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베이징 3자회담서 핵무기 보유 전격 시인

'레드 라인'위의 핵 협박게임
북한, 베이징 3자회담서 핵무기 보유 전격 시인

“귀측이 계속 위압적으로 나오면 더 이상 대화할 의미가 없소”(리근 북한 외무성 미주국 부국장)

“최소한 귀측이 먼저 핵 개발 계획을 포기해야 회담에 진전이 있을 것이오. 워싱턴은 이미 협상이 없다고 말하지 않았소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

“뭐요? 우리는 이미 핵 무기를 갖고 있고 포기할 수도 없소. 핵 무기를 어떻게 할지는 전적으로 귀측의 태도에 달려있단 말이오”(리근)

“지금 핵 무기를 갖고 있다고 말했소? 정말이오?”(켈리)

23일 오후 3시30분 북한 미국 중국의 ‘3자 회담’이 열린 베이징의 영빈관 댜오위타이(釣魚台). 회의가 난항을 거듭하면서 정회되자 리근 부국장은 회담장 복도로 켈리 차관보를 불러놓고 마치 연설문을 낭독하듯 단호하게 핵 무기 보유 사실을 시인했다.

지난해 10월 북한의 농축우라늄 핵 개발계획 시인으로 촉발된 북한 핵 문제가 ‘이미 개발된 핵 무기 해체’라는 한층 복잡하고 위험한 단계로 비화하는 순간이었다.

북한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북한은 미국 영국 프랑스 중국 러시아 인도 파키스탄 이스라엘에 이어 세계9번째 핵 보유국이 된다. 또 북한은 핵 보유국이라는 지위에 걸맞은 대접을 받게 된다.

핵을 보유하지 않은 북한은 핵 보유를 둘러싼 국제사회의 협상 대상이었지만, 핵을 보유한 북한은 국제사회의 관리대상으로 바뀐다. 덩달아 북한이 핵을 보유하게 된 이상 일본 한국 등이 자위 차원에서 핵 무장을 추진하는 등 동북아 핵 질서에 대변혁이 잇따를 수 있다.

북한은 그러나 벼랑 끝에 바짝 다가서면서 미국을 몰아세웠지만, 타협의 여지를 완전히 없애지는 않았다. 금지선(Red Line)을 훌쩍 뛰어넘어 상대를 깜짝 놀라게 하면서도, 북한 외무성이 25일 밝힌 이른바 ‘새롭고 대담한 제안’으로 주변국들을 고민하게 만들었다.

대담한 제안은 바로 기존의 핵 폐기나 이전, 핵 개발 계획의 영구 포기의 대가로 불가침조약을 체결하고 경제적 보상을 하라는 것이었다. 1994년 제네바 합의보다 큰 틀에서 ‘패키지 딜’을 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동북아 안보질서에 엄청난 파장을 미칠 핵 보유를 선언함으로써 미국을 압박하고 동시에 양보안을 제시, 협상 의지를 남긴 셈이다.


복도에서“핵 무기 있다”선언

북한이 핵 무기 보유라는 메가톤급 사실을 공식 테이블이 아닌 회담장 복도에서 의도적으로 터뜨린 데는 핵 문제가 북미쌍방의 현안임을 부각시키려는 전략에 따른 것으로 관측된다. 즉 이번 회담의 주최국인 중국 대표가 앉아 있는 곳에서 핵 무기 보유 사실을 시인할 경우 가장 껄끄러운 구도인 ‘핵 문제의 3자 개입’을 인정하게 돼 기존 입장을 번복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또 중국 대표의 면전에서 핵 무기 보유 사실을 시인한다면 한반도 비핵화 원칙을 고수해온 중국의 뒤통수를 치는 격이기도 했다.

사실 중대사실을 회담장 밖에서 터뜨리는 것은 북한의 전형적인 협상술이었다. 남북한과 미국, 중국의 4자 회담에 참가했던 한 관계자는 “북한은 회담이 끝난 후 또는 만찬 직전에 중대문제를 밝힌 사례가 적지 않았다”면서 “북한은 이번에도 깜짝 쇼를 통해 핵 문제를 일괄타결 방식으로 끌고 가려는 전략을 드러냈다”고 말했다.


미국 “놀랄 일 아니다”

그러나 북한의 핵 보유 시인과 공격적 제안을 접한 미국은 예상 외로 침착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즉각 “북한 체제가 다시 핵 공갈 게임으로 돌아갔다”고 발끈했지만, 외교적 해결 기조를 유지할 방침 또한 강조했다.

국무부 등은 “(북한의 핵 무기 보유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라며 평가 절하했다. 애리 플라이셔 백악관 대변인은 “그들의 말은 행동 보다 훨씬 복잡하다”면서 “외교는 과정이며 시간이 걸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같은 발언들이 ‘핵 보유국’ 북한에 대한 미국의 대응이 이전과 동일한 수준이 될 것이라는 뜻은 아닌 것 같다. 외교적 해결의 원칙 아래 북한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일 수 있다는 얘기다. 특히 북한의 핵 보유 인정은 미국에 국제사회가 왜 북한을 제재해야 하는가를 납득시킬 수 있는 명분을 주고 있다.

제재의 구체적인 모습은 유엔에서의 대북 결의안을 끌어내는 수순이 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미국은 무엇보다 북한의 핵 보유 인정으로 북한의 동맹국인 중국이 국제무대에서 북한에 등을 돌릴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워싱턴 포스트는 26일 “미국 관리들은 베이징에서의 나쁜 소식에도 불구, 중국을 대북 제재에 동참시키려는 미국의 오랜 투쟁이 갑자기 결실을 맺게 된 사실에 위안을 받고 있다”며 “미국의 외교관들은 이제 중국의 지지 하에 유엔으로 돌아가기를 원한다”고 밝혔다.


핵무기, 사실이면 어느정도인가

그렇다면 북한이 시인했다는 핵 무기의 수준은 어느 정도일까. 한미 정보 당국은 2000년 이후 공식적으로 북한이 핵 무기를 개발할 수 있는 수준의 플루토늄을 가질 개연성이 클 뿐더러 플루토늄을 이미 갖고 있다고 간주해왔다. 다만 북한이 핵 무기를 1~3기 보유했다고 하더라도 무게가 무겁고 부피가 커서 실전에 사용하기는 어려운 저급한 수준으로 평가해왔다.

관건은 북한의 향후 행보이다. 북한이 8,000개 폐연료봉에 대한 재처리를 통해 추가적으로 플루토늄을 확보한 뒤 핵 실험을 하거나 핵 물질을 밀매하려 들 경우 국제적 비확산 체제가 심각한 위기에 처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미국은 우리 정부가 희망하는 외교적 해결 원칙을 포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래리 닉시 미 의회 조사국 아시아 문제 전문가는 “북한이 핵 실험을 하면 이미 보유한 1,2개의 핵 무기는 없어진다”며 “이것이 곧 북한이 추가 플루토늄 확보에 매달릴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고 말했다.

미국이 북한의 핵 재처리 증거를 확보할 경우 김정일 정권의 붕괴를 노리는 미 정부 내 매파들의 입김은 더욱 드세질 전망이다. 금지선을 넘은 데 대한 보다 직접적이고 광범위한 제재 조치가 따를 수 있는 것이다. 북한의 무기 수출 등 외화벌이를 원천봉쇄하는 ‘플랜 B’, 이른바 ‘맞춤형 봉쇄안’은 여전히 강경파들의 책상에 올려져 있다.

뉴욕 타임스는“재처리가 사실로 확인될 경우 부시 대통령은 북한의 정권을 무너뜨려야 할 것인가, 아니면 협상을 해야 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베이징=이동준기자


입력시간 : 2003-10-01 16:40


베이징=이동준기자 dj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