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특구] 돈과 향락이 흐르는 땅, 별천지

장대비가 퍼부었다. 휴가가 절정에 올랐던 8월 6일, 대한민국 최고의 동네라는 ‘강남 특구’는 궂은 날씨와 휴가 탓인지 거리가 한산하다. ‘유동 인구가 없는데 제 아무리 강남인들 장사가 되겠어?’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가는 순간, 청담동의 한 명품 매장에서 작은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계산이 잘못 됐어요.” 한 점원이 매장을 나가는 고객을 향해 다급하게 소리친다. 다른 가격표를 보고 계산을 잘못 했다고 양해를 구한다. “90만원이나 차이가 나요”하며 두툼한 현금 뭉치를 내민다.

“언니, 수표 없어요?”조금 짜증난 듯한 목소리로 돈을 받아 드는 20대 초반 아가씨. 가방이랑 니트랑 한꺼번에 값을 치르느라 자신도 계산이 틀린 줄 몰랐단다. 가방 177만원, 니트 179만원. 헌데 둘을 합친 356만원보다 90만원이나 더 많은 446만원을 카드로 긁었다.

돌려 받은 돈을 가방에 넣으며 대수롭지 않다는 말투로 혼잣말을 한다. “돈 벌었네.” 이어 “주문한 목걸이와 귀걸이가 들어오면 전화하라”고 점원에게 당부까지 하고 매장 밖으로 나간다.

청담동의 또 다른 명품매장. 30대 초반 미시족 아주머니가 빨간색 민소매 원피스를 이리저리 거울에 비춰본다. “이거 괜찮지, 여기 좀 줄여줘. 그리고 왜 그 가방 미리 연락 안 했어?” 매장 직원은 난처하다는 표정으로 고객의 의사를 거듭 묻는다. “(가방은) 예약이 밀려 있어 구하기 어려워요. 대기자 명단에 올려 놓을까요?” 요즘 강남 명품족 사이에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다는 M라인 가방(200만 원대)은 품절 상태다.


인지도 높은 명품으로 고객 유혹

‘강남은 불황을 모른다’는 속설이 아직도 여전할까? 우리 사회 전체에 불황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지만, 강남은 역시 불황을 모르는 ‘강남특구’였다.

올 상반기 매년 10%씩 성장했던 국내 주요 백화점의 성장률이 지난해 동기보다 1.5~5% 감소했다. 그러나 강남 최고 상권의 중심인 갤러리아 백화점 명품관은 소폭이나마 0.1% 상승을 기록했다. 불과 0.1%라는 미미한 수치. 그러나 내수 부진을 감안하면 상당한 성과다. 업계 관계자들은 “경기 나쁘다고 돈 있는 사람들이 살 것 안 사겠느냐”고 입을 모은다.

이 백화점은 가을 개편을 앞두고 유행에 민감한 소비 계층을 확보할 수 있는 영 캐주얼 매장을 가격대가 높은 해외 프리미엄급 브랜드 중심으로 재구성할 방침을 세웠다. 가격이 브랜드의 품질을 대변한다고 믿는 경향이 지배적이고, 불황일수록 인지도가 높은 해외 브랜드가 강남 고객들의 지갑을 여는 데 유리한 까닭이다.

물론 경기 침체로 인한 불안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 백화점 명품관 의류팀장 박주범씨는 “VIP 고객들 사이에 소득이 줄지는 않았지만 ‘내가 이렇게 쓰다가…’라는 불안 심리가 번지고 있다”며 “매장 방문 횟수나 1회 구매 금액을 낮추는 고객도 상당하다”고 점차 달라지는 분위기를 전했다.

그러나 아직도 단골고객이 느끼는 불황체감 지수는 미미한 수준. 9월 결혼을 앞둔 원혜준(28)씨는 “1년 전 개인 사정으로 다니던 금융회사를 그만뒀지만 용돈을 받기 때문에 특별히 생활이 달라진 건 없다”며 “사상 최대의 불황이라고 떠들지만 이를 느끼지 못하는 친구도 꽤 있다”고 말했다.

가방과 선글라스 수선을 맡기러 왔다는 송모(26)씨도 비슷하다. “남들이 어렵다고 하니까 소비를 조금 자제하는 거지, 뭐, 불황을 직접 느끼진 못해요.” 그녀는 휴가 때 동남아로 가 쇼핑을 충분히 즐긴 뒤였다. 남자친구 김모(32)씨 역시 “지난해 잠실에서 운영하던 예식장을 정리하고 부동산에 조금 손을 대고 있다. 재미를 보는 건 아니지만 손해를 보지도 않는 수준”이라며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중저가 취급업소는 불황에 울상

같은 강남 지역이라 해도 불황을 느끼는 정도는 업종이나 사업 규모에 따라 큰 차이가 난다. ‘부익부 빈인빅’의 원리는 강남특구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셈이다. 영세업체나 중저가 상품을 취급하는 업체는 불경기의 직격탄을 피해가지 못하고 있다.

청담동 명품거리의 끝자락에 위치한 구멍가게 ‘정’. 50대 주인 아저씨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하다. “장사가 안 돼도 한참 안 돼. 매출이 IMF때 보다도 절반이나 뚝 떨어졌어. 여기 뿐만이 아니야. 이 근방에 물건을 대는 도매상들 얘기가 다른 가게도 다 마찬가지래.”

압구정동 로데오 거리 입구에 위치한 소규모 명품 멀티숍 ‘b4’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50% sale’이란 안내 문구가 우선 눈에 띈다. 이 매장 점원은 “성수기로 꼽히는 1~5월이 지난 데다 휴가철이 겹치는 바람에 매장을 찾는 손님이 크게 줄었다. 손님 한 명이 전부였던 날도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아예 손님 끌기를 포기한 듯 “그냥 하루종일 길만 바라보고 있다”고 했다.

주머니가 비교적 가벼운 젊은 층의 발길이 잦던 맞은편 패스트푸드점 ‘롯데리아’도 활기를 잃은 지 오래다. 100석이 넘는 규모지만 자리가 찬 곳은 겨우 10여석. 입구엔 5,000원 이상 구매 고객에게는 근처 주차장 30분 무료 이용권을 제공한다는 홍보 전단까지 내걸렸지만 반응은 영 신통치 않다.

매장 매니저는 “요즘 어떠냐”는 질문에 이내 심각한 표정을 짓는다. “정말 안 돼요. 한달 뒤에 폐점 한다고 본사서 연락이 왔었다면 대충 감 잡히겠죠?”라고 한숨을 짓는다.

반면, 고급화ㆍ대형화를 겨냥한 상점들은 선전 중이다. 같은 시각 청담동의 가구점 ‘Kosney at home’. 언뜻 보기에도 고풍스러움이 물씬 풍기는 게 고급 가구점이다. 2m 폭 엔티끄 옷장에 붙어 있는 가격표는 490만원, 싱글 소파 290만원. 이들의 가격표 옆엔 “예약된 상품입니다”라는 표시가 나란히 붙여져 있다.

“고급품들은 특정 취향의 손님들이 찾는 품목이라 경기를 잘 타지 않아요. 변함없이 잘 나가죠.” 점장은 “고급품의 상당수가 출고를 앞둔, 주인이 예약된 상품”이라고 했다.

청담동 고급 카페 거리도 불황과는 거리가 멀다. 카페 ‘Cafe-t’은 대로변이 아닌, 한적한 골목길에 자리잡고 있지만, 독특하고 고급스런 인테리어로 치장한 탓인지 고객들로 넘쳐 나고 있었다.

입구에서 만난 주차관리 요원 김병철(24)씨는 “까페 전용 주차장을 이용하는 차량이 하루 최소 120대에 이른다”며 “외제차가 주종을 이루고, 국산이라 하더라도 SM5 이상”이라고 귀띔했다. 카페 안으로 들어섰더니 한 여점원은 “10분 정도 기다리셔야 한다”는 말로 인사말을 대신한다.

이 곳에는 10여 개의 좌석이 놓인 대기실이 따로 마련돼 있을 정도로 손님들로 북적인다. “(장사가) 잘 된다”는 말로 운을 뗀 매니저 심현희(32)씨는 “분위기 좋고, 주차료로 받지 않는 차별화된 전략으로 불황을 타개하고 있다”고 했다. 인근의 이탈리안 P레스토랑 지배인 신모 씨도 “정통 이태리 음식과 손님이 직접 재료를 고르는 독특한 마케팅 덕에 5년째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고 자랑했다.


'품격' 중시하는 강남 사람들

갤러리아 백화점 맞은편에서 부동산 일을 보는 황모 실장도 ‘강남 특구’가 여전히 ‘불황 무풍지대’임을 확인시켜 줬다. “이 동네 부동산은 가격이 오르면 올랐지, 떨어진 건 없어요.”

‘강남 특구’에는 분명 별천지가 존재했다. ‘가격’보다 ‘품격’을 중시하는 ‘별나라’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청담동에서 만난 한 여대생은 ‘가격=상품 가치= 품격’이라고 믿는 강남 사람들의 뿌리 깊은 의식의 한 단면을 보여줬다.

그녀의 손에는 L브랜드 명품 가방과 “세계 3대 장수촌 마을과 인접해 있는 해발 1,500m 고지대에서 채취했다”는 에콰도르산 B생수가 들려 있다. B생수는 국내 생수보다 3~4배 비싼 가격에 거래되는 제품이다. “가격이 다소 비싼데 어떤 점이 좋은가”라고 묻자 그녀는 “기분이 다르다”며 “뭔가 히스토리(history)가 느껴지는 것이 남들과 다르다는 자부심을 고조시킨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강남의 사치성 문화에 대한 따가운 눈총을 경계하는 듯 말을 잇는다. “솔직히 부모 잘 만난 덕을 보고 있지만, 강남 사람이라고 호화소비 중독자로 몰아붙이는 시선엔 가슴이 아파요.” 청담동 카페 거리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 뒤로 명품관 네온 사인이 화려함을 뿜내고 있었다.

배현정 기자


배현정 기자 hjba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