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것 콤플렉스에서 벗어나라"

[석학에게 듣는다] 김열규 계명대 석좌교수

"새것 콤플렉스에서 벗어나라"


개혁에 쫓진 정체성의 상실, 서구편향 학문풍토에 안타까움

진돗개는 역시 진돗개다. 집안으로 들어 서려 하자 놈들은 허연 이빨을 드러낸다. 외지인을 보더니 한창 기세를 올려대는 진돌이와 진순이는 그러나 김열규(72ㆍ계명대 석좌교수) 선생을 보자마자 단번에 풀이 죽는다. 3대째 식구처럼 함께 살고 있는 견공의 후예들이다.

경남 고성군 하일면 송천리 송내마을의 여름 풍경에는 우리의 옛이야기가 고스란히 간직돼 있다. 개도, 소도, 사람도, 자연과 설화 속에서는 동등한 존재다. 바로 선생이 추구하는 문학의 얼개다.

전통적 명당이 배산임수라면 이 고을은 배산임해(背山臨海)라 할 것이다. 넉넉한 풍광이 휴식처럼 다가온다. “이 물로 차도 끓여 먹고 밥도 지어 먹어요. 도롱뇽, 송사리, 민물게, 다슬기가 사는 1급수니까요.” 집 바로 뒤 좌이산(佐耳山)에서 졸졸 흘러내리는 물에 들어가 발이며 얼굴을 식히던 선생은 그 산과 물에 얽힌 이야기들을 두서 없이 펼쳐 놓는다. “계대 옆의 고디탕집에서는 매주 한 번씩 내려 와서 사가지요.” 고디란 다슬기의 경상도말이고, 계대라면 그가 2003년 3월부터 석좌교수로 재직중인 곳이다.


흐트러진 책, 인간적 체취 물씬

겉에서 보면 제법 그럴듯해 보이는 2층짜리 태양열 주택이지만, 안으로 들어 가자 놀랍게도 내부는 어느 것 하나 정리돼 있는 것이라곤 없었다. 완벽한 혼돈의 풍경이었다. 2만여권으로 어림짐작하는 책들은 집 곳곳이 흐트러져 있다. 거실, 계단은 물론이고 화장실 안에도 책이다. 그것은 참으로 모처럼 보는 여유롭고도 인간적인 풍경이었다. 대부분의 책이 국문학, 미학, 인류학, 민속, 설화, 샤머니즘 등 귀신에 관한 것들이다. 이쯤되면 거기서 풍기는 것은 서권기(書卷氣) 가 아니라, 서권귀(書卷鬼)라 해야 할 판이다.

국문학자 김열규 선생은 가장 한국적인 것 속에서 세계적인 것을 찾고, 가장 예스런 것에서 가장 현대적인 것을 끄집어 낸다. 그의 주변에 있는 잡다한 사물 가운데 어느 하나도 우연히 내던져진 것은 없다. 그는 사물들 속에 숨어 있던 의미를 찾아내 하나의 그물로 엮어 낸다.

계명대가 그를 첫 석좌 교수로 영입한 신생학과인 한국문화정보학과란 말하자면 그가 그동안 쳐둔 방대한 그물을 풀어 헤치는 곳이다.

우연히 널려져 있는 것 같은 사물과 현상의 본질을 궁구(窮究)해 감춰진 의미를 해독해 내고, 오늘과 연관 짓는다. 과거의 시간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양 의뭉스럽게 자리잡고 있는 현상들에 대해 그는 박람강기함을 동원해 시비를 건다. 최근의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납골이라니. 조상의 벼를 수납하다니. 아버지, 어머니의 뼈가 무슨 물건이던가. 남의 죽음을 가볍게 여기면 산 사람 인생도 가볍게 된다’(6월 16일 ‘교수신문’). “세계화 하는 과정에 묻혀서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을 너무 소홀히 해요. 특히 현재의 혼례와 장례를 보면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얼마나 괄시하고 있는가를 여실히 알 수 있죠.” 선생은 그것을 두고 ‘무덤마저 개혁하는 우리의 새것 콤플렉스’라며 ‘改革(개혁)’인지 ‘개가죽’인지 모를 일이 벌어지고 있다며 일갈했다.

그는 우리의 전통 무덤을 두고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덤이라 했다. “봉분은 꽃봉오리, 그를 둘러싼 석판은 잎이죠. 바로 연꽃이에요.” 현실적으로 무덤이 땅을 너무 많이 차지한다는 지적에 일리가 없는 건 아니나, 그 같은 전통적 미감을 되살려 보려는 천뎔?전혀 없었다는 지적이다. 그렇다면 을씨년스럽기만 한 현행 납골당이 개선될 수 있을 것이라는 충고다.


죽음 경시하면 삶도 깔보게 되는 법

“혼례식장에서 통용되는 절차란 알고 보면 예식장 주인들이 자기네들 편의에 따라 만들어 낸 것이죠.” 박정희 정권이 망쳐 놓은 전통 의례와 규범을 환원해 보거나 현재와 융합시켜 보려는 노력을 너무 게을리한 결과가 바로 현재의 변종 혼례식이라는 것이다.‘전통 문화를 도시화시키는 작업에서 한국은 일본이나 중국보다 훨씬 과격한 편이지요.“

마찬가지로 장례 또한 병원에서 만든 법식을 좇을 뿐이라는 지적이다. 옛날에는 임종하라며 환자를 병원서 집으로 보냈지만 이제는 정반대 현상이 당연시되니, 모두 객귀나 잡귀로 만들자는 소행이라는 것이다. “죽음을 경시하면 삶도 깔보게 되는 겁니다. 예를 하나 들까요?”

1990년 분당의 초상집에 문상을 갔는데, 관이 크레인에 매달려 아파트로 올라 가더라는 것이다. “이곳까지 온 것은 언젠가는 나도 저꼴이 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덜컥 든 게 가장 큰 원인이죠.” 이듬해 모스크바에서 열린 ‘구라파 한국학회’에 가서 그 이야기를 했더니, 소련인들은 장지에서 1㎞ 떨어진 지점부터는 관을 메고 온다는 대답에 그의 위기 의식은 한층 고조됐다.

그가 서울 생활을 접은 것은 이듬해인 1991년. 1950년부터 서울서 살았으나, 한국전쟁 당시의 피란 기간 2년을 빼면 서울 생활이 38년이다. 역촌동의 집을 팔고 나니 현재의 집터 700평은 물론, 산까지 딸려 오더라는 것이다.


해변 마을서 듣는 클라리넷 소나타

선생은 상당한 수준의 클래식팬이다. 고즈넉한 해변 마을에서 듣는 브람스의 ‘클라리넷 소나타’는 단아하기 그지없다. 미국 하버드대의 옌칭연구소 재직 시절 헌 음반을 세일즈할 때 사 놓은 음반인데, 제일 아끼는 판이다. 맹인 클라리넷 주자 블라흐의 기교 부리지 않는 담담한 연주가 압권이라는 평이다. “당시 얄팍한 주머니는 모차르트, 슈베르트, 브람스의 음반을 모은다고 다 날아갔죠.” 음반이란 사치품의 반열에 들던 때였다. 기막힌 일도 겪었다.

“미국서 음반을 갖고 와 보니, 세관서는 LP 3장만 반입 허용된다는 거였죠. 나머지는 무조건 차압이었어요.” 혈기 넘치던 선생은 관리들이 보는 앞에서 음반을 발로 밟아 부숴 버리는 것으로 분을 삭였다. “오디오는 대부분 미군 PX에서 흘러 나온 장물인데, 카트리지는 50만원을 주고 산 진품이에요. 내가 사치한 거라면 이 물건뿐입니다.”

2층 역시 책천지다. 가장 아끼는 책인 ‘시베리아의 우상 숭배’가 책더미 속에 아무렇지도 않게 꽂혀 있다. 그 난장판속에서 단번에 책을 끄집어 든 선생은 “작고한 불교학자 이희영 선생이 주고 간 책”이라 소개했다. 러시아의 인류학자 제레니네가 1952년에 쓴 명저로, 현재는 어디서도 전혀 구할 수 없는 책이라고 말했다.

현재 8월 출판을 예정으로 ‘동북아시아 샤머니즘’의 마지막 정리 작업중이다. 다음 책으로 ‘한국인의 화’를 잡아 두었다. 10년 전 세계 정신 분석학회에 ‘화’라는 말이 정식으로 등록됐을 만큼 독특한 정신 현상인 화에 대해 새롭게 접근하자는 것이다. 선생은 “이제는 결혼한 여성이 자기 성취의 기회를 박탈당한 결과, 저지된 욕망을 자식에게 투사하려는 데서 또 다른 화의 문화가 만연하라고 있다”며 “버전 업된 여성의 ‘화’를 NGO 봉사 등 다양한 사회 봉사 활동으로 승화시켜야 할 때”라고 말했다.


한국의 샤머니즘에 천착

다음 작업에서는 한국의 샤머니즘과 바이칼호 일대 만주-퉁구스 지역의 샤머니즘이 유사하다는데 착목, 한국 인문학의 외연을 부여ㆍ발해ㆍ고구려 등지로 넓히자는 내용도 포함될 예정이다. 그 같은 주장이 고고학 바깥 분야에서 펼쳐지기는 처음이다. 선생은 “우리의 문화적 자산을 절대 소련이나 중국학계에 넘겨줄 수는 없는 일”이라며 남은 숙제가 단순한 개인적 차원의 일이 아님을 넌지시 비쳤다.

선생이 즐겨 쓰는 용어인 ‘글로컬리즘’ 역시 서구 편향 학문 풍토에 대한 저항감이 배어 있다. 1970~80년대 하버드대 등지에서 객원 교수로 있을 때, 지긋지긋하게 먹던 맥도널드 햄버거와 콜라가 한국에 갈수록 무분별하게 판치는 걸 보고 5~6년전부터 쓰게 된 말이다.

주섬주섬 이야기를 펼쳐 놓던 선생은 집앞 마을 어귀로 기자를 데려 갔다. 마당 한쪽 구석에서 나지막이 있던 나무를 가리키며 “어릴 적 할머니가 열매를 따서 잘 재어 두면 엿처럼 돼, 그걸 먹고 컸다”고 한다. 선생은 아이들 줄 요량으로 지금도 그렇게 만들어 준다고 했다. 바로 고욤나무였다.

우리 시대가 잃어 버린 전승의 방식은 선생에게 여전히 살아 있는 현재이다. 선생은 그것들을 꿰어 내고, 만물은 어느 하나 우연히 내던져 지지 않았음을 입증해 보인다. 이런 식이다.

“좌이산이란 말이 ‘귓구멍 뚫리게 하는 산’이란 말에서 나왔는데, 이 산의 기운이 뻗쳐 나가 자꾸만 덜거덕 대는 남북 대화의 길도 뚫게 해줬으면 해요.” 선생의 말은 논문에 주(註) 하나 달아두는 듯 했다. 선생과 말과 글, 선생이란 인격과 자연 사이의 경계 짓기란 암만해도 지난한 일인 듯 싶다. 주변 사물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어 두고 있는 선생 특유의 벽(癖) 때문이다.

마을 어귀의 100년 묵은 아름드리 팽나무가 만들어 내는 두터운 그늘 아래서 앞바다를 가리키며 선생은 말했다. “저 바다 이름은 자란만인데 자줏빛 난초라는 뜻이지요. 바로 저 작은 섬은 모자섬이라 하는데, 내가 이름 붙인거예요. 꼭 모자를 씌운 것 같잖아요?”

너무나 평화로운 마을. 파출소 직원은 짭짤한 바닷 바람을 맞으며 무료함을 달래고 있었다. 주유소 주인도, 밭 매던 할멈도 모두 선생을 안다. 서울에서 4시간 반을 달려 간 그곳에는 잃어버린 시간들이 있었다. 아쉽게도 부인 정상옥(69)씨는 마침 출타중이라 만나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선생집의 명물 ‘두텁떡’의 맛을 볼 수 없었다.

송뢰(松賴) 소리가 넘실대는 해변 마을의 여름은 그렇게 익어 가고 있다.

장병욱차장


장병욱차장 aj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