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의 추석" 스트레스, 남편은 부인 눈치 보느라 스트레스

주부는 소망한다, 평등한 명절을

"공포의 추석" 스트레스, 남편은 부인 눈치 보느라 스트레스

“곰국 끓이는 큰 통 가득 녹두전 부치고, 큰 대야 가득 동그랑땡 부치고, 만들어도 만들어도 줄지 않는 송편… 벌써 눈앞이 캄캄하군요.”

최근 여성포털 마이클럽(www.miclub.com) 주부 게시판에 올라온 글이다. “공포의 추석이 오고 있네요”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이 주부는 “추석이 오는 것이 무섭다”며 심경을 털어놓았다.

불황이 깊은 만큼 돈 걱정도 빠지지 않는다. “위로 바리바리 선물을 사야 합니다. 시어머님 손 무지 크시지요. 누구네 아들은 금 시계 하라고 50만원 주더라, 누구는 어쩌구, 해 드리고 싶은 맘은 굴뚝입니다. 이런 아이 같은 말씀 하시면 맘이 아프네요.”(아이디 ‘cupi’)

“명절이 오기 전에 마음에 멍부터 든다”는 ‘명절증후군’을 호소하는 주부들이 크게 늘었다. 추석을 맞는 주부들의 마음이 즐거움 못지 않게 무거운 것이 현실. 오랜만에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정겨움을 나누는 것도 좋지만 주부들에게만 몰린 과중한 일감과 경제적 부담으로 명절이 ‘고통절’로 다가오는 경우도 많다. 결혼 7년째인 주부 박모(34) 씨는 “10시간 회사에서 일하고 8시간 차 타고 내려가서 사흘 밤낮 부엌에서 산다”며 “명절 때마다 어디론가 달아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고 고백했다.

부인의 신경이 날카로워지다 보니 이를 지켜보는 남편들도 마음이 편할 수는 없다. 아내 눈치를 보느라 남편들이 겪는 스트레스도 이만 저만이 아니다.

“어이쿠야 명절이네/ 짐 싸면서 투덜 되는/ 당신보면 괴롭구나/ 화투 치고 술 마셔도/ 좌불안석 당신 곁에/ 시 엄마와 얘기해도/ 야단맞나 속이 철렁/ 시누하고 마주 봐도/ 싸움 났나 속이 덜컹/ 그리 힘이 든다 하면/ 다음부터 내가 하마….”

추석을 앞두고 인터넷에 올라 화제가 되고 있는 ‘남편의 명절일기’의 일부다. 한 30대 회사원은 “혼자 술 마시러 가고 술이 떡이 되서 들어오면 아내에게 한바탕 설교를 듣는 것이 늘 똑 같은 명절 풍경”이라며 “일의 많고 적음을 떠나서 같이 일하고 같이 놀러 가고 싶다. 아내에게 미안하지 않고 싸우지 않는 명절로 달라져야 한다”고 말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 시집살이'

최근에는 명절증후군이 시어머니들에게도 나타나고 있다. “오는 자식 반갑지만 가는 자식 더 반갑다”는 우스갯소리가 나돌 지경. 올해 환갑을 맞은 최모씨는 “며느리만 명절이 싫은 게 아니라 시어머니도 싫다”며 ‘손님맞이’ 전쟁을 치를 것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한숨이 난다고 했다.

“바깥 일 하느라 집안 일은 아는 게 없다”는 며느리들 때문에 음식 준비에서 뒤치다꺼리까지 도맡는다고 한다. 최씨는 “며느리에게 일 좀 시키려면 자식은 부인 역성 들고, 시집 안 간 노처녀 딸은 해외도피 여행을 떠나버려 얼굴도 볼 수 없다”고 푸념했다.

지난해 한국갤럽의 조사에 다르면 ‘추석이 즐겁지 않다’는 응답이 47%에 이르렀다. 사이버주부대학(www. cyberjubu.com)이 8월 주부 회원 1,127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주부 10명 중 7명이 명절증후군을 호소했다.

이처럼 민족의 대명절이 고통의 시간으로 다가오자 일각에서는 명절 문화를 개선하려는 작은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격식에서 벗어나 가족들간 화합을 다지는 명절을 보내자는 바람 때문이다.

얼마 전 한국여성단체협의회가 공모한 ‘내가 바꾸는 명절’ 수기 공모전에서 입상한 곽정아(22)씨 가족은 여느 집과는 다른 명절을 보낸다. 남자들이 시장을 보고 음식을 장만하는 등 집안 일을 분담하는 것은 물론이고 차례를 지내고 나면 여자들끼리 밖에 놀러 가서 스트레스를 푼다.

그 동안 집안을 단속하는 것은 남자들의 몫이다. 4녀1남의 독자로 손에 물 한 번 안 묻히고 자란 곽씨의 아버지는 처음엔 “반란이냐”며 탐탁치 않아 했으나 “시장을 보면서 조금이라도 더 좋은 것을 사서 가족에게 주려고 하는 아내의 마음을 많이 느꼈다”면서 고마워 했다.


남자들이 음식장만, 가족여행도

주부 이숙희(39)씨네 집안에서는 추석이나 설은 즐거운 놀이 시간이다. 올 추석에는 강원도의 한 휴양림으로 가족 여행을 떠난다. 차례는 형제들이 돌아가며 맡아 간소하게 지내고, 숙소 예약 및 음식은 시부모와 두 형제 가족이 분담해 준비한다. 김씨는 6년 전부터 명절마다 가족 여행을 떠나면서 가족들간 친목도 두터워지고 대화도 많아졌다며 가족들 모두 달라진 명절 분위기에 만족해 한다고 전했다.

한국여성민우회는 99년부터 매년 ‘웃어라 명절’ 캠페인을 펼쳐 왔다. 이번 추석에는 함께 일하고 함께 쉬는 명절을 위해 ‘남성들이여, 설거지부터 시작하자!’는 남성실천서약 운동을 전개한다. 2남 2녀의 장남인 30대 박모씨는 이 캠페인에 적극적인 지지를 보낸다.

설거지 등 손쉬운 집안 일을 돕겠다는 박씨는 “2년 전 집안 어른들과 술 마시느라 임신 중인 아내를 혼자 일하게 내버려뒀던 일이 지금도 후회스럽다”며 “젊은 남자들이 나서서 평등한 명절 만들기를 이끌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캠페인 담당 주현정씨는 “양성평등 문화가 확산되면서 남성들의 가사노동 분담이 늘고 있지만 명절엔 친지들 눈치 보느라 선뜻 가사 노동에 참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며 “남자들이 당당하게 아내의, 누이의, 어머니의 가사노동 부담을 나누어 가질 것”을 권했다.

민우회는 추석연휴를 맞아 귀성객이 몰리는 서울역 등 전국 7개 도시 주요 역 광장에서 정겨운 한가위를 위한 평등 명절 지침서를 배포하고, 남성들의 실천서약 참여를 유도한다.


평등 명절을 위한 7계명

1. 온 가족이 모여 명절 계획을 세우고 역할을 나누자. 2. 남녀의 일 구분 없이 함께 참여하자. 3. 시댁과 친정 구분 없는 명절을 지내자. 4. 음식과 차례는 간소하게 마련하자. 5. 조상 모시기는 고인을 기리는 마음이 중요하다는 걸 명심하자. 6. 온 가족이 함께 하는 명절 놀이를 찾아보자. 7. 어려운 이웃과 정을 나누자.

배현정 기자


배현정 기자 hjba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