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LP여행] 엄인호(上)

80년대 언더 그라운드 음악의 기수에서 한국 블루스 밴드의 지존이 된 신촌블루스. 고 김현식, 한영애의 절규하는 목소리로 대중에게 친숙한 엄인호 작곡의 '골목길'은 신촌블루스의 대표 곡으로 폭넓은 사랑을 받고 있다. 86년 신촌의 작은 카페에서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자체 공연을 열면서 출발한 신촌블루스.

이곳을 거쳐 간 이정선, 김현식, 박인수, 한영애, 이광조 등은 명실상부한 한국 대표급 가수들. 17년 간 수많은 풍상을 거치면서도 시작부터 지금까지 늘 그 자리를 지켜 온 단 한 사람은 현재의 리더 엄인호다. 그는 '가수 엄인호'보다 '신촌블루스의 엄인호'로 더욱 빛을 발하는 신촌블루스의 살아있는 역사이다.

엄인호는 일본으로 음악 유학을 다녀왔던 부친 엄염석씨와 모친 이정숙씨의 4남 1녀 중 넷째로 1952년 11월 26일 경남 마산에서 태어났다. 해방 후 미군 부대 클럽에서 색소폰 연주자로 활동했던 부친 탓에 그의 집안엔 밴드들의 음악 연습 소리가 그치질 않았다.

이에 둘째 형 엄인국은 고교 졸업 후 미 8군 무대 드러머로 나섰고 중학 때부터 밴드 부원이었던 셋째 형 엄인환은 일반 무대에서 색소폰 연주자로 활동했다. 피난 중에 마산에서 태어난 그는 수복 후 서울 종로 창신동으로 올라와 성장했다. 어릴 적 별명이 '샛님'인 그는 여성스러우리 만치 소심하고 내성적이었지만 서울 시내의 어린이 찬송 대회를 휩쓸 만큼 노래 잘하는 아이였다.

창신초등학교에 입학하자 부친이 간 경화로 돌아가시고 그 충격으로 어머니마저 심장 마비로 세상을 등지는 아픔을 겪었다. 이때의 슬픔은 그의 블루스 음악 인생에 원초적인 한의 정서를 안겼는지도 모른다. '누가누가 잘하나'라는 음악 프로그램에 학교 대표로 참가해 입상을 하자 KBS합창단의 스카웃 제의가 들어 와 남산 KBS에서 독창 발표회를 갖기도 했다.

이대부중에 진학하며 신촌 쪽으로 학교를 다녔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친척집에 얹혀 살던 그는 집안 문제와 진로 문제로 사춘기의 열병을 심하게 앓으며 점차 염세적으로 변해갔다.

고2 때는 고민이 많아 술과 함께 약을 먹고 혜화동에서 교통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이후 목 수술을 받아 맑은 목소리가 탁하게 변했다. 당시 그의 방황을 잡아준 것은 음악이었다. 아카데미, 미도파 뮤직 살롱 같은 곳에서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그러다 친구들과 3인조 밴드 'Revolution'을 결성했다. 학원비를 빼돌려 종로의 세기음악학원에 등록했지만 음악 수준이 시시해 외국 음반을 들으며 독학으로 기타를 배웠다. 당시 즐겨 들었던 음악은 흑인 소울과 CCR, 아이언 버터플라이 등 사이키델릭한 록 음악이었다. 신중현도 좋아했다.

음악에만 매달리자 집안의 반대는 대단했다. 이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74년 가출을 해 왜관, 파주, 송탄 등 미 8군 무대도 돌아다녔지만 몇 개월만에 그만두었다. 이후 부산과 진주 등지의 음악 다방을 옮겨 다니며 DJ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부산의 유명 DJ 홍수진은 큰 영향을 준 DJ. 1975년 부산에서 대마초 단속하면 울산, 진주로 도망가 그곳에서 숨어서 DJ를 할 만큼 그는 자유분방한 생활에 빠져들어 있었다.

그가 밥 딜런, 존 바에즈, 아를로 거스리 등의 포크 음악을 접했던 것도 DJ 시절이다.

"당시 우리나라는 포크가 아니고 팝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생각했던 포크는 가사에 상당한 음악적 완성도를 갖고 있는 음악이었다. 당시 나는 히피즘에 젖어있었기에, 밥 딜런의 가사에 심취해 있었다." 부산의 통기타 라이브 살롱 '작은 새'에서 DJ로 일하던 1978년 어느 날, 텅 빈 홀에서 술이 취해 혼자 기타를 치고 있는 모습을 본 살롱 사장은 깜짝 놀라 연예부장으로 승진시켜 주었다.

그는 "기타 치는 걸 숨기고 DJ로만 생활했기 때문에 아무도 내가 기타를 치는 줄 몰랐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후 양병집씨 등 포크 가수들과 서울 공연을 했다. 이정선과는 그렇게 만나 인연을 맺었다.

신촌에서 알게된 김영배를 통해 명동 해바라기 홀에 찾아가 김의철의 음악을 들었다. 하지만 음악 스타일과 취향이 잘 맞았던 김영배, 김추자 등과 어울렸다. 김영배와는 75년쯤부터 'OX' 카페에서 즉석에서 통기타로 사이키델릭등 진보적인 음악을 일년정도 듀엣으로 연주하기도 했?

당시는 방랑의 시절. 부산에서 DJ를 하다 음악 친구 박동률과 대전에서 원치 않던 밤무대 활동을 하다 서울로 올라가 신촌의 츄바스코, OX살롱 등에 머무르다 지겨우면 다시 부산으로 내려가는 떠돌이 생활을 했다. 1977년 부산 DJ 시절, 사귀던 한 여자에게 프로포즈를 했지만 퇴짜를 맞아 울적한 기분을 달래기 위해 통기타로 곡을 쓰기 시작했다. 대표 곡 "골목길"은 그 여자와 데이트하던 시절에 탄생된 곡이다.

엄인호는 79년 트리오 '풍선'으로 정식 데뷔를 했다. 서판석의 기획으로 결성된 '풍선 & 이정선'은 한 장의 음반 <너무나 속상해-대한음반제작소>을 발표했다. 활동을 중단한 대학가요제 수상 팀 서울대 트리오의 대타성으로 결성된지라 오래가지는 못했다. 풍선은 원래 이광조와 듀엣을 염두에 두었지만 상업성을 염두에 둔 기획자의 의도로 이정선도 가세했다. 엄인호는 풍선 때의 음악에 별 의미를 두지 않지만, 그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는 계기였다.

최규성 가요 칼럼니스트


최규성 가요 칼럼니스트 kschoi@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