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들 "안내고 안받고 싶다" 연금 개혁안에 분통

국민연금 5년뒤 또 손질?

국민들 "안내고 안받고 싶다" 연금 개혁안에 분통

역시 벼랑을 향해 달리는 ‘폭주 기관차’ 였다. 파국을 막기 위한 선택은 이미 예정돼 있었다. 기관차의 속력을 줄이는 수밖에. “아무 문제없이 목적지까지 빨리 도달할 수 있다”고 승객들에게 누누이 약속을 했지만, 더 이상 약속에 연연할 처지가 아니었다. 승객들은 분통이 치민다.

“비싼 탑승료를 물릴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불편을 감수하라고? 도대체 목적지에 도달하기는 하는 거야?” 승객들을 더욱 불안에 떨게 하는 것은 이것이 단지 미봉책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기관사가 언제 또 다시 ‘고통 분담’을 요구할 지 모른다. 또 결국에는 벼랑 아래로 추락하고 말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이미 기관차에는 탑승해 있고,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 내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국민연금, 태생의 한계

국민연금 수령액은 깎고, 보험료는 올리고. 당(黨)도 정(政)도 불가피한 ‘최후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정부(보건복지부)측 안은 현재 월 평균 소득의 60%(소득 대체율)인 연금 수령액을 2004년부터 50%로 낮추고, 월 보험료를 소득의 9%에서 2010년부터 2030년까지 순차적으로 15.85%까지 높이겠다는 것.

민주당도 기본 골격에는 동의를 했지만 소득 대체율을 내년부터 6년간 55%, 2010년부터 50%로 낮추는 절충안을 제시했다. 다분히 내년 총선을 앞두고 민심을 의식한 것이었다.

하지만 정부안이나 민주당안이나 따지고 보면 조삼모사(朝三暮四)다. 민주당 안대로 국민연금 수령액을 단계별로 줄일 경우 월 보험료 인상폭이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저부담, 저급여 체제’로 갈 것이냐, ‘고부담, 고급여 체제’로 갈 것이냐의 선택일 뿐이다. 입법 과정에서 어떤 결론이 내려지든 국민은 상당한 손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국민연금 제도의 손질은 애초부터 불가피했다. 1988년 도입 당시 적은 보험료로 높은 연금을 지급하겠다는 발상을 한 것 자체가 화근이었다. 월 소득의 9%를 보험료로 납입해 60세 이후 연금 가입 기간 평균 소득의 70%를 연금으로 지급키로 했으니 연금의 재정 고갈은 시간 문제였다. “처음 연금 프로그램 설계 당시 60~70년대 경제 개발의 주역들에게 혜택이 돌아가야 한다는 발상을 한 것이 잘못”이라는 게 정부 관계자의 말이다.

연금 도입 10년만인 98년 소득 대체율을 70%에서 60%로 하향 조정하고, 연금 지급 시기도 60세에서 점진적으로 65세로 늘리는 개정안을 마련했지만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지금은 막대한 흑자를 내고 있지만 당장 손을 대지 않으면 2025년 적자로 전환돼 2047년에는 재정이 고갈(누적 이익을 모두 까먹는 것)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보건복지부 연금정책과 박경호 과장은 “만약 60%의 소득 대체율을 그대로 유지시킬 경우 2035년에는 국민들이 월 소득의 39.1%를 연금 보험료로 납부해야 국민연금이 유지될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고 설명했다.


연금? 혹은 용돈?

“연금의 지급액을 줄이면 이는 ‘국민 연금’이 아니라 ‘국민 용돈’이 된다.” 지난 대선 기간 노무현 대통령의 국민연금에 관한 언급이었다. 국민 모두가 노후에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한다는 국민연금의 도입 취지를 감안할 때 연금 지급액이 줄어들 경우 제 기능을 수행할 수 없다는 의미였다.

국민연금관리공단의 통계에 따르면 2002년 현재 연금 가입자의 월 평균 소득은 136만원. 평균 소득자가 20년간 연금 보험료를 납입했을 경우 현 기준 대로라면 향후 월 40만원의 연금을 받을 수 있지만, 정부안 대로 소득 대체율을 50%로 낮추면 내년부터 월 연금액이 34만원으로 줄어든다.

2070년을 기준으로 국민연금 평균가입기간이 22.7년으로 예상되는 만큼 가장 평균적인 연금 지급 사례인 셈이다.

물론 34만원은 미래의 물가 상승률?감안해 현재 가치로 환산한 수치이지만 연금의 기능을 수행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액수라는 것이 대체적인 지적. 중소기업에 근무하는 직장인 최모(43)씨는 “연금액이 월 30여만원에 불과하다면 하루에 담배 한 갑, 점심 한 끼 사먹을 수 있는 정도에 불과하다”며 “투명한 유리 지갑에서 꼬박꼬박 보험료를 떼 가면서 노후 생활에 거의 보탬이 되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분을 토로했다.

정부 일각에서는 미국 일본 캐나다 등 대부분 선진국들의 연금 수령액 비율이 40% 정도라는 점을 이유로 아직까지 우리나라의 연금 수령액이 높은 수준이라는 주장을 편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선진국들은 공적 연금 외에도 기업 연금(퇴직금), 개인 연금 등 다양한 소득원을 통해 노후 소득 보장을 하고 있다는 중요한 사실을 간과한 것.

윤석명 국민연금연구센터 부연구위원은 “선진국처럼 다층 소득보장 체계가 발달하지 않은 우리나라의 경우 당분간은 최소한 50% 수준의 소득대체율은 보장돼야 할 것”이라며 “하지만 이는 연금 가입 기간이 평균 40년이라는 전제를 한 것으로 향후 상당 기간 실질적 가입 연수가 20년 안팎에 머물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에서는 대체 노후 소득원이 없을 경우 노후 안정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미래 위해 허리 휘는 서민들

미래 보장을 위해 당장의 과도한 부담을 국민이 과연 소화를 해 낼 수 있는 지도 문제다. 보험료가 높아지는데 오히려 연금액은 줄어들어야 하는 상황이라는 점에서 서민들의 정서적 저항은 거셀 수밖에 없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00년 현재 우리나라의 국민부담률(국내총생산 대비 조세와 사회보험기여금이 차지하는 비율)은 26.1%. 국민연금 보험료가 대폭 인상되고 향후 고령 사회의 진척에 따라 건강보험료 등이 높아질 것을 감안하면 30%를 넘어서는 것은 시간 문제다. 다시 말해 월 100만원의 급여를 받는 직장 생활자가 한 달에 30만원 이상을 세금과 연금보험 등으로 납부를 해야 한다는 얘기다.

국민 개개인 뿐 아니라 기업의 부담도 크게 늘어날 수 밖에 없다. 경제5단체 중 하나인 경영자총협회가 최근 ‘국민연금 제도 개선에 대한 입장’ 성명을 통해 “현재 기업이 법정 퇴직금의 전액을 부담하는 상황에서 연금 재정을 안정시키고 기업의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보험 급여 수준을 40%로 낮춰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현재 5인 이상 사업장에 적용되고 있는 퇴직금 제도에 대한 사업주 부담(8.3%)과 건강보험(1.97%) 산재보험(1.36%) 고용보험(1.35%) 등을 감안할 때 국민 연금 보험료에 대한 사업주 부담까지 현행 4.5%에서 7.92%까지 상승하면 사업주 부담이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연금 가입자 간 혹은, 공무원연금이나 군인연금 등 다른 특수직역 연금 가입자와의 형평성 시비도 일고 있다. 직장 가입자와 지역 가입자(자영업자) 간의 형평성 논란은 99년 연금이 도시지역 자영업자에게 확대 적용되면서부터 끊임없이 제기돼 온 문제다. 소득이 고스란히 노출되는 직장 가입자와 달리 자영업자의 소득 파악은 쉽지 않은 탓이다. “직장 가입자와 지역 가입자의 연금을 별도로 관리해야 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지난해 당정이 공무원연금, 군인연금, 사학연금 등 3대 특수직역 연금 수령액을 ‘임금 상승률에서 2%포인트 뺀 수준’으로 높이기로 관련법을 개정, 수령액을 올해부터 평균 14% 가량 높여준 것도 이번 국민연금법 개정과 함께 다시 한번 도마 위에 오르내리고 있다. “이미 적자로 돌아선 3대 연금에 대해서는 수령액을 높여주면서 아직 흑자를 내고 있는 국민연금의 수령액을 낮추는 것은 특수 계층에만 혜택을 주기 위한 것”이라는 지적이다.


5년 뒤에 또 손질하려고?

하지만 정작 국민이 가장 우려하는 대목은 “정말 이번이 마지막이냐”는 것이다. 고통을 감수하며 수술을 했는데 환부를 제대로 도려내지 않는다면 수년 후 더 이상 회복이 불가능해질 수 있다. 즉 다시 미봉책으로 국민의 눈가림을 한 뒤 수년 뒤에 다시 연금 재정 고갈을 걱정해야 하는 사태가 빚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5년 전인 98년 국민연금법 개정에서 ‘재정 계산제도’를 도입해 5년마다 국민연금의 재정 상태를 점검하고 이에 따라 제도 개선을 도모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올해가 재정 계산제도 시행 첫해. 결국 다시 5년 뒤인 2008년, 혹은 2013년에 같은 상황에 되풀이되지 말라는 법이 없는 셈이다.

노동계 역시 주먹구구식 연금 개혁 방안에 동의할 수 없다며 강경 대응을 선언한 상태. 민주노총 오건호 정책부장은 “정부의 재정 추계에 기본이 되는 데이터부터 심각한 오류를 안고 있다”며 “재정 추계 시점으로부터 70년간 재정이 유지돼야 한다는 전제라든지, 현재의 낮은 출산율을 기초 데이터로 삼고 있는 부분은 대폭 수정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의 목소리도 한결 같다. “더 이상 미봉책은 안 된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으로 환부를 확실히 도려내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국민적 저항이 거세지만 어차피 한 번 거쳐야 할 일이라면 과감히 단행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한국개발연구원 문형표 선임연구위원은 “정부가 국민에게 사죄해야 할 것이 있다면 분명히 사죄를 하고 현 상황을 정확히 전달한 뒤 앞으로 다시는 연금의 재정 문제가 거론되지 않도록 확실한 개혁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특히 “미국이 84년 연금 개혁을 단행할 당시 무려 50년 뒤인 2033년 연금 지급 개시 연령을 65세에서 67세로 조정한다고 못을 박았듯 법에 구체적인 일정을 명시해 국민의 신뢰를 되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 당정은 국민연금법안 입법 예고를 앞두고 소득대체비율을 60%에서 내년부터 50%로 바로 내리는 안(정부)과 일단 55%로 인하한 뒤 2010년 50%로 내리는 안(민주당안)을 놓고 막후 협상중이다. 98년 정부가 70%에서 55% 인하안을 내놓았지만 민심을 의식한 정치권의 반대로 60%로 수정된 안이 통과됐던 것과 비슷한 양상이다.

또 다시 당장의 국민 정서만을 감안한 미봉책으로 결론이 날 지, 아니면 이번엔 뭔가 다른 모습을 보여줄 지 지켜볼 일이다.

이영태 기자


이영태 기자 yt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