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 눈] 더이상 '바보 노무현'은 안된다

‘허걱! ㅠ ’이라는 아이티콘이 한때 인터넷에 돌아다녔다. 헉! 하고 놀라는 감정을 강렬하게, 또 재치 있게 표현한 것인데, 노무현 대통령이 자신의 부동산 투기 의혹을 제기한 한나라당 김문수 의원과 이를 보도한 한국 동아 중앙 조선일보에 대해 30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는 소식에 엉뚱하게도 이 아이티콘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12ㆍ19 대선에서 ‘노짱’을 외치던 인터넷 세대도 느닷없이 터져 나온 30억원 소송건에 이 아이티콘을 사용해 찬반을 다툴 것 같아서다.

언론계 주변에서는 일단 “해도 너무 한다”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소송 대상자가 후배 기자, 동료, 선배라서가 아니다. 노 대통령이 취임 때부터 권력과 언론간의 건전한 긴장관계를 강조하면서도 그 근간이 되는 권력의 숙명과 언론의 존재가치에 대해 너무 이해가 모자라기 때문이다.

권력은 그 앞에 고개를 숙이지 않는 세력(집단)에 대해 응징하고픈 유혹을 느낀다. 그래서 끊임없이 감시하고 견제하지 않으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게 되고, 그 과정에서 부정부패가 싹튼다는 게 역사의 교훈이다. 언론의 존재가치 중 하나가 이렇게 위험한 권력을 견제하는 데 있다.

그러다 보니 권력은 늘 언론에 불만스럽다. 성숙한 민주사회의 표상인 미국의 권력(백악관)도 예외는 아니다.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이 백악관 여주인 시절 언론에 대해 얼마나 적의를 품었는지 그의 자서전 ‘살아있는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다. 지난 호에 이어 ‘살아있는 역사’를 한번 더 펼쳐보자.

“빌(클린턴)은 나라를 위해 노심초사하고 있는데, 그가 한 일(화이트워터 투자)이 우리 가족과 친구들을 이런 고통과 굴욕에 빠뜨릴 만한 것인지 의심스러웠다.(중략) 나는 (고문 변호사인) 보브 (바넷)을 보면서 말했다, ‘이제 이런 일은 지긋지긋해요.’ 보브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대통령은 국민에 의해 뽑힌 자리입니다. 그러니 나라를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 이런 일쯤은 참고 견뎌야 합니다. 아무리 힘들게 느껴져도 꿋꿋이 버텨야 합니다.’”

언론이 시도 때도 없이 클린턴의 ‘화이트워터 사건’을 물고 늘어지자 힐러리가 백악관 생활 1년도 채 안돼 기어코 ‘지긋지긋하다’는 불만을 터뜨린다. 화이트워터 사건은 클린턴이 아칸소 주지사 시절 ‘매디슨 신용금고’를 운영하는 짐 맥두걸이란 친구의 권유로 화이트워터 지역에 투자를 했는데, 결과적으로 부동산 투기 의혹을 불러온 정치 스캔들이다.

이 사건에 관여하다 클린턴의 당선과 함께 백악관으로 들어온 변호사 친구 빈스 포스터는 5개월여만에 권총 자살하는 등 엄청난 파문이 일었다. 힐러리는 빈스의 자살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빈스는 여행국 사건(지난 호에 나온 ‘트레벌게이트’)으로 괴로워하고 있었다.(중략) 클린턴 행정부에 들어온 아칸소 출신 변호사들의 정직성과 능력을 싸잡아 공격한 악의적인 사설이 월스트리트저널(WSJ)에 실린 게 결정타였다.

93년 6월17일자 사설 ‘빈스 포스터는 누구인가’ 는 클린턴 행정부의 가장 ‘불온한’ 점이 법을 지키는데 소홀하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리는 백악관 역할에는 미숙했을지 모르나 거친 정치 세계에는 충분히 단련돼 있었다. 그러나 빈스는 그렇지 않았다.”

나중에 발견된 빈스의 유서에는 “WSJ의 논설위원들은 터무니 없이 거짓말 한다”고 적혀 있어 힐러리의 주장에는 근거가 있다. 법적ㆍ도덕적으로 책임을 느끼지 못하는 화이트워터 사건을 물고 늘어지는 언론 탓에 친구마저 자살했으니 클린턴 부부가 품었을 언론에 대한 감정은 능히 짐작 가능하다.

힐러리는 그 때마다 유능한 변호사의 조언을 듣고 대처했던 순간들을 자서전에 진솔하게 적었을 뿐 악의적이고 명예를 훼손한 보도라며 손해배상 소송을 내야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보브의 충고처럼 개인이 아닌 대통령이기에 감당해야 하는 숙명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앞뒤는 조금 다르지만 화이트워터 사건은 노 대통령의 부동산 투기 의혹과 유사하다. 그런데 보도에 대한 대응은 전혀 다르다. 노 대통령의 손해배상 소송은 그가 대통령이 아니라 아직도 ‘당선을 바라는’ 초선 정치인에 머물고 있다는 느낌을 안겨주기에 충분하다.

클린턴은 또 힐러리의 고백대로 “(언론의 비판으로) 가장 빠른 시간에 가장 많은 것을 배워” 94년 6월 비서실장을 비롯한 백악관 참모진을 친구에서 일 잘하는 사람들로 바꿨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이번 청와대 개편에서도 여전히 ‘자기 사람’만 끼고 돈다. 누가 뭐래도 제 갈 길만 가는 ‘바보 노무현’의 신화에서 깨어나지 못한 탓일까? 무엇보다 ‘바보 대통령’은 모두에게 불행을 안겨준다는 현실을 깨닫지 못한 결과다. 대통령이 바보가 돼서는 안된다.

이진희 부장


이진희 부장 jinh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