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식 문화 읽기] 죽음의 이유가 되는 것들

4월 1일 인터넷 뉴스그룹을 장식했던 헤드카피는 “홍콩 영화배우 장국영 투신자살”이었다. 처음에는 어느 짓궂은 네티즌의 장난일 거라고 생각했다. 만우절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분명한 사실로 밝혀졌고, 하루 종일 왠지 모를 심란함에 젖어 있었던 기억이다. 자살이란 합리적인 추론만으로는 그 동기를 완전하게 설명할 수 없는 복합적인 사건이라는 것을 새삼 일깨워주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장국영의 자살이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자살 신드롬의 문화적 기원은 아니다. 하지만 자살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예민하게 만들었던 상징적인 사건 가운데 하나였던 것만큼은 분명하다.

최근 언론과 방송을 통해서 자살에 대한 보도가 이어지고 있다. 지방의 초등학교 교장이 자살을 했고, 카드 빚에 고민하던 30대 남자가 목을 매었고, 군대에서 성추행으로 고통을 당한 병사가 아파트에서 몸을 던졌으며, 생활고에 시달리던 어느 어머니는 두 자녀를 살해하고 목숨을 끊었다.

성형수술 실패에 괴로워하던 50대 여성이 자살을 했고, 취업하지 못하는 처지를 비관하던 20대의 젊은이가 극약을 마셨으며, 국민연금관리공단의 차장급 직원이 제도의 모순과 개인의 양심 사이에서 번민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런가 하면 자살하기 위한 비용을 마련하려고 강도 행각을 벌인 20대 남자가 검찰에 검거되기도 했다.

충격적이게도 8월4일에는 현대아산 정몽헌 회장이 자신의 집무실에서 3통의 유서를 남기고 몸을 던졌다. 충격과 애도 속에 정 회장의 장례를 거행하는 동안에도, 자살에 대한 보도는 계속 이어졌다. 정 회장의 투신자살에 충격을 받은 80대 실향민이 독극물을 마셨고, 다이어트 실패로 건강이 악화되어 우울증에 빠진 20대 여성이 자살을 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무엇이 그들을 죽음이라는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았던 것일까. 어쩌면 우리는 자살을 요구하는 사회를 살아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걷잡을 수 없는 상념들이 혼란스럽게 스쳐 지나간다. 하루 평균 36명이 자살을 한다는 경찰청의 통계는, 우리를 더욱 우울하게 한다.

인간은 여러 가지 이유로 자살한다. 마르탱 모네스티에의 ‘자살’에 따르면, 자살의 원인은 사랑, 부끄러움, 중상모략, 불명예, 이타적인 희생, 명령, 신념, 정치적 위기, 빈곤과 파산, 정신 질환, 부당한 대우, 미신과 주술 등이다. 쉽게 말해서 삶의 모든 관념과 행위가 죽음의 이유가 될 수 있는 셈이다. 크게는 신념과 가치를 증명하는 자살과, 상실이나 우울의 귀결로서의 자살로 나누어볼 수 있을 것이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자살의 대표적인 징후는 우울증이다. 우울증은 사랑하는 대상과의 돌이킬 수 없는 단절로부터 생겨난다. 삶의 가치를 회복하거나 추구하는 일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고 느낄 때, 인간은 개체 보존의 의지를 버리고 자신의 자유 의지를 죽음과 결합함으로써 삶의 우울을 망각하고자 한다.

죽음을 결심한 사람에게 자살은 지극히 개인적인 선택이다. 하지만 자살은 사회적인 타살이라는 근원적인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다.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이 많을 때, 해당 사회는 특정한 신념과 가치를 지향하고 있거나 집단적 우울과 같은 심각한 위기에 빠져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어떨까. 문화비평가 김종휘는 최근에 자살한 사람들의 유서의 분량이 짧고 자기 탓을 한다는 공통점을 지적한다.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자살들은 신념의 표현이라기보다는 헤어날 수 없는 우울의 자기 도덕적인 표현에 가까운 것이다.

미셸 푸코의 지적처럼 자살은 ‘상상할 수 있는 최후의 방법’이다. 자살이 전면화한다는 것은 다른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는 길들이 사회 내부적으로 폐쇄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사회가 막다른 골목일 수밖에 없을 때, 그것처럼 우울한 일이 또 있을까. 막다른 골목의 우울이 사람들을 자살로 이끌었다면, 살아 있는 사람들은 그 막다른 골목의 우울을 살아간다. 따라서 우울은 죽은 자와 살아 있는 자 모두의 것이 된다. 자살이 단발적인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자살 감염 내지는 자살 신드롬으로 이어지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전문가들은 자살에도 문화적인 요인, 달리 말하면 모방과 유행의 측면이 있다고 지적한다. 타당한 지적이다. 하지만 적어도 자살만큼은 문화 현상으로 자리잡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삶의 고유성과 죽음의 숭고함에 대한 세심한 배려를 회복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절이다.

김동식 문화평론가


김동식 문화평론가 tympan@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