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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성, 부부 합의로 결정한다

개별구성원 동등지위 확보, 재혼가정 자녀 성 변경 가능





디자이너 윤자영(이태란 분)은 성공을 위해 회사 사장과 결혼한 첫 사랑 이상민(김호진 분)과 헤어져 애를 낳았다. 자신의 성(姓)을 따라 윤지민으로 키웠다. 그런데 시간이 흐른 후 '대(代)를 이를 아들'을 원한 남자가 애를 자기 호적에 올리겠다고 나선다. 결혼 전 임신중절 하라며 병원까지 데려다 준 남자였다. 그럼에도 태연히 아버지의 권리를 주장한다. 이지민으로 바꾸겠단다.

자영이 강경하게 반대하지만 방법이 없다. 누가 애를 낳아 키웠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친부가 소송을 걸면 100% 이긴다. 그것이 현행 호주제다.

KBS 드람 '노란 손수건'에 나오는 이 기막히(?) 이야기는 현실에서도 다르지 않다. 마흔 중반의 주부 A씨가 딸을 낳은 건 19년전. 결혼을 약속했던 남자는 이후 태도가 돌변. A씨 모녀를 버렸다. 드라마처럼 어느 날 고 3이 된 딸 앞에 나타난 남자는 아버지임을 내세운다. 호적에 올리겠다고.

이제라도 아버지 노릇을 하겠다니 다행이라고? 천만의 말씀이다. 몇 해 전 사업에 실패한 남자는 결혼한 부인과 낳은 두 아들도 돌보지 않는다. 장성한 딸을 보고 탐이 난 것 뿐이다. 딸은 현재 아버지의 소송에 맞서느라 입시 준비도 제대로 못하는 상황. 미혼모로 손가락질을 당하며 홀로 딸을 키워냈던 여자는 통곡한다.

"한 여자의 인생을 망쳐 놓더니 그것도 모자라 딸까지 망치려 하네요."

이혼율 30% 시대. 이혼을 했거나 재혼으로 새로운 가정을 꾸린 사람들에게도 호주제는 이렇게 심각한 고통을 안겨주고 있다.

"우리 사회가 이렇게까지 갑갑한 줄은 몰랐습니다." 함께 사는 자녀의 성을 자기 성으로 해달라며 백방으로 뛰어다니고 있는 회사원 O모(38)씨. 98년 남편과 이혼한 지금의 아내와 재혼을 하면서 아내가 데려온 아들 L군(7)과 가족의 인연을 맺었다. 그는 자신을 잘 따르는 L군을 볼 때마다 미안한 마음에 고개를 들지 못한다. "자신과 성이 다르다고 동네 아이들이 놀리는 걸 봤다. 애들 장난에도 부모 눈에는 피눈물이 난다"라고 말했다.

성을 바꿀수 없다는 것보다 더 가슴 아픈 부분도 있다. "우린 호적상 부자(父子)가 아닌 동거인에 불과해요."그는 통탄한다. 아버지가 될 수 없는 현실에.

호주제는 지금까지 넘긴 힘든 벽이었다. 이혼이나 재혼한 가정, 혹은 동거인·미혼모등 합법적인 결혼이라는 제도 밖에 있는 사람들에겐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주홍 글씨였다. 그러나 이 굳건한 벽이 무너지고 있다. 9월 4일 호주제 폐지를 담은 민법 개정안이 입법 예고됐다.


개인벌 신분등록제 도입



개정안의 골자는 개인별 신분등록제 도입이다. 이제껏 호주를 중심으로 가족이 구성돼 호적에 가족 구성원 모두의 신분 변동 사항이 기록됐으나, 이 제도에 따르면 가족 개개인이 전부 자신만의 신분등록을 갖게 된다. 가장인 호주가 없어지고 개별 구성원들은 동등한 지위를 갖는다.

자연히 드라마 '노란 손수건'의 여주인공이나 A씨처럼 함께 생활하지 않은 아버지의 호적에 오르는 문제로 울고 불고 할 일도 없어진다.

딸 아이를 데리고 이혼한 지 10년 된 K씨는 이 소식을 듣고 띌 듯이 기뻐했다. 이혼한 남편이 죽자 얼굴도 모르는 그의 어린 아들이 K씨 딸의 호주가 됐는데, 앞으로 바뀔 것이기 때문이다. 현행 민법 984조에 따르면, 아버지 다음으로 호주의 승계 순위는 아들-딸(미혼)-처-어머니-며느리 순이다.

당연히 이혼한 남편의 호적에 남아 있던 K씨 딸의 호주 지위를 얼굴도 한번 본 적 없는 전 남편의 아들이 승계했다. K씨는 "딸애를 혼자 키우며 살아온 세월이 기가 막혀 살 의욕을 상실했다"며 하루 빨리 개정안이 통과되기를 학수고대했다.

개정안히 시행되면, 재혼 후 자녀의 성도 변경할 수 있다. 현행법상 재혼한 어머니를 따라 사는 자녀의 경우 새 아버지의 호적에 올릴 수는 있었지만 성을 바꿀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 개정안은 가정 법원의 판단에 따라 자녀와 성이 다르다는 이유로 겪는 고통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또한 부부 합의에 따라 자녀의 성이 결정된다. 아버지의 성을 따르는 것을 원칙으로 하지만, 부부가 합의하면 자녀가 어머니의 성을 따를 수 있도록 하는 예외조항을 신설했다. 다만 형제 자매는 같은 성과 본을 따라야 한다.

호주제가 폐지되면 이처럼 남녀 간의 불평등이 완화되고 다양한 가족형태가 수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여성계는 새 민법 개정안을 환영하는 분위기다. 한국여성단체연합 남윤인순 사무총장은 "헌법에 보장된 인간의 평등권과 행복추구권을 침해하는 호주제를 폐지하고 개인별 신분등록을 도입하는 개정안은 상당히 진보된 것'이라고 반긴다.


유림측 강한 반발, 법안통과 난항예상



그러나 집안의 기둥에 비유되는 '가장'의 개념이 없어진다는 점에서 유림측은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수천년 간 이어온 전통을 하루 아침에 없애는 것은 가족 문화의 근간을 위협하는 것이라고 경고한다.

한국씨족연합회 백진우 총재는 "호적이 사라지고 개인별 신분 등록을 하게 되면 공동체 의식과 뿌리가 사라진다"며 "호주제의 일부 문제를 보완하지 않고 전면 폐지하겠다는 것은 그릇된 발상"이라고 말했다.

민법 개정안은 국회 통과 시점 2년후에 시행토록 하고 있어 9월 정기 국회에서 개정안이 통과될 경우 이르면 2006년부터 호주제가 폐지된다. 그러나 올해 통과 여부는 아직 미지수. 유림측의 반발이 심하고 한나라당이 이혼·재혼 가정 자녀들의 성을 변경하는 '친양자 제도'만 우선 도입하자고 주장하는 등 정치권의 반대 여론도 만만치 않아 통과되기까지 상당한 난항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배현정 기자 hjb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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