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 눈] 청와대의 경직성을 이야기 할 때

소비예트 체제가 아직 남아 있던 90년대 초 소련 모스크바에 간 한국 관광객들은 기가 막힌 일을 목격했다. 아침나절 호텔에서 바깥을 내다보고 있는데, 트럭 한 대가 도착했다. 곧 사람들이 내려 도로 가에 구덩이를 하나 둘씩 파더니 차를 타고 가버렸다.

‘나무를 심으려는가 보다’ 생각했던 관광객들은 그냥 가버리는 트럭의 뒤꽁무니를 쳐다보며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는데, 30분쯤 뒤 다른 트럭이 도착했다. 그런데 내리는 사람들의 손에도 삽만 달랑 들려 있는 게 아닌가? ‘나무를 심는 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에 계속 바라보니 파놓은 구덩이를 다시 흙으로 묻기 시작했다. 그리곤 아무 일이 없다는 듯이 떠나갔다.

한 관광객이 그 장면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고려인에게 이유를 물었다. “하하, 중간에 나무를 심는 사람들이 안 온 모양이네요.” 그제서야 모든 정황이 분명해졌다. 구덩이를 파고, 나무를 심고, 흙으로 구덩이를 덮는 등 3단계로 나눠진 분업체제에서 나무 심는 사람들이 오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 구덩이를 팠다가 그냥 메울 수밖에.

당시 그 설명을 들으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나라”, “그러니 나라가 요 모양 요 꼴이지”라고 혀를 찬 관광객은 한둘이 아니었다.

이 일화는 그 후 소련 체제의 경직성이 화제에 오를 때마다 빠짐없이 등장했다. 소련이 일사분란한 지휘체제(독재)와 분업 시스템 등으로 고도 성장을 이룩해 한때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강대국에 올랐지만 결국 스스로 무너진 데에는 공산주의 이념외에 체제의 경직성도 큰 원인이 됐다.

나무심기 작업에서 보듯 전문성과 효율을 높이는 분업 시스템도 앞뒤 가리지 않고 ‘내가 해야 할 일만 하면 그만’이라는 구성원들의 경직된 사고에 의해 가장 비효율적인 제도로 전락하는 것이다.

경직된 사고와 체제는, 조직이 크든 작든 그 조직의 활력과 생명력을 갉아먹기 쉽다. 노무현 대통령이 최근 단행한 청와대 비서관 인사도 그런 면에서 크게 우려스럽다. 내년 총선에 출마하기 위해 사임한 6명의 비서관과 행정관 1명의 빈 자리를 메우는 후속인사라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참여정부 첫 6개월의 성적표를 볼 때 최소한의 수혈, 혹은 쇄신안이 나왔어야 했다.

황덕남 법무비서관이 청와대를 떠난 것도 시기적으로 미묘하다. 본인은 입을 다물고 있지만 386측근들과의 갈등설이 나돈 것을 보면 이번 인사와 전혀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번 인사에서 여기에 있던 친구가 저기로, 저기에서 능력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은 이가 여기로 옮기는 바람에 좁은 ‘인사풀’이 조직을 ‘끼리끼리’ 뭉치게 한다거나 경직화 한다는 우려가 나오기도 했으니까.

사실 청와대 비서관 자리는 최소한의 전문성과 효율성을 담보해야 하는 직책이다. 구덩이를 판 뒤 나무를 심을 사람이 없다면 다른 곳에서 나무를 구해와야 할 터인데, 그냥 가까이 있는 사람으로 채워 버리면 그 결과는 걱정스럽다.

노 대통령은 그러나 “가까이에서 검증을 거친 사람이 제일 좋다”고 했다. 내각과 청와대 참모가 거의 대통령 인수위 출신인 것을 두고 일각에서 제기한 ‘코드 편향 인사’란 지적에 대한 포괄적인 해명으로 이해되지만 문제는 자기 주변만 맴돌다 보면 조직의 경직화가 빨라진다는 점이다. 게다가 그 기준이 한가지 가치, 즉 ‘코드’에 맞추다 보면 득보다 실이 많을 수도 있다.

이런 점은 노 대통령도 일찍이 간파했었다. 그는 지난 2월 대통령직 인수위 활동을 마감하는 자리에서 “우리끼리 갈라 먹으면 밑천이 줄어든다. 인수위원들은 내 자산으로 삼고 여기서 추천한 외부 사람을 써야 내 자산도 2배, 3배 늘어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현실은 거꾸로 가고 있다. 요직 인사 때마다 자신과 ‘코드’가 맞는 인수위원들을 발탁했다. 인수위원 30명중 21명이 청와대나 내각에서 일하고 있다. ‘코드 지상주의’다.

한 나라의 국정운영이 ‘코드’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특히 노 대통령이 취임 6개월 기념 언론 간담회에서 “코드는 이 시대의 가치관의 문제이기 때문에 관철해 나가겠다”고 했지만 그 ‘코드’가 담고 있는 가치를 제대로 아는 국민은 많지 않다.

막연한 단어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어떤 가치를 담고 있는지, 다양한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현대사회에서 어떤 식으로 활용될 수 있는지 먼저 국민을 납득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사회는 막연한 ‘코드’아래 짓눌려 경직화의 길을 걷게 된다. 특히 ‘코드’로 상징되는 청와대의 폐쇄성을 깨지 않으면 독재로 흐를 수도 있다. 칼럼니스트 장명수씨는 이미 ‘코드 독재’란 단어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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