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전세계로 확산, 속수무책
'사스'공포… 기침만 해도 가슴 철렁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전세계로 확산, 속수무책
서울 강북의 한 내과 의원.
최근 동남아 단체 여행을 다녀와 목이 칼칼하고 미열이 있는 등 감기 기운이 있어 왔다는 한 50대 아주머니가 병원을 찾아 혹시 괴질 증세는 아닌가를 다급하게 문의했다. 스스로 피검사까지 요청했다.
또 봄기운에 감기에 걸린 초등학교 2학년생 아들과 함께 병원을 찾은 40대 주부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괴질 진료를 받게 하는 등 이 병원은 오전 일찍부터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이라는 ‘괴질’ 신드롬으로 북적였다.
서울 강남 지역의 한 보건소도 예외는 아니다. 오전 11시 이곳을 찾은 환자들은 20여명으로 평소와 비슷했지만 전화기가 쉴새 없이 울려댔다. 보건소 직원은 “중국 여행 예약자들이 괴질 증세와 예방약에 대해 질문을 하고 있다”며 “예방약이 없어 손발을 깨끗이 씻을 것을 당부하는 일반적인 얘기만 해주고 있다”고 말했다.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이 여객기 탑승객 등을 통해 전 세계로 급속히 퍼지고 있는 가운데 국내에도 ‘괴질 공포’가 확산되고 있다. 병원마다 괴질이 아닌가 의심해 찾는 감기 환자들로 북적이고 해외 여행객이 급감해 여행사와 항공사들은 울상이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최근까지 괴질 감염 증세를 보이는 환자는 22개국에서 모두 2,000여명으로 사망자는 70여명에 이르고 있다. 발생 지역도 아시아, 유럽, 호주에 이어 북미 및 중남미로까지 확대되면서 그 위세는 하늘을 찌를 기색이다.
홍콩에서는 도시 전체가 조만간 괴질 감염 지구로 선포, 봉쇄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면서 항공사 창구엔 외국으로 나가는 항공편 예약 문의가 폭주했다. 슈퍼 마켓과 시장에는 쌀과 물, 휴지 등 생필품을 구입하려는 시민들로 난리 법석을 이루는 현상도 연출됐다.
한편 중국 베이징(北京) 주재 미국 대사관은 국무부의 지시에 따라 불요불급한 중국 공무여행을 금지한다고 발표하고 중국에 있는 자국 공관원들의 미국 출장도 금지했다. 4월 14일 베이징에서 열릴 예정이던 세계경제포럼(WEF·다보스포럼)은 지역 회의인 중국 비즈니스 정상회의를 연기한다고 발표했다.
또 4월 24일 베이징에서 열릴 예정이던 세계 지식 재산권 기구(WIPO)의 개최 여부도 불투명해졌다. 전문가들은 “항공 여행의 보편화로 비행기를 통해 빠른 속도로 확산되고 있다는 점이 이번 괴질의 특징”이라고 우려감을 표시했다.
외국인 출입국이 빈번한 인천 국제 공항에는 괴질 공포로 극도의 긴장감이 흐르고 있다. 자녀 2명과 함께 홍콩에서 출발, 고국을 찾은 김소연(36ㆍ주부)씨는 “비행기 안에서도 승객들이 몇 시간 동안 단 한 차례도 화장실에 가지 않는 등 매우 조심스러웠다”고 말했다.
검역소 직원들은 고열과 기침, 호흡 곤란 등의 징후를 보이는 승객 가운데 체온이 38.5도가 넘으면 바로 병원으로 이송했다. 대한항공 관계자는 “괴질이 확산되면서 중국 지역의 경우 탑승률이 최고 20%가량 줄었다”고 말했다.
아시아나 항공은 4월 첫째 주말부터 중국 일부 노선에 대한 운항 중단이나 감편을 검토하고 있다. 국립인천공항 검역소 관계자는 “출입국자들은 예전이면 외면하던 검역질문서를 요즘은 자발적으로 기입하고 있다”며 “괴질을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하다”고 말했다. 국립보건원의 인터넷 홈페이지에도 예방책 등을 묻는 글들이 하루평균 80여건 올라오고 있다.
괴질을 피해 귀국하는 유학생들의 행렬도 줄을 잇고 있다. 올해 초 교환학생 자격으로 홍콩으로 유학을 떠났던 김도영(22ㆍ고려대4)씨는 휴교령이 떨어지자 지난달 29일 귀국했다. 김씨는 “홍콩에서는 마스크가 없으면 생활이 안될 정도”라며 혀를 내둘렀다.
4월3일 오후 서울 강남의 삼성 서울 병원에 괴질로 의심되는 환자가 응급실로 옮겨오는 사태가 발생했다. 의료진은 만약 괴질로 판명 날 경우 다른 환자에게 전염될 것을 우려해 구급차 안에서 진료를 했다. 그러나 이 환자는 단순 감기인 것으로 밝혀져 약을 받고 10분만에 돌아갔다.
서울대병원에도 최근 1주일 동안 3명의 괴질 의심 환자가 응급실로 들어왔으나 모두 괴질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지난달 말 인천의 한 병원에서는 중국 여행을 다녀온 한 환자가 고열에다 급성 편도선염 증세를 보여 국립보건원 조사까지 받았으나 괴질이 아닌 것으로 판명됐다.
국립보건원은 최근 전문가회의와 시도 방역 관계자 및 검역소장 회의를 잇따라 열고 괴질 대책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 보건원은 괴질 환자를 효율적이고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전국을 9개 권역으로 나눠 격리병원을 지정, 운영하기로 했다.
각 지역 보건소는 이와 함께 중국 광둥(廣東)성과 홍콩, 싱가포르, 베트남 하노이를 방문하고 돌아온 입국자 전원을 대상으로 입국 후 5일째와 10일째 괴질과 유사 증세를 보이는 지를 전화로 확인하기로 했다.
괴질 공포는 이라크 전으로 가뜩이나 움츠려진 한국경제에 또 다른 악재로 작용하고 있다. 괴질이 퍼지면서 기업들은 위험지역 출장을 제한하는가 하면 중국 홍콩 등지의 주재원과 가족을 귀국시키는 등 긴급 경계령을 내렸다.
삼성은 삼성전자와 제일기획 등 계열사별로 중국 광둥 지역을 비롯해 홍콩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에 출장 중인 임직원을 돌아오도록 했다. 삼성전자 김광태 상무는 “현지 판단에 따라 감염 우려가 큰 지역의 삼성전자와 관계사 주재원 가족 150여명도 귀국하도록 했다”고 말했다.
한국관광공사는 홍콩 지사가 입주한 홍콩 리포센터 13층의 다른 업체 사무실에서 괴질 환자 1명이 발생함에 따라 지사 사무실을 폐쇄하고 임시사무실을 구할 때까지 재택근무를 지시했다.
현대상선은 3월말 홍콩 현지법인 직원들의 요청으로 마스크 150개를 긴급 공수했다. 포스코도 지난달 말 중국 광둥 지역을 비롯해 홍콩, 베트남과 대만으로의 출장을 무기한 금지했으며 필요한 경우 중국 일부 지역 주재원과 가족의 일시 귀국을 검토 중이다.
LG화학 성환두 과장은 “괴질 감염 위험이 높은 중국과 동남아 지역 출장을 당분간 전면 금지하고 홍콩 광둥 지역의 주재원과 가족을 가급적 이른 시일 내에 귀국시키기로 했다”고 말했다. 한 업계 관계자는 “괴질로 해외 주재원의 감염 우려가 커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업 계약이 연기되고 업무가 중단되는 등 보이지 않는 피해가 크다”고 우려했다.
일부 영세한 중ㆍ소여행사들은 예약 취소율이 90%대로 급증하면서 부도 위기까지 맞고 있다. 전국에 800여 개의 회원사를 두고 있는 한국 일반 여행업 협회에 따르면 이라크 전쟁에다 괴질이 겹치면서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여행객이 50% 이상 줄었다.
외국 관광객들의 국내 입국도 급감해 한국관광객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일본 관광객들이 전체적으로 30% 정도로 줄어 든 상태다. 이에 따라 대한항공은 모두 4개편의 중국행 항공편 운항을 취소했으며, 아시아나항공도 최근 중국행 항공편의 예약률이 33%밖에 되지 않자 감축 운항을 고려하고 있다.
대한항공 한 승무원은 “본사에서 홍콩, 싱가포르, 사이공 노선의 경우 현지 체류 스케줄을 없애고 공항에서 바로 귀국하도록 했지만 동료들 사이에서는 이 지역으로의 비행을 목숨을 건 비행이라며 기피하려는 움직임마저 일고 있다”고 울상을 지었다.
최근 괴질 환자가 국내에서도 발생할 것에 대비해 권역별로 격리 병원이 지정됐다.
국립보건원은 국내에서 발생한 환자가 없거나 환자가 신고됐더라도 1명뿐일 경우 1단계로 서울과 경기, 강원, 제주, 부산ㆍ경남ㆍ울산, 대구ㆍ경북, 대전ㆍ충청, 광주ㆍ전남북, 인천 등 9개 권역으로 나눠 격리 병원을 운영키로 했다. 권역별로 1개씩 격리 병원을 지정하되 서울은 3곳을 지정하도록 했다.
이들 병원에는 환자 발생에 대비한 병상을 확보하고 감염내과 분야의 담당 의사를 지정하도록 했다. 보건원은 이와 함께 괴질 환자가 2명 이상 발생할 경우에는 대학 병원을 상대로 2단계의 격리 병원을 운영하기로 했다.
또 괴질의 잠복기가 10일인 점을 감안해 중국 등 괴질 발생 지역의 교민이나 여행객이 입국할 경우 귀국 후 5일 이내에 유사 증세를 보이는지 확인하는 등 추적 관리하는 방안도 검토중이다. 전문가는 “괴질 바이러스 감염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효과적인 치료약이 별로 없는 것이 문제점”이라며 “집안에 어린아이가 있거나 노인이 있다면 건강한 사람이라도 밖에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손을 씻고 양치질을 하는 것이 예방의 최선책”이라고 말했다.
입력시간 : 2003-10-01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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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학만 기자 local@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