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금융상품으로 재산 불린 전형적인 한국형 재태크

[우리시대의 부자들] 종자돈 + 운七기三… 돈이 돈을 낳았다

부동산·금융상품으로 재산 불린 전형적인 한국형 재태크

생각보다 수수하다. 시쳇말로 부티가 느껴지긴 하지만 몸에는 흔한 액세서리 하나 없다.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 운운하며 아직 자가용도 없다고 했다. 수백억원대 재산을 보유한 거부는 아닐지라도 남 부럽지 않게 살 수 있는 재산은 갖고 있는 속칭 '부자'가 아니던가.

올해로 꼭 50세가 된 이옥순(여ㆍ가명)씨. 남편을 잘 만나 하루 아침에 신데렐라가 된 경우도 아니었고 (남자보다 돈을 더 좋아해서 일까. 그녀는 아직 미혼이다), 부모로부터 거액의 유산을 물려받은 귀공녀도 아니었다. 부동산으로, 또 금융상품으로 돈을 불려 나간 전형적인 한국형 부자였다. 아마도 그녀의 수수함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었다.


하나- 그저 샀다 팔기를 반복했을 뿐인데…

"맨 손으로 1,000만원을 모으는 것은 정말 힘들었어요. 하지만 1,000만원을 2,000만원으로, 또 5,000만원으로, 그리고 1억원으로 늘리는 것은 갈수록 쉬어지더군요." '돈이 돈을 낳는다'는 속담의 경험적인 표현이었다.

큰아버지댁 더부살이, 대학교 중퇴, 변호사 사무실 급사 생활…. 전북 전주의 가난한 농부였던 부모 밑에서 5녀 1남 중 맏딸로 태어난 그녀에게 사회의 벽은 너무 높았다. 쥐꼬리만한 봉급으로 인생 역전을 꿈꾸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헌데 그녀에게 조그만 기회가 찾아왔다. 스물 세 살이던 1976년, 고향 땅 주변이 도시 계획에 들어갔다. 일부는 헐값에 수용됐지만 환지로 받은 900평 가량의 땅은 순식간에 금싸라기 땅으로 변했다. "아마 당시만 해도 평당 1,000원 내지는 2,000원에 불과했을 거예요. 도시 계획에 들어가자 2~3년 새 땅 값이 100배 가량 뛰더군요. 아무리 노력해도 모이지 않던 목돈이 하루 아침에 만들어진 거죠." 평당 최고 20만원까지 받고 이 땅을 처분해 손에 쥔 돈은 5,000만원이 훨씬 넘었다.

"부동산이 돈 버는 지름길"이라는 걸 깨달은 뒤 그녀의 돈 불리기는 일사천리였다. 550만원을 들여 처음으로 구입한 서울 정릉4동의 집은 불과 4년 뒤 2,000만원에 되팔았고, 80년 3,000만원에 구입한 논현동 집은 곧 두 배로 뛰었다. 정부 청사가 들어서기 이전 과천에 4,000만원 짜리 집을 사 4배 가량인 1억6,000만원에 되파는 행운도 뒤따랐다. 그녀와 15년 이상 거래를 해 온 K은행 김 모 과장은 "운이 좋았는지, 아니면 감각이 탁월했는지 몰라도 투자를 하는 곳마다 상당한 수익을 냈다"고 혀를 내둘렀다.

그녀가 현재 보유하고 있는 부동산은 혼자 거주하고 있는 시가 4억원 가량의 분당의 32평 아파트를 비롯한 30평형대 아파트 3채, 시가 10억원은 족히 넘는 강남 역삼동 4층 상가, 강남역 인근 소규모 점포, 행정수도 이전에 따라 개발 기대감이 부풀어 있는 충청 공주의 1,000평 안팎의 임야 등. 은행에 예금과 간접상품 등에 넣어둔 유동 자금도 10억원은 넘는다고 하니 어림잡아도 그녀의 재산은 50억원을 훨씬 상회한다.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얻어 돈이 될 만한 곳을 잘 골라낸 것도 어찌 보면 운이라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주변 사람들이 시기하는 것처럼 투기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정말 성실히 예금도 했죠. 만약 정말 돈을 왕창 벌 생각이었다면 예금보다는 부동산 투자에 더 매달리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녀의 부자 예찬론이었다.


둘- 정보는 곧 돈이랍니다

한때 증권사에 근무했던 이덕상(41ㆍ가명)씨. 무일푼에서 부동산 투자로 불과 15년 만에 30억~40억원의 자산가가 된 경우였다. 그의 투자에는 늘 범상치 않은 '정보'가 있었다.

첫 종자돈은 S증권 입사 첫해 회사에서 받아 든 1,300주의 우리 사주였다. 주당 1만4,500원. 가진 재산 2,000만원을 톡톡 털어넣는 모험을 했다. '올 인'의 가치는 충분했다. 1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무렵, 주가는 3~4배로 폭등했다.

그가 주식을 처분해 받아 든 돈은 7,000만원 가량. 이듬해 초 은행에서 5,000만원을 대출해 서울 사당동에 있는 D아파트 2채를 마련했다. 1채는 본인이 거주할 목적이었고, 다른 1채는 전세를 끼고 매입했다. 그리고 8년 뒤 투자 원금의 두 배가 넘는 3억원을 받고 집 2채를 모두 팔았다. 대출금은 급여로 전액 상환한 뒤였다.

짭짤한 재미를 본 그는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부동산 재테크에 뛰어 들었다. 다시 은행에서 5,000만원을 빌려 상도동 재개발지역 S아파트 두 채를 3억5,000만원에 사들였고, 3년 가량 뒤 5억2,000만원에 되팔았다. 이번엔 퇴직금 1억2,000만원과 적금 5,000만원, 그리고 은행 대출금 2억원을 모두 쏟아 부어 3억원 짜리 강남 대치동 J아파트 3채를 마련했다.

주변 사람으로부터 재건축 정보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곧 이어 전세금으로 받은 3억원 중 2억원은 신도시 개발 기대가 부풀어있던 김포 지역 농지를 평당 10만원에 2,000평 매입했다.

2년 여가 지난 지금, J아파트의 가격은 두 배 이상 뛰어 한 채 당 시가 6억원을 상회하고 있고, 김포 농지는 평당 10만원에서 70만원으로 폭등했다. "분명 모험인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 사회에서 돈을 벌기 위해서는 부동산에 투자하는 방법 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정부의 강력한 부동산 억제책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부동산이 가장 믿을만한 재테크 수단이라고 믿고 있었다.


셋- 절박하면 길이 보인다구요

주식으로 망했다는 사람은 많아도 주식으로 돈 번 사람은 찾기 어렵다는 얘기가 있다. 막강한 외국 및 기관 공룡과 싸워야 하는 '개미 투자자'의 한계일 수도 있지만, 부동산 거래와 달리 주식은 매매 내역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일 수 있다. 설사 주식으로 큰 돈을 벌었다 해도 공공연하게 떠벌리고 다닐 이는 많지 않을 테니까.

보험사 임원까지 하다 퇴직을 하고 최근 건물 임대 사업에 뛰어든 조제식(58ㆍ가명)씨는 전형적인 '주식 부자'다. 특히 그는 98~99년 벤처 붐이 거세게 몰아칠 때 단번에 기회를 잡았다.

90년대 초부터 주식 투자로 조금씩 재미를 보았던 조씨는 외환 위기 당시 쓰라린 경험을 했다. 투자금 2억원이 4분의 1쪽인 5,000만원으로 폭삭 주저앉은 것.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절박한 상황에서의 해법은 갈아 타기였다.

99년8월 무료국제전화 사업으로 떠들썩 하던 인터넷주 S기술 주식을 주당 4,500원에 1만주를 매입했다. 결과는 대박이었다. 끝도 없는 상한가 행진을 거듭하던 주가는 불과 3개월여 뒤 20만원까지 치솟았다. 그가 주식을 팔아 손에 쥔 금액은 20억원, 투자 원금의 40배였다.

"바닥에 사서 허리에서 팔라"는 증시 격언을 철저히 따른 것이었지만 욕심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다시 몇 개월 뒤. 32만원까지 치솟은 S기술 주식을 다시 사들였지만 이번엔 상투였다. 절반에서 손절매. 또 한번의 쓰라린 경험이었지만 이미 주식에 톡톡히 재미를 붙인 터였다.

심기일전한 그는 이번에는 장외로 눈을 돌렸고, 결과는 또 한번의 대박으로 이어졌다. 2001년 초, 장외에서 K랜드 주식을 주당 5만원에 1만주를 매입해 1년 만에 160%의 수익률을 냈고, 그 해 9월에는 S카드 주식을 주당 4만~5만원대에 1만주를 사들여 역시 4개월 만에 100% 이상의 수익을 냈다.

주식에서의 성공은 부동산에서의 성공으로도 이어질 태세다. 지난해 4월 마련한 서울 잠실의 J아파트 4채는 당시 4억원에 조금 못 미쳤던 시가가 현재 6억원에 육박하고 있다. "모르죠. 주식에서 깡통을 꿰차고 거리로 나앉았을 수도. 하지만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니까 이젠 별로 겁나는 것이 없네요. 꼬박꼬박 적금을 부어서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얘기는 너무 비현실적인 것 아닙니까."

이영태기자


이영태기자 yt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