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어지는 빈곤의 그림자 "생활고는 사회적 타살"

죽음을 부르는 사회, "물러설 데가 없어요"

짙어지는 빈곤의 그림자 "생활고는 사회적 타살"

'너희를 이 세상에 맡길 순 없었어.'

그것은 어미로서의 마지막 선택이었다. 이 사회에서 자신이 아이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없다는 생각. 아라(8), 윤상(6), 은서(3)와 그 어머니 손모(34)씨는 아파트 아스팔트위에 선홍색 피를 뿌렸다. 영정마저 없는 인천 세림병원 영안실에서 차가운 세상과 완전히 결별했다.

'아이들에게 미안하다. 살기 싫다. 죽고 싶다.' 마지막 기운으로 갈겨 쓴 종이를 뒷주머니에 구겨 넣은 채 그녀는 추락했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고? 어차피 이승에서도 없던 날개 아니던가. 그녀의 이성적 판단은 7월 17일 오후 6시 인천시 부평구 청전동 S아파트 14층과 15층 사이 아파트 계단에서 중지됐다.


그들에게 세상은 온통 잣빛뿐

"엄마 살려줘, 안 죽을래, 살고 싶어." 아이들 셋의 울음 소리는 5분이 넘도록 그칠 줄 몰랐다. 어머니의 말투와 행동은 여늬때와 달랐던 것이다. 아이들은 잿빛 아파트 벽이 부서져라 비명을 지를 뿐이었다.

"위를 쳐다보니 여자가 계단 창문을 통해 남자 아이를 집어 던졌고, 이어 10초쯤 지나 다시 막내로 보이는 여자 아이를 안고 뛰어 내렸다." 난데없는 소란을 듣고 15층에서 이 사건을 목격한 문모(48)씨의 말이다. 지은 지 20년이 다 돼가는 낡은 아파트 16평 공간에서의 암울한 삶은 그것으로 끝났다. 1,700만원의 전세금이 그들의 삶을 마지막까지 버텨주던 지지대였다.

모두 40세대가 들어 사는 16평형 5층 아파트. 거의 매일 밤마다 아파트 복도가 손씨 아이들 우는 소리 때문에 시끄러웠던 터에 이웃들은 그날도 또 그려러니 하고 생각했다고 한다.

당초 가출한 것으로 보도됐던 손씨의 남편 조모(34)씨는 3년전 다니던 가구 공장이 부도나 실직한 이후 지방 공사판을 전전하며 일용직 노동자로 지내왔다. 조씨는 경찰에서 4년전부터 카드를 사용해 오다 지난해 3개 카드사에서 연체된 2,000만원의 카드빚 때문에 신용 불량자가 됐다고 진술했다. 졸지에 가족을 잃은 바로 다음날인 18일 새벽 인천 부평경찰서에 출두한 조씨는 경찰에서 "연체된 빚 때문에 카드사로부터 빚독촉에 시달려 온 데다 신용불량자가 되고 보니 카드 사용도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해를 넘기면서 첫달은 초등학교에 입학, 둘째 아들도 유치원 갈 나이가 됐고 생활의 압박은 본격화됐다는 것. 직업이 일정치 않은 조씨가 벌어오는 돈으로 하루가 다르게 커 가는 아이들을 키우기란 매우 힘들었다. 더욱이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세살바기 아이를 두고 손씨가 돈 벌러 나갈 수도 없는 처지였다. 이웃 주민들은 "아이들이 아파도 병원비가 없어 이웃한테 1~2만원을 빌리러 올 때도 있었다"고 전했다.

결국 조씨 형의 명의로 1,0000만원의 은행 대출을 받은 것은 검은 구렁텅이로 성큼 다가서는 단초였다. 조씨가 잦은 출장으로 집을 비운 사이, 카드 회사와 은행으로부터 지속적인 독촉 전화를 받아 온 손씨는 최근 주변 친구에게 '빚독촉에 시달려 잠을 못 자겠다"며 하소연하기도 했다.

종내는 카드사로부터 걸려오는 전화를 피해 아예 전화 코드를 뽑아 놓아야 했다. 사건 이 벌어진 날에 손씨의 전화를 받았다는 초등학교 여자친구 이모씨는 "나 죽으면 애들은 어떻게 하나. 생활이 너무 힘들다, 죽으면 TV에 나오느냐고 물었다"고 말했다.

이 세상을 뜬 손씨는 자신이 엄청난 뉴스가 돼 TV에 나온 사실을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또 다른 손씨들'이 그 뉴스를 보면서, 자신만은 뉴스가 되지 말아야 한다며 오늘도 손톱을 곱씹고 있다.


불행의 씨앗 된 카드 빚

사건은 빈곤이라는 낯익은 테마에 카드빚이라는 새로운 문제가 중첩돼 일파만파를 불러 일으키고 있다. 우리 사회는 이들의 고민을 들어 줄 겨를이 없다. 요즘의 1등 신부감?카드빚이 1,000만원 미만 되는 여자라는 게 통설이고, 카드빚만 갚아 주면 조건ㆍ학벌ㆍ외모 상관없이 결혼 OK라는 말을 더 이상 우스개로 치부할 수 없다. 경제 활동 인구 7명 중 1명이 신용 불량자인 기형 사회가 바로 한국이다.

특히나 카드빚은 사람을 인면수심으로 내몬다. 멀리 갈 것 없다.

카드빚을 갚기 위해 친구와 짜고 자신의 누나를 상대로 강도짓을 시킨 20대. 경북 포항 북부경찰서가 7월 15일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 혐의로 구속한 이모(25ㆍ무직)씨 등 2명은 바로 7,000만원에 달하는 카드빚을 갚기 위해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다.

올 가을에 결혼할 계획인 누나에게 돈이 많을 것으로 생각한 것. 같은 날 경기도 부천 중부경찰서는 카드빚을 갚아 달라고 행패를 부리다 어머니를 목졸라 살해한 김모(22ㆍ무직)씨를 존속살인 혐의로 구속했다.

또 23일 충남 태안군 태안읍에서는 아내의 신용카드 빚으로 심각한 가정 불화를 겪던 이모(34ㆍ무직)씨가 두 달을 살해한 뒤 자살을 기도하는 일이 벌어졌다. 선박수리업을 하다 지난 3월 손을 다쳐 실직한 이씨는 아내(35ㆍ피부관리실 운영)의 신용카드빚 5,000만원 문제로 심각한 가정 불화를 겪어 온 것으로 드러났다.

동반 투신 사건 엿새 뒤인 23일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위원장 김연명 중앙대 교수)는 서울 을지로 국가인권위원회 배움터에서 긴급 토론회를 열고, "최근의 생활고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라고 결론지웠다. 장기 불황에 따른 생활고가 빚어 낸 사회적 문제라는 것이다.

'벼랑끝 사회, 사회안전망을 점검하자'는 주제로 열린 토론회에서는 "최근 벼랑끝 계층의 자살 사건은 실업과 직장의 비정규직화 등으로 빈곤층이 양산돼 일어난 사건"이라며 "이는 결국 이들에 대한 사회적인 안전망이 사각지대화해 빚어진 사회적 타살"이라는 의견이 제기돼 참석자들의 높은 공감을 샀다.


사회적 자립기반 시스템 절실

이 같은 주장을 펼친 충북 청원군 현도사회복지대 복지정책과 이태수 교수는 "일을 하면서도 생활고에서 벗어나지 못 하는 근로 빈곤층에 대한 적절한 사회적 안전망을 구축하지 못할 경우, '사회적 타살'은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또 "현재 한국에서 빈곤 상태에서 벗어 났으나 1년내에 재빈곤화되는 확률이 60%에 이른다"며 "반복 빈곤, 재빈곤화가 우리나라 빈곤 구조의 큰 특징"이라고 덧붙였다.

이 교수는 구체적 사회안전망 구축 방안으로 △생계, 의료, 주거, 교육 등 기본적 요소에 대한 긴급 구호의 국가 보장 △긴급 대부를 통한 자립 기반 구축 기회 마련 △사회적으로 공공 일자를 창출해 안정적 수입을 확보할 수 있게 하는 시스템 등을 꼽았다.

그 같은 주장은 현재 기초 생활 보장 제도의 혜택 대상자에 들지 못 하는 적빈 계층에 대한 지원책이 없다는 점에서 더욱 설득력을 갖는다. 현재 기초 생활 보장 제도는 '4인 가족 기준 월소득 102만원 이하'인 135만명을 대상으로 실시되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궁지에 몰린 사람들을 보호해 줄 수 잇는 사회적 안전망이 부실한 탓이라는 지적이다.

최근 불거지는 빈부 격차 문제와 관련, 한국빈곤문제연구소는 현재 한국 사회의 빈부 격차와 불평등은 1997년의 IMF 위기 이전보다 더 심화되고 있다고 경고했다. 즉, 도시근로자의 상하위 간 소득 격차는 5.36배로 확대일로인 것으로 나타났다. 남경희 서울 교대교수는 "고도 성장의 이면과 IMF의 위기 상황에서 적잖은 사회 구성원들이 절대적 빈곤 상태에 놓여 있다"고 지적했다.

대법원에 의하면 올 상반기 중 전국에서 개인 파산을 신청한 이들은 1,358명으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던 지난해 1년 동안의 신청자 1,335명을 초과한 상태다. 서울지법 파산부(재판장 변동걸 수석부장판사)는 7월 23일 올해 1~6월 사이 서울지법에서 파산선고를 받은 개인 파산자는 473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파산 선고를 받은 개인 파산자 106명보다 4.4배나 늘었다고 밝혔다.

또 같은 기간 서울지법에서 파산 선고를 받은 뒤 면책 신청을 한 개인채무자도 349명으로 지난해 상반기의 73명보다 4.7배 늘어났다.


사회가 죽음으로 내몰아

사회적ㆍ경제적 요인이 뒤엉킨 이 비극의 참의미를 풀어 헤치는 것은 살아 남은 자들의 의무다. '소득 2만달러 시대'가 정치적 수사로 전락해 성장 제일주의가 국가 정책의 기조로 굳어질 경우,세계 12위의 무역국이라는 허울속에서 벼랑끝에 내몰릴 계층의 출현은 확대 반복될 것이라는 참여연대측의 우려는 여전히 유효하다.

이 사건 이후, 경제적 난국속에서 자살 충동자들을 상담해 주는 전문 상담 단체가 절실하다는 의견이 현실적 방안으로 강력 대두되고 있다. 전문지식이 없는 자원봉사자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는 생명의 전화나 자살예방센터 등의 운영 체계를 더욱 전문화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사건을 둘러싼 여러 시각에도 불구, 한 가지는 엄연한 사실로 남아 있다. 어머니에게는 자살이지만, 아이들에게는 타살이라는 점이다. 자식들이 물려 받을 것이 뻔한 가난의 고통을 차단하기 위한 방책이 그들을 '살해'하는 수밖에 없었을까. 부질없는 질문일 지 모른다. 손씨와 세 자녀가 차례로 떨어지다 부딪혀 깨진 1층 현관 지붕의 기왓조각과 함께 이 비극 역시 얼마 안 가 세상의 관심에서 사라질 것이니까.

장병욱차장


장병욱차장 aj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