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트랜드 마지막 여왕, 목숨과 맞바꾼 잉글랜드 왕위

[역사 속 여성이야기] 불꽃의 인생 - 메리 스튜어트

스코트랜드 마지막 여왕, 목숨과 맞바꾼 잉글랜드 왕위

월드컵 유럽지역 예선전 같은 데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치열하게 경쟁하는 것을 볼 때가 있다. 응원전도 여타 국가와 경기를 할 때보다 더 뜨겁다. 한 나라에서 두 팀이나 나오다니 어쩐지 불공평해 보인다. 무언가 사연이 있을 것 같다.

사실 영국에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이 두 지역은 거의 다른 나라와 다름없다. 주민 정서부터가 매우 다르다. 우리나라의 지역감정에 댈게 아니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간의 뿌리깊은 투쟁의 역사 때문이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17세기에 와서야 하나의 나라로 합쳐졌다. 스코틀랜드는 마지막 여왕이었던 메리 스튜어트를 끝으로 잉글랜드에 통합된다.


유럽에서 가장 행복했던 여인

메리 스튜어트(1542-1587)는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행복한 여인이었다. 16세에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고, 잉글랜드의 첫 번째 왕위 계승권자였다. 그러나 행복은 남편 프랑소와 2세의 죽음으로 막을 내리고 만다. 남편을 잃은 미망인 왕비로 살기보다는 스코틀랜드의 여왕으로 살고 싶었던 19세의 메리 스튜어트는 고국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구교와 신교의 종교분쟁이 한창이었던 스코틀랜드에 구교도였던 여왕 메리 스튜어트의 도착은 그녀와 스코틀랜드의 비극적 운명을 예감하게 하였다.


엘리자베스 1세와의 질긴 인연

메리 스튜어트의 일생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여인이 있다. 역사상 가장 뛰어난 국왕으로 칭송받는 엘리자베스 1세다. 엘리자베스 1세의 삶에서 메리 스튜어트는 가장 신경쓰이는 존재였다. 왕의 딸로 태어났지만 서출로 구박받은 엘리자베스 튜더는(엘리자베스 1세)는 배다른 남동생과 언니가 왕으로 군림할 때는 그 목숨마저 위태로왔던 불운의 공주였다.

그런 그녀에게 기회가 왔다. 언니 메리 튜더의 죽음으로 국왕의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때 엘리자베스의 뒤를 잡아 끄는 존재가 있었으니 바로 메리 스튜어트였다.

엘리자베스는 부친 헨리 8세가 살아 생전 그녀를 서출로 공표 하였기 때문에 국왕의 지위에 오르는 명분이 취약했다. 그에 비해 메리 스튜어트는 헨리 7세의 적손 증손녀로서 엘리자베스에 비해 명분상의 왕위 계승권이 우선이었다. 엘리자베스와 메리 스튜어트는 5촌지간으로 엘리자베스가 아주머니뻘이었다.

엘리자베스가 왕위를 이어받게 된 당시 행복한 프랑스의 왕비였던 메리에게 잉글랜드의 왕위 계승권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그러나 메리는 엘리자베스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축복하지 않았다. 실제 통치자가 될 것도 아니면서 메리 스튜어트는 자신의 문장에 잉글랜드의 왕관을 새겨 넣었다. 이것은 엘리자베스의 자존심에 크나 큰 상처를 안겨 주었다. 이때부터 시작한 두 여인의 질시와 반목은 메리 스튜어트가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


사랑과 결혼, 불륜 그리고 한없는 추락

행복한 어린시절과 당당하고 고귀한 혈통을 지닌 메리 스튜어트는 불행에 조심할 줄 모르는 어린아이와 같은 열정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녀는 스코틀랜드의 복잡한 정치 상황과 국왕이라는 신분을 고려하지 않고 첫눈에 반한 남자 헨리 단리와 덜커덕 재혼을 한다.

그리고 그 남자가 싫증나자 또 다른 남자 보스웰 백작과 불륜을 저지르고 그와 공모하여 남편을 살해한다. 이런 메리 스튜어트의 모습은 모든 일에 조심하며 정치혼란이 두려워 심지어 결혼조차 하지 않았던 엘리자베스 1세와는 극단적인 대조를 보인다.

메리 스튜어트는 남편 헨리 단리가 죽고 3개월 만에 남편 살해의 공모자인 보스웰 백작과 또 다시 재혼한다. 그러자 스코틀랜드 전역이 들끓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신교파 귀족들에게 미움을 받던 메리 스튜어트는 이제 남편을 죽인 부도덕한 여인으로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결국 메리 스튜어트는 신교파 귀족들에 의해 폐위된다.

그러나 태어날 때부터 은수저를 입에 물고 있던 고귀한 메리 스튜어트는 자신의 처지를 인정할 수 없었다. 유폐된 상태에서도 복위를 꿈꾸며 그녀를 지지하는 구교 귀족들을 충동질했다. 그리고 생각해낸 것이 엘리자베스 1세였다. 메리 스튜어트는 자신이 이때까지 엘리자베스 1세의 자존심을 건드려왔다는 사실도 잊은 채 도움을 요청한다.


불꽃 같은 삶, 아들 제임스 1세가 왕위 계승

메리 스튜어트의 망명 요청은 엘리자베스 1세에게는 뜨거운 감자였다. 친척에다 같은 국왕의 처지인 메리 스튜어트를 방치 할 수도 없지만, 한편으론 왕위를 오랫동안 불안하게 한 그녀가 사라지는 것은 기쁜 일었다.

엘리자베스 1세는 고민 끝에 일단 메리 스튜어트를 런던에 받아들인다. 그러나 메리 스튜어트가 갈망하던 스코틀랜드 왕권을 되찾아 주지는 않는다. 적을 품에 안은 채 죽이지도, 살리지도 않는 것. 그것이 엘리자베스 1세의 가장 현명한 메리 스튜어트에 대한 처리 방법이었다.

메리 스튜어트도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조금은 세상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런던탑에 갇혀 있으면서 겉으로는 존경하는 친척인 여왕 엘리자베스 1세를 위해 뜨개질과 기도로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뒤로는 엘리자베스 1세를 죽이고 자신이 잉글랜드과 스코틀랜드의 여왕으로 등극하기 위한 모반을 끊임없이 꾸몄다.

그녀의 모반 계획은 번번히 발각되었지만 엘리자베스 1세는 차마 그녀를 처형하지 못하고 오랜 세월을 질질 끌었다. 그러기를 19년. 엘리자베스 1세도 메리 스튜어트도 이제는 할머니로 변해 가던 어느 날, 메리 스튜어트는 엘리자베스의 충복이자 신교도인 월싱햄의 계략에 말려 움직일 수 없는 모반의 증거를 남기고 만다.

신교 옹호자인 엘리자베스 1세 사후 잉글랜드 왕위 계승권자는 엄연히 구교도인 메리 스튜어트였다. 신교 귀족들은 메리 스튜어트의 등극으로 다시 한번 잉글랜드에 피바람이 몰아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엘리자베스1 세가 죽기 전에 메리 스튜어트가 죽어야만 했다. 망설이는 엘리자베스 1세를 귀족들은 다그쳤다. 결국 엘리자베스는 1587년 메리 스튜어트의 사형 집행장에 사인을 하고 만다. 메리 스튜어트의 아들 제임스는 어머니의 목숨과 바꾼 왕위 계승권을 받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왕이 되었다. 그가 바로 영국의 제임스 1세이다.

16세기 영국은 엘리자베스 1세와 메리 스튜어트 두 여자가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엘리자베스 1세는 메리 스튜어트라는 강력한 라이벌이 있었기에 자신의 통치권을 더욱 공고히 하고 성군이 될 수 있었다.

한편 메리 스튜어트는 죽음의 칼이 목에 들어오는 순간까지도 자신의 왕위 계승권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것이 결국 아들에게 이어져 제임스 1세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통합하게 되는 것이다. 불꽃같은 삶을 살고 그 불꽃에 스스로를 태워버린 여인. 메리 스튜어트는 그런 여인이었다.

김정미 방송·시나리오 작가


김정미 방송·시나리오 작가 limpid7@ms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