얽히고 설킨 110억원 행방, 후폭풍에 휩싸인 정가 초긴장

정치지형 바꿀 핵폭탄 ‘권폭부’

얽히고 설킨 110억원 행방, 후폭풍에 휩싸인 정가 초긴장

‘권부’(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의 애칭)의 구속은 서막에 불과하다. 이제부터 진짜 전쟁이 시작된다.

최근 정치권을 강타한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의 구속사건을 놓고 정가에 떠도는 말이다. 이번 사건의 후폭풍이 어디까지 어떻게 영향을 미칠 지 예단하기는 힘들어도 참여정부 출범이후 가장 중심 기압이 높은 초대형급 태풍이 될 것이란 점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먼저 검찰은 권 전 고문을 구속하면서 이례적으로 “준비가 많이 됐다”며 이번 현대 비자금 사건의 파고를 예고했다. 그간 수사에서 상당한 진술과 물증, 정황 증거 등을 확보하고 있다는 뜻이다.

검찰은 현대가 대북 사업 적자 폭이 커지면서 금강산 카지노 및 면세점 설치 등에 명운을 걸고 정치권에 전방위 로비를 편 것으로 보고 있다. 이미 검찰 주변에서는 여야 정치인 7~8명에 대한 이름이 심심찮게 거론되고 있다.

현대 관련 검찰의 수사망 외에도 또 다른 태풍이 멀찌감치서 슬슬 세를 형성하며 정치권으로 진입할 태세다. 권 전 고문이 직접 조성했다는 110억원의 행방이다. 권 전 고문은 가까운 지인들에게 2000년 총선을 위해 협조를 구해 민주당에 지원했다고 밝힌 바 있다. 검찰이 구속영장에서 밝힌 현대자금 200억원과는 다른 돈일 가능성이 있다.

110억원이든 200억원이든 두 금액을 합친 330억원이든 간에 상당 금액이 재계에서 권 전 고문을 통해 정치권으로 유입된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자칫 권 전 고문이 입을 열기라도 하면 현 정권의 최고 핵심 실세까지 자유로울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른다.

따라서 현대비자금 후폭풍이 무차별적으로 여야 정치권 전체를 강타하느냐, 동교동계를 중심으로 한 민주당 구 주류에 집중되느냐, 그간 권 전 고문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던 특정 정파에 초점이 맞춰지느냐만 남은 셈이다.


권 전 고문 다음은?

권 전 고문은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의 허위진술에 따른 검찰의 무리한 수사라며 시종일관 무죄를 항변하고 있다. 결국 법정에서 진실은 가려지게 됐지만 그전에 집고 넘어갈 일이 있다. 과연 현대가 그룹 전체의 존망이 걸린 사업을 놓고 권 전 고문에게만 비자금을 건넸을까 하는 점이다.

권 전 고문이 아무리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해도 원외 인사다. 현대가 입법과정에서 유리한 구도로 분위기를 이끌려면 대북 사업 관련 해당 상임위원회의 동의를 구해야 한다. 결국 검찰은 현대의 다각도적 전방위 로비가 이뤄졌을 것으로 보고 있다.

검찰은 여야 정치인 5~6명이 현대 측으로부터 상당 액의 자금을 받은 것으로 보고 이들을 조만간 소환해 대가성 여부에 따라 처벌할 방침이다. 이를 놓고 이미 일부 정치인들의 실명까지 거론되면서 출국금지까지 이뤄지는 상황이다.

여기에는 권 전 고문과 박지원 전 청와대 비서실장에 버금가는 거물급 정치인이 포함돼 있다는 소문마저 들린다. 아무래도 고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이 직접 나서서 로비를 벌일 만큼 다급한 상황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그 대상은 초ㆍ재선급 보다는 전체 상임위 여론을 좌우할 수 있는 다선 중진이나 여권 핵심 실세였을 것이란 추론이 가능하다.

검찰은 현대 비자금 200억원이 미국 체류중인 김영완씨를 통해 권 전 고문을 거쳐 정치권으로 들어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돈이 순수한 총선 지원금으로 쓰였다면 정치자금법 공소시효(3년)가 지나 돈을 받은 정치인을 처벌할 수 없다. 하지만 현대에 대한 지원 요청과 함께 전달됐다면 알선 수재나 뇌물 수수 등으로 처벌이 가능하다.

검찰은 상임위의 속기록 등을 면밀히 분석해 대가성을 입증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이밖에 현대 측이 건넨 돈이 총선 이후로 넘어갔다면 정치자금법으로도 공소 유지가 가능한 상태다.


'권노갑 리스트'의 주인공은 누구?

좁혀오는 검찰 수사망외에 정치권을 떨게 하는 것은 권 전 고문의 폭탄발언 여부이다. 권 전 고문은 110억원을 조성해 당에 지원했다고 밝혔고 검찰은 현대 측으로부터 200억원을 받았다고 맞서고 있다. 문제는 금액의 정확도보다는 그 돈이 누구의 손으로 들어갔느냐에 있다.

정치자금의 거래 속성상 은행을 통한 계좌이체 등은 생각할 수 없다. 현금으로 오고 갔을 것이므로 실재(實在)하는 증빙자료는 없다. 결국 권 전 고문의 진술에 의존하는 수 밖에 없다.

권 전 고문의 측근인 이훈평 의원은 “권 전 고문은 선거가 끝나기 5일전 평생 당원들로부터 100억원, 김영완씨로부터 10억원을 빌려 당에 입금시켰다”고 밝혔고, 당시 사무총장인 김옥두 의원은 “적법하게 입금돼 선거법에 따라 처리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당 회계보고서에는 차입금은 31억원으로 나타났고 권 전 고문의 진술도 “현대로부터 어떤 돈도 받지 않았다”에서 “김윤규 사장에게 후원금 13억원을 받았다”로 바뀌는 등 오락가락하고 있다. 정당회계가 100% 정확할 수 없다는 속성을 감안하더라도 상당액이 중간에서 사라졌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럴 경우 총선서 상대적으로 우세를 보이는 호남권보다는 민주당의 숙원인 동진(東進)정책을 위해 영남권 후보와 서울을 포함한 경기 강원 등 박빙의 혼전을 벌이는 수도권 후보들에게 암묵적으로 전해져 선거전에 사용됐을 것으로 추측된다. 민주당에 새 바람을 불러왔다는 평가를 받는 신 주류 및 386 세대들에게 초점이 모아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실제로 공개된 중앙당 총선자금 지원 내역에도 이들의 이름이 상위권에 올라 있다.

그러나 386 세대의 임종석 의원 등은 “선거직후 중앙선관위에 합법적으로 신고된 내역을 권 전 고문의 자금과 연계시키는 것은 부당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장영달 의원도 “당이 필요에 의해 민주화 운동 지도자들을 간청해 영입해 놓고 이제 와서 권 전 고문에게 돈이나 받아먹은 사람으로 몰아붙일 수 있느냐”며 소문의 진원지로 꼽히는 구 주류 측을 겨냥했다.

이들의 말은 맞다. 하지만 합법적으로 건너간 금액 외에 별도로 권 전 고문이나 다른 실세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았다면 이는 개혁신당을 외치는 이들에게는 엄청난 도덕적 상처로 작용할 수 밖에 없다. 이미 김근태 의원은 고해성사를 통해 법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양심적인 정치인으로 평가를 받았다.

고해성사 없는 상황에서 검찰 수사에 의해, 또 권 전 고문의 폭탄발언에 의해 공개된다면? 국민적 동정을 받고 있는 고 정몽헌 회장 자살사건의 한 원인으로도 대두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현 정권의 꼭대기에서 맨 아래까지 아무도 안심할 수 없는 ‘권부’의 돈 미스터리다.

염영남 기자


염영남 기자 libert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