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희생이 남긴 참 의술

[역사 속 여성이야기] 한국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

아름다운 희생이 남긴 참 의술

한국에 서양의학이 들어온 지 100여 년이 넘었다. 지금은 감기라도 걸리면 당연하게 가는 곳이 병원이지만 100여 년 전 만 하여도 양의사들은 민간 백성들에게 그다지 환영 받는 존재가 아니었다. 일반 백성들은 양의사들을 주사바늘과 칼을 휘두르며 사람을 잡는 도깨비쯤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한방이고 양방이고 아무런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허다했다. 여자들의 경우는 더욱 심했다. 아픈 부위를 의사에게 보이기는커녕 진맥조차 자유롭지 못했던 여성들은 병이 걸리면 무당의 굿 몇 번에 유명을 달리하곤 하였다. 그러한 시대에 여성환자들을 위해 살아간 한국 최초의 여자 의사가 있었다. 박에스더. 그녀는 많은 환자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몸을 혹사하다가 스스로의 명을 단축하고 만 봉사 정신에 투철한 참된 의사였다.


영어에 능통한 이화 학당의 여학생

박에스더(1877-1910)의 본명은 김점동이다. 그녀는 당시 한국에 나와 있던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의 집안일을 돕던 광산 김씨의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서양 선교사의 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만큼 김점동의 집은 비교적 일찌감치 서양 문물에 눈을 뜰 수 있었다.

김점동은 10세에 정동에 있던 이화학당에 네 번째 학생으로 입학한다. 당시 백성들은 서양인이 학교를 차려 아이들을 유괴해 간다는 소문을 믿고 특히 여자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않으려 했다. 선교사들이 일일이 집을 돌며 부모를 설득했다. 아펜젤러의 집에서 일하며 스스로도 조금은 개화 되었다고 생각하던 김점동의 아버지조차 처음에는 김점동의 이화 학당 입학을 반대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총명하고 영리했던 김점동은 우여곡절 끝에 이화학당에 입학 하게 되고 곧 이어 학업에서 두드러진 성과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특히 어학에 뛰어나 얼마 지나지 않아 영어를 능통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세례를 받고 이름을 에스더로 바꾼 뒤 자신의 어학 실력을 십분 발휘하여 한국인들과 서양 선교사들 사이에 의사 소통의 다리를 놓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닥터 로제타 셔우드 홀과의 만남

그즈음 김에스더는 자신의 운명을 결정짓는 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의료 선교활동을 위해 미국에서 날라 온 여의사 로제타 셔우드와의 만남이 그것이었다. 당시 이화학당 교장이던 스크랜톤은 로제타 셔우드가 의료 활동을 벌일 때 한국인과 의사소통을 원활히 할 수 있도록 통역사로 김에스더를 소개한다.

처음에는 의료나 약 등에는 관심없이 그저 통역사로서의 일만 충실히 하던 김에스더는 어느날 자신의 진로를 확실히 정하는 사건을 만난다. 로제타 셔우드가 언청이 수술을 흉터 없이 완벽히 해내는 것을 옆에서 지켜본 김에스더는 자신도 의술을 배워 고통받는 많은 사람들을 돕겠다고 결심하기에 이른 것이다.

로제타 셔우드 또한 김에스더의 이러한 결심을 환영하였다. 김에스더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의학에 관심을 가지고 로제타 셔우드의 일을 적극적으로 돕게 된다.


남편의 외조로 의사가 되다

나름대로 의료인으로 사회에 봉사할 것을 결심한 김에스더였지만, 100여년 전 한국 사회의 풍습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김에스더의 집은 결혼을 서둘렀고 그녀는 자신의 꿈과 집안과 사회의 강요 사이에서 갈등하였다. 이때 닥터 홀과 결혼한 로제타 셔우드 홀은 에스더에게 한 남자를 소개한다. 그는 닥터 홀의 선교와 의료 활동을 돕던 사람으로 박유산이란 인물이었다.

김에스더의 집은 처음에는 박유산의 신분이 낮다는 이유로 결혼을 반대 하였다. 그러나 김에스더는 박유산이 함께 꿈을 나눌 수 있는 사람임을 알아보았다. 집안의 반대를 물리치고 김에스더는 나이 17세에 박유산과 결혼한다. 이때 에스더는 서양의 풍습에 따라 남편 성으로 이름을 박에스더로 바꾼다. 그리고 그 이듬해 미망인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는 로제타 셔우드 홀을 따라 남편과 함께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김에스더는 미국의 고등학교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볼티모어의 여자 의과 대학에 최연소로 입학하기에 이른다. 박에스더의 남편 박유산은 아내를 볼티모어 의대에 보낸 뒤 자신은 뉴욕의 농장에서 일하면서 아내의 학비와 생활비를 댔다. 4년간을 낯선 이국땅에서 상투머리 그대로 고생하며 아내를 뒷바라지 하던 박유산은 아내 박에스더가 의사가 되기 직전에 폐결핵으로 유명을 달리 하고 만다.


미신과 싸우며 병마와 싸우며

의사가 되어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박에스더는 고종이 동대문 인근에 특별히 마련한 여성전용 병원인 ‘보구 여관’에서 일을 시작한다. 그녀는 부임 한 첫해 10개월간 3,000여명의 환자를 돌보았다. 휴일도 휴가도 없는 나날이었다. 그녀의 손길을 기다리는 여성 환자가 있으면 언제 어디라도 찾아갔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자신을 의학의 길로 이끌어준 로제타 셔우드 홀이 한국에 돌아와 세운 평양의 홀기념 병원으로 자리를 옮긴다. 당시 박에스더는 병원에서 환자가 오기만을 기다리지 않고 평안도와 황해도를 두루 다니며 의료혜택에서 소외된 벽지의 사람들을 구제하였다. 엄동설한에도 당나귀가 끄는 썰매를 타고 환자를 찾아 나섰다.

박에스더가 펼친 의료활동은 미신과의 싸움이기도 하였다. 산간 벽지의 의료혜택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양의사에게 몸을 보이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들은 병이 들면 무당을 찾아가 푸닥거리를 할지언정 의사를 찾아오지는 않았던 것이다. 박에스더는 말 못할 홀대를 받으면서도 오로지 한사람이라도 더 살리겠다는 굳은 신념으로 환자들을 돌보았다. 그런 그녀의 노력은 곧 입소문으로 퍼져 ‘귀신이 재주를 피운다’는 말을 얻을 만큼 명의로 알려지기도 하였다.

이렇게 열정적으로 의료 봉사활동을 해나가던 박에스더가 하나 빠뜨린 것이 있었다. 환자를 돌보느라 미처 자신의 몸을 돌보지 못한 것이었다. 박에스더는 남편을 앗아간 것과 똑같은 병인 폐결핵에 걸리고 만다. 당시 의학 기술로 폐결핵은 손을 쓸 수 없는 병이었다. 결국1910년, 34세의 박에스더는 자신이 돌보아야 할 많은 여성 환자들을 남겨두고 눈을 감고 만다.

개화기 초기 여성으로 태어나 남자들도 엄두를 내지 못한 미국 유학을 감행한 후 의사가 된 박에스더. 그녀는 자신 앞에 놓인 영화로운 길을 마다하고 굳이 가시밭길을 걸어 타인의 생명을 구하는 역할을 떠맡았다. 자신의 열정을 타인을 위해 기꺼이 소진 했다는 점에서 그녀의 삶은 시대를 넘어 값진 의미를 결코 잃지 않는다.

김정미 자유기고가


김정미 자유기고가 limpid7@cho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