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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덕균의 개그펀치] 바보같이 삽시다



초등학생인 내 아이들이 학습지와 영어 테이프 듣기와 수학 문제집과 씨름을 하다가, 짜증이 나면 종종 불만어린 목소리로 말하곤 한다. “아빤 어른이어서 좋겠어요. 공부를 안 해도 되고. 아, 아, 아, 난 언제 어른이 되지?”

그런 아이들에게 아무 생각 없이 공부만 하면 되는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면 “거짓말”이라며 믿지 않는다. 하지만 난 정말로 아이들이 부럽다. 어른이 되고 보니 아이였던 그 시절이 얼마나 즐겁고 행복했던 것인지 종종 느끼게 된다. 특히 돈주머니를 활짝 열어야 하는 명절이 돌아오면 어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고달픈 것인지 절실히 깨닫게 된다.

아이였을 때는 명절이 정말 좋았다. 새 옷을 얻어 입고 모여든 많은 친척 어른들로부터 용돈을 받는 그런 날이 매일이었으면 좋겠다고 소원했었다. 아무 생각없이 희희낙락하며 어른들에게 용돈을 받는 그 시절을 마감하고 내가 주머니를 열어 많은 조카들에게 용돈을 주어야 하는 위치에 서게 되자 그런 푼돈이 얼마나 애써서 벌어들인 돈인지 알게 되었다.

이번 추석에도 어른이 치뤄야 하는 혹독함을 넉넉하게 감당했다. 신문에서 으레 말하는 추석 상차림의 기준 비용을 훨씬 넘는 돈을 지출했다.

많은 집들이 추석이나 설날같은 명절이면 위태위태한 긴장감이 고조된다. 남자들은 초과지출되는 비용 때문에 괴롭고 여자들은 과도한 부엌일과 시댁과의 마찰로 인한 스트레스로 예민해진다. 어떤 조사에서 보니까 명절이 지나고 나면 이혼율이 더 높아진다는 보고도 있었는데 우리네 조상들이 넉넉한 인심으로 명절을 보내던 분위기와 비교해본다면 참으로 험악한 명절 분위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런 긴장감과 가정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추세에 발 맞추어 예전보다 명절의 의미가 많이 퇴색해진 것도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명절을 황금 연휴로 인식해서 조상의 차례를 모시고 대가족의 단합이 이루어지는 아름다운 행사라는 취지에서 벗어나 여행을 가는 일들이 빈번해졌다.

이전에는 땀을 뻘뻘 흘려가며 조상의 무덤을 벌초하느라 서투른 낫질을 했을 후손들이 이제는 전화 한 통화나 인터넷으로 벌초대행 업체에 맡겨버린다. 힘든 음식 장만도 마찬가지다. 주문만 하면 부침개며 과일이며 차례상 일체를 완벽한 풀세트로 배달해주는 업체도 생겨났다. 받아서 그냥 상에만 올려놓으면 근사한 차례상이 차려지는데 이나마도 여행지에서 차례를 지내는 일도 있으니 요사이 우리네 조상님들은 음식 한번 드시려면 본가가 아닌 전국의 휴양지를 헤매셔야 할 판이다.

돌아가신 부모님과 조상님을 생각하며 힘을 들이고 땀을 쏟아내며 벌초며 음식 장만을 하기보다는 그저 힘들고 궂은 일이 싫으니까 적당히 돈으로 때워서 명절이라는 이름값만 하려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이러다가는 그나마 돈으로 산 차례상에 절하고 술 따라드리는 것도 귀찮다고 아예 제사나 차례를 대신 치뤄주는 대행업체도 생겨나지 않을까 싶다. 생각해보라, 공장처럼 줄줄이 사진과 지방만 바꿔 달며 전혀 낯 모르는 사람들이 절을 하는 모습을….

약간의 수고스러움이 싫다고 제 할 일을 마다하고 남에게 맡겨버리기만 하는 삶이 편하기는 할망정 마음 한구석으로 밀려드는 찜찜함을 도저히 떨쳐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공부가 싫다고 징징거리는 우리 아이들이나 일하고 돈 버는 일이 고달프다고 비명을 질러대는 어른들 모두 아무리 발버둥쳐도 자신의 임무와 책임을 회피할 수는 없다.

공부를 하건 돈을 벌건 밥을 짓건, 정치를 하건 그 책임의 무게가 많고 적음을 떠나 나에게 맡겨진 일을 엄숙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묵묵히 걸어가는 바보같은 우직스러움이 절실히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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