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장 퇴진론, 전경련 무용론, 차별론 등으로 몸살

삼각파도에 흔들리는 '손길승호'

회장 퇴진론, 전경련 무용론, 차별론 등으로 몸살

결연한 각오의 표정이었다. “스스로 물러날 때를 잘 알고 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SK사태의 공과가 나에게 집중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아픔을 느끼고 책임을 통감한다. 그러나 때가 있기 마련이다. 법적 제약이 생기면 할 수 없지만 현 시점에선 그런 제약이 없지 않은가. 지금 당장은 아랑곳 하지 않고 맡은 바 책무를 다할 것이다. (7월29일 제주 서귀포 하계 세미나)”

손길승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의 거취 표명은 고해 성사처럼 결연했다. 손 회장은 SK글로벌 분식 회계 사건에 대해 7월 30일 열릴 예정이었던 사법부의 항소심 1차 공판을 하루 앞두고 제주 서귀포에서 열린 전경련 주최 하계 포럼에 참석, 자신의 거취 문제를 묻는 질문에 일단 ‘스톱(stop)’ 아닌 ‘고(go)’의 소신을 밝혔다.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는 단호한 기세로 좌중을 압도했다.

다음날 새벽. 제주도에서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돌아온 손 회장은 서울고법 형사 6부 심리로 열린 항소심 첫 공판에 나섰다. 그는 “깊은 반성과 함께 난국을 해결하기 위해 최태원 회장의 복귀가 그룹에 절실하다”고 간청했다. 이날 공판은 뚜렷한 결론 없이 1시간 만에 끝났다.


"무슨 욕심 있겠나"

손 회장은 정치권과 재계 일각으로부터 “약점이 있는 사람이 어떻게 전경련 회장직을 유지하느냐”는 비난을 받는 등 ‘조기 퇴진론’까지 거론되면서 거취 문제를 놓고 장고(長考)를 거듭해 왔다. 노무현 대통령의 방중 수행 기업인 명단에서 제외되고 재정경제부 주최로 열린 한 국제회의에서 재계대표로 연설할 예정이었다 갑자기 교체되는 굴욕을 그는 겪어야 했다.

그 스스로가 “이미 두 차례나 회장단에게 사의표명을 했으나 그 때마다 반려됐다”고 토로하듯 회장직 직무수행에 큰 부담감을 갖고 있는 터다. “회장직을 맡으면서 이미 나를 버렸다”는 그는 “정부에다 대고 쓴 소리를 해야 하고, ‘왜 물러나지 않느냐’고 비판을 받는 전경련 회장직에 무슨 욕심이 있겠느냐”고 반문할 정도다.

그러나 손 회장은 스스로 물러날 때를 알고 있다고 강조했다. 다만 지금은 ‘그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올 초 회장 취임 당시 목표로 했던 ‘반(反) 기업 정서 해소‘와 ‘노블리스 오블리제(지도층의 도덕적 의무감) 정착’에 대한 구상이 만들어지면 자신의 임무가 끝날 것이라며 ‘그 때’ 를 암시했다. 손 회장이 ‘그 때’를 기다리며 추진하려는 회장으로서의 ‘오블리제’란 과연 무엇일까..

바로 ‘반 기업 정서’를 해소하고 재계를 대표하는 전경련의 위상을 회복하는 전반적인 이미지 업 작업이다. 이는 따지고 보면 재벌 대표 집단을 바라보는 일부 개혁 세력들의 따가운 시선에 대해 보다 공고하고 견실하게 보호막을 세워야 한다는 내부적 위기감의 표현이기도 하다.

현재 외국의 유수 컨설팅 업체를 선정해 추진중인 이 프로젝트는 전경련이 국민으로부터 사랑 받기 위해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 지에 대한 자체 점검 프로그램이다. 일례로 전경련 회장직과 관련해서는 기업이 크냐 적으냐, 오너가 있느냐 없느냐 등의 기준에서 어느쪽이 바람직한 지 선택의 문제를 놓고 각종 변수와 대외 인지도 등을 고려한 컨설팅을 의뢰한 상태다.

참여 정부 출범 이후 전경련은 최근의 경기 침체와 파업 사태를 계기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 시점에서는 ‘재벌의 주구’라는 의혹을 떨쳐 버리고 한국 경제라는 큰 흐름을 이끌어 가는 주도적 리더로서 이미지를 개선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한 상황이라는 점을 고려한 선택이다.

이는 손 회장이 제주 서귀포 하계 포럼에서 열변을 토하며 “한국 경제를 살리기 위해 기업이 나서 국민과 대화하는 대 국민 토론회를 열자”고 제안한 것과 같은 맥락 속에서 파악된다. 이 같은 노선 변화는 내년 총선에서 386세대들을 중심으로 한 집권 여당이 승리할 경우, 재벌 개혁에 대한 칼날은 한층 날카로워질 것이라는 점을 의식한 사전 방어 작업이기도 하다.

사실 전경련 내부 상황으로 눈을 돌리면 손 회장의 ‘오블리제’는 첩첩 산중이다. 최근 들어 전경련 내부의 균열이 심각하기 때문이다.


내부균열?드러나며 곤혹

일부 회원사들은 거리낌 없이 “전경련이 재계를 대표하는 집단으로 재계의 전체 입장을 대변해야 하는 상황인데도 특정 업체만을 두둔하고 그 이해 관계만을 고려한 정책을 제안하는 것은 너무한 것 아니냐”며 볼멘 목소리를 터뜨린다. 또 일부에서는 노조에 유리한 주5일 근무제와 집단 소송제가 추진되는 분위기에 반발, ‘전경련 무용(無用)론’ 마저 제기되고 있다.

손 회장은 이 같은 내부균열을 과연 어떻게 수습하고 균형감각을 세워야 할지 목하 고민중이다. 올들어 전경련의 조직 파워가 그 어느 때보다 삼성 색깔이 강해지고 전경련 내부 행정방향이 일부 삼성쪽에 유리하게 기울면서 타 회원사들과 갈등이 증폭되자 ‘손발이 삼성맨’ 인 손 회장으로서는 난감한 입장일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현명관 전경련 부회장의 경우 이건희 회장의 비서실장을 지냈고 삼성저팬 회장과 신라호텔 사장을 역임했으며, 전경련 실무를 총괄하며 전략사업단 단장을 맡고 있는 이규황 전무는 삼성경제연구소 부사장을 지낸 전형적 ‘삼성 맨’.

특히 올 초 손 회장이 전경련 회장으로 마음을 굳히기 앞서 이건희 회장으로부터 직접 전화를 받고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 받은 터라, 손 회장으로서는 전경련을 이끌어가면서 삼성이 심적으로 큰 방패막이인 셈이다.

따라서 전경련의 무게 중심이 삼성쪽으로, 즉 ‘팔이 안으로 굽는’ 결과를 초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쉽게 오해를 살 수 있는 법. 최근 전경련이 주관하는 태평양경제협의회(PBEC) 서울총회 장소 문제를 놓고 벌어진 롯데와의 갈등도 ‘팔이 안으로 굽는’ 오해를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이 행사는 당초 5월 서울 롯데호텔에서 열릴 예정이었지만 중증 급성 호흡기 증후군(SARSㆍ사스) 때문에 8월 22~26일로 연기되는 과정에서 돌연 호텔신라로 장소가 바뀌었다. 호텔신라 사장 출신인 현 부회장의 입김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무성했고 롯데측은 전경련에 거세게 항의했다. 전경련이 적극 해명에 나서 겨우 무마됐지만 그 앙금은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다.

삼성측으로 ‘팔이 굽는’ 사례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전경련은 7월초 “국내기업이 외자기업에 비해 역 차별을 받고 있다”며 정부에 시정을 요구하는 제안서를 제출했다. 전경련은 보도자료에서 “국내 S사는 1999년부터 4년간 법인세로 약 4.9조원을 납부했으나, 외국인투자기업인 L사는 7년간 조세감면 혜택을 받았다”며 역차별 사례로 삼성전자와 LG필립스를 지목했다.

일부 언론은 “LG는 되고 삼성은 안 된다”는 식으로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LG측은 전경련 사무국쪽에 강력히 반발하는 촌극을 벌였다. 특히 전경련의 ‘역차별’ 시정 요구는 4월 “외자 유치를 위해 조세감면 등 외자 기업에 대한 인센티브를 강화해야 한다”는 이전 주장을 뒤집어 LG측을 자극했다.

전경련에 대한 LG측의 불만은 구본무 LG회장이 “우리 회사 임원 중에는 왜 전경련 회비를 내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고 노골적으로 비난하면서 표면화됐다.

실제로 LG는 손길승-현명관 체제가 출범한 다음달인 2월부터 지금까지 전경련 회비를 내지 않고 연체돼 있는 상황. 재계 관계자는 “전경련 부회장 선임 당시 LG측의 의견이 전혀 반영되지 않은 것 등 전경련과의 갈등은 쉽게 해소되지 않을 부분”이라고 귀띔했다. 따라서 손 회장으로서는 일부 전경련 회원들이 ‘탈퇴’라는 극약 처방을 고려할 만큼 불편한 심기를 다독여 줘야 하는 심적 부담을 안고 있다.


"적임자 나올때까지 소임 다할 것"

부당 내부 거래 및 분식 회계 등의 혐의로 징역 4년에 집행유예 4년을 각각 선고 받은 그로서는 최종 판결이 나기까지 최소 1~2개월 혹은 5~6개월이 남은 상태다. 그는 “지금 회장단에서 가장 적임자가 누구인지 생각하고 있을 것이며, 그런 적임자가 나올 때까지는 내 역할을 다 할 것”이라고 말했다. 어떠한 상황이든 ‘그 때’까지는 손 회장이 전경련을 이끌어가야 하는 입장이다.

정치적인 외풍과 내부 균열로 휘청거리는 전경련. 훗날 손 회장의 ‘오블리제’는 과연 어떤 평가를 받을 수 있을 지 주목된다.

장학만기자


장학만기자 local@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