 신학석사를 마치고 현재 클레어 몬트 신학교 기독교교육학 박사 과정에 재학 중이며 문화전문자유기고가로 활동중이다.


나종미 자유기고가 najongmi@netzer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