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 TYK 그룹 김태연 회장의 성공학

CAN DO 정신으로 신화를 쓴 여장부
실리콘밸리 TYK 그룹 김태연 회장의 성공학

“하루에도 5번은 옷을 갈아입는 여자”란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조금도 과장이 아니었다. 금빛으로 물들인 머리, 다소 과하다 싶을 정도의 진한 화장, 500원 짜리 동전보다 더 커 보이는 귀걸이, 유난히 반짝이는 브로치….

“인터뷰 장소의 배경이 검은 색이라는 얘길 듣고 흰색 옷을 입고 나왔다”는 대목에선 그저 감탄할 도리밖에 없었다. 만나는 사람에게 진실한 성의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캔 두(CAN DO)’ 정신으로 실리콘 밸리 신화를 일군 TYK그룹 김태연(57) 회장은 매사에 철저하고 매 순간에 충실한 여자였다. 대명사나 다름 없는 자신감과 화려함으로 2년만에 고국 땅을 밟은 그녀를 만났다.


어릴 적 싹튼 ‘CAN DO’ 정신

당연히 화두는 ‘성공’이었다. ‘사람들은 나를 성공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성공 에너지를 끌어내는 일곱가지 비결’ 등 그녀가 펴낸 저서를 관통하는 주제 역시 성공이었으니까.

그녀에게 ‘남들이 말하는 성공’은 온갖 시련과 실패를 딛고 얻어 낸 소중한 결실이었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성공과 사랑, 그리고 행복을 인스턴트식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마치 돈만 있으면 언제든 백화점에서 구입할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나 봐요. 성공은 그렇게 쉽게 찾아오는 것이 아닌데 말이죠.”

1946년 경북 김천, 남존여비 사상이 유달리 강했던 종가집에서 그녀가 태어났을 때 그녀의 어머니는 미역국 한 그릇도 얻어 먹지 못했다. “아니 계집애를 낳다니. 저 X이 집안을 망칠 X이지.” “이 X아, 차라리 죽어 버려라.” 그렇게 누구로부터 환영 받지 못한 채 그녀는 세상에 태어났다.

하지만 일찌감치 그녀는 세상에 도전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나 보다. 일곱 살이던 어느 해, 삼촌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쳐 달라고 졸라 댔다. “계집애가 무슨 운동이냐. 집안이 안 되려니까 저런 게 태어나서 속을 썩이는구나. 집에서 살림이나 하고 있다 남편감 찾으면 시집이나 갈 생각해라.” 식구들의 반응은 뻔했다.

하지만 그 어린 나이에 그녀는 마음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고 했다. “아니야, 나는 할 수 있어, 여자라고 왜 못해.” ‘그도 할 수 있고, 그녀도 할 수 있는데 나라고 왜 못해(He can do, she can do, why not me)’라는 그녀의 유명한 좌우명은 이 때부터 싹트기 시작했다.

1968년 집안이 어려움을 겪으면서 도망치듯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을 무렵에도 그녀에게 희망이란 것을 찾기는 힘들어 보였다. 23살의 나이에 아무런 기술도 없었던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주유소에서 개스를 넣거나 레스토랑에서 설거지 등 허드렛일을 하는 것이었다.

어느 날엔 정육점에서 개에게 먹일 뼈다귀를 얻어다 끓여 먹기도 했다. 하지만 좌절하지 않았다. “결코 고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육체적으로는 힘든 나날의 연속이었지만 일하는 만큼 대가가 돌아오고, 꿈꾸는 만큼 기회가 주어지는 사회였기에 늘 희망을 안고 살아갔죠.”


“사업은 마음으로 하는 겁니다”

어릴 적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익혔던 태권도가 성공의 밑거름이 될 지 누가 예상했을까. 공인 8단의 실력을 갖춘 그녀는 태권도 사범이 되겠다고 나섰다. 자신이 살고 있던 버몬트주의 한 고등학교에서 어렵게 강의를 할 수 있었고, 그것은 미국 사회 속으로 파고 들 수 있는 더 없이 좋은 기회가 됐다.

게다가 태권도를 가르치며 만난 외국 아이 9명을 양자와 양녀로 들이는 ‘행운’을 얻기도 했다. 그것은 잇단 유산으로 미국 시댁 식구들과의 갈등을 견디지 못하고 결혼한 지 얼마 안 돼 지긋지긋한 생활을 접은 뒤였다. 그녀는 “내가 사업에서 이룬 성공도 이 아이들에게서 얻은 ‘어머니’라는 이름에 비하면 하찮은 것일 뿐”이라고 했다.

“전 인생을 살아갈 때 일기예보처럼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항상 미래에 어떤 일이 생길 것인가를 예측하고 그 속에서 중요한 결정을 하는 거죠.” 80년대 초반, IBM의 퍼스널 컴퓨터가 막 부각되던 무렵, 그녀는 컴퓨터 사업에 뛰어 들겠다고 결심했다.

그녀의 말처럼 일기예보 같은 것이기도 했고, 어떤 영감 같은 것이기도 했다. 83년 지금의 그녀를 있게 한 라이트하우스를 세웠다. 그렇게 19년, 라이트하우스는 연간 매출이 1억달러 이상에 달하고, 반도체 관련 클린룸 모니터링 시스템에서만큼은 세계적으로 독보적인 회사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그녀는 피크, 노스 스타 등 모두 6개 계열사를 거느린 실리콘 밸리에서, 아니 미국 전역에서 주목받는 그룹의 회장으로 우뚝 섰다. 그녀가 비즈니스의 성공을 위해 지켰던 가장 중요한 원칙 중 하나는 ‘철저한 돈 관리’였다.

“제가 6개의 회사를 가지고 있지만 그 중 한 회사가 돈이 필요하다고 해서 나머지 회사에서 절대로 빌려주지 않습니다. 돈을 빌려준다면 그 회사의 창의력과 기회를 빼앗는 것이기 때문이죠.” 그녀는 “사업에는 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동그랗고 길다란 물컵을 들어 보이며 이렇게 되물어 왔다. “이게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물이죠? 물컵이 사각형으로 생겼으면 물도 사각형 모양이 되고 물컵이 삼각형으로 생겼으면 물도 삼각형이 됩니다. 그렇다고 물이 다른 것으로 변하지는 않습니다. 항상 진실되고 성실한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겁니다.”


그녀는 ‘성공한 여자’ 였다

그렇다면 그녀는 ‘남들이 말하는 김태연의 성공’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 걸까. “사람들마다 성공의 기준이 다 다른 거잖아요. 저는 아직도 성공했다는 생각을 단 한번도 해 본적이 없어요.”

지나친 겸손 같기도 했고, 거꾸로 지나친 자만심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솔직했다. “물론 사업으로, 돈으로, 명예로 본다면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어요. 하지만 진짜 성공은 스스로 돌아봤을 때 살아온 시간 동안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 했는지 여부가 아니겠어요? 분명 매 순간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최선을 다 했다고 말할 순 없어요. 그래서 누구나 평생 성공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인가 봐요.”

마지막으로 올해로 한인 미국 이주 100주년을 맞아 그들을 위한 조언을 부탁했다.

“미국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미국 문화에 빨리 흡수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대부분 한국 교포들이 우물 안 개구리 식으로 교포 사회에만 안주하는 현실이 안타깝죠. 모두들 그 울타리를 과감히 벗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인터뷰를 마친 뒤 트레이드 마크가 되다시피 한 목각 아메리칸 인디언 피리를 연주해 보이는 그녀는 일에서도, 삶에서도 ‘성공한 여자’였다.

이영태 기자


입력시간 : 2003-10-02 13:46


이영태 기자 yt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