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빈자리엔 공포로 가득

[영화되돌리기] 검은 물 밑에서

엄마의 빈자리엔 공포로 가득

‘낮잠에서 깨어보니 아무도 안 보인다. 눈을 비비고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니 집안 식구들이 앉아있는데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다. 갑자기 무서워져 울음이 터져 나온다.’ 김현성의‘추억에서’라는 시의 대략의 내용이다. 시의 한 구절을 옮겨보자.

‘갑자기 두려움과 설움에 젖어 뿌우연 전등만 지켜보다 울음을 터뜨린다. 어머니, 어머니.’ 풋잠에서 깨어나 엄마를 외치는 아이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아이가 바로 자신이었음을 문득 깨닫게 된다. 어린 시절, 엄마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상상은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혔다.

영화 <검은 물 밑에서>는 이러한 모성의 부재를 그리고 있다. (영화는 <링>으로 유명한 나카타 히데오 감독의 작품이다.) 비가 쏟아지는 날, 유치원이 파하고 엄마를 기다리는 소녀(마츠바라 요시미).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엄마는 오지 않는다. 일찌감치 외로움과 고독을 경험한 이 소녀가 성인이 돼 한 아이의 엄마가 됐다. 이혼은 했지만 아이 양육권 문제로 전남편과 법정 소송 중인 요시미는 비에 젖은 콘크리트 냄새가 음습하게 풍기는 한 아파트로 이사를 온다.

하지만 이사 첫날부터 안방 천장에서는 물이 새고 엘리베이터와 옥상에서는 낯선 소녀의 환영이 보인다. 그리고 끈덕지게 눈에 띄는 누군가의 빨간 가방. 불길한 징조에 몸서리치는 요시미는 이 모든 현상이 양육권을 주장하려는 전 남편의 소행이라고 여긴다. 그런 가운데 물이 새는 것을 참다 못한 요시미는 윗집을 찾아가고 그 집에 한 여자아이가 살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아이는 2년 전 실종된 미츠코. 아파트를 떠도는 환영이 미츠코의 원혼임이 드러나면서 영화의 공포는 실체를 갖게 된다.

공포영화는 흔히 적대적인 존재의 기습적인 등장(스크림의 까만 복면을 쓴 범인), 낯선 대상의 배회(식스 센스의 유령)를 통해 두려움을 주기 마련이다.

이 영화에서도 검은 물에서 저돌적으로 튀어나오는 손이나 아파트를 배회하는 원혼의 모습이 관객을 섬뜩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단순히 무서운 존재가 불러일으키는 공포를 그리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보다 근원적인 두려움은 무엇의 존재가 아니라 무엇의 부재라고 영화는 말하고 있다. 부재의 주체는 바로 어머니다.

죽은 미츠코가 ‘엄마 없음’을 발견하는 날은 비가 오는 날이다.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온 미츠코는 아파트 옥상에서 놀다가 그만 물탱크에 빠져 죽는다. 동그랗고 물이 가득 찬 물탱크는 엄마의 자궁처럼 안락한 공간이었는지도 모른다. 생명체의 근원인 바다가 어머니의 자궁과 동일시되듯이 삭막한 아스팔트의 공간에서 물탱크는 아이가 찾은 인공의 바다인 셈이다.

하지만 그 곳에도 역시 엄마는 없다. 결국 아이의 원혼은 끊임없이 엄마를 찾아 헤매게 되고 생명의 근원이자 생명을 질식케한 물은 공포가 된다. 고여있는 죽은 물,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물, 천장에 배어드는 암종같은 물, 무언가를 뱉어내는 탁한 물, 문틈에서 새어 나오는 폭풍전야의 물까지 영화 내내 물은 다양한 공포를 만들어낸다.

영화에는 소름 돋는 공포와 함께 동양의 정한(情恨)적인 정조가 묻어난다. 엄마가 항상 그 곳에서 나를 보호해주고 있다는 딸의 쓸쓸한 독백과 언제나 딸 아이 곁에 있어 주겠다는 요시미의 평범한 바람이 무척 절실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우리 사회 곳곳에서 엄마의 부재가 감지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정선영 자유기고가


정선영 자유기고가 startvideo@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