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식의 문화읽기] 누드 비즈니스


로베르 두아노의 사진 ‘파리의 로미 아트 갤러리의 창에서 찍은 시리즈’는 위트가 돋보이는 작품들이다. 갤러리 내부에 위치하고 있는 카메라는, 쇼윈도 앞에 전시되어 있는 두 편의 작품을 포착하고 있다. 하나의 작품은 쇼윈도와 나란하게 정면으로 전시되어 있고, 여성의 뒷모습 누드를 보여주는 다른 작품은 쇼윈도와 수직을 이루고 있는 옆 벽에 걸려있다.

첫번째 사진은 어느 노부부가 보여주는 시선의 엇갈림을 포착한 것이다. 아내는 정면을 향해 일상적인 그림을 보고 있고, 남편은 오른쪽에 걸린 누드에 눈길을 주고 있다. 두번째 사진은 몸은 정면의 그림을 향하고 있지만 눈은 가자미눈이 되어 오른쪽의 누드를 훔쳐보고 있는 경찰관의 시선을 담았다.

그리고 세번째 사진은 누드를 보며 터져 나오려는 놀람을 억누르느라 눈이 튀어나올 것 같은 중년 부인의 모습이다. 두아노의 사진에 나타나는 각각의 시선들은 알몸과 관련된 인간의 욕망과 도덕적인 규범 사이에서 펼쳐지는 심리적 드라마를 날카롭게 제시하고 있다.

굳이 요즈음이라고 할 수도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 부쩍 ‘누드’ ‘세미 누드’ ‘화보집’ 등과 같은 말을 여러 곳에서 듣게 된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의 여배우나 여가수들이 줄줄이 옷을 벗고 카메라 앞에 설 것이라고 하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스포츠 스타가 자신의 근육질 몸을 만인 앞에 공개할 것이라고도 한다.

임신한 아내와 함께 자신의 누드를 홈페이지에 올렸던 미술교사에 대한 재판과 관련된 기사를 보게 되는가 하면, 인터넷에서는 디지털 카메라로 찍어서 올려놓은 자신과 이성친구의 사진과도 쉽게 접하게 된다.

어디 그뿐인가. 분식점의 누드 김밥, 누드 교과서라는 이름의 수능 참고서, 남녀앵커들이 누드로 뉴스를 진행하는 네이키드 뉴스, 겉에서 봐서는 안 입은 것 같아서 야릇한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누드형 속옷 등등에 이르기까지 누드라는 말은 우리의 일상에 이미 자리를 잡은 지 오래다. 한국의 대중문화에서 이처럼 누드가 홍수처럼 밀려온 시대가 또 있었을까.

그렇다면 왜 이렇게 누드의 열풍이 부는 것일까. 1991년 가수 유연실에서 시작된 누드는 이승희와 서갑숙으로 이어졌고 그때마다 엄청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2000년 이후로는 정양, 하리수, 성현아, 김지현 등이 누드를 통해서 자신들의 육체적 매력을 한껏 과시한 바 있다.

흥미로운 것은 미디어의 발달과 누드의 관계이다. 1990년대의 누드는 거의 대부분 화보집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승희의 누드가 사진파일로 컴퓨터 통신에서 유통되었던 것이 오히려 특기할 만한 일이었다. 반면에 2001년에 누드사진 작업을 했던 정양의 경우는 인터넷을 본격적으로 활용한 누드였고, 동시에 해킹에 의해서 이미지 파일이 유출된 첫번째 사례이기도 했다.

최근의 누드 특히 성현아 이후의 누드는 모바일 체제를 활용한다는 특징을 갖는다. 해킹으로부터 어느 정도 안정적이며, 대금결제수단도 편리하고,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으로 내밀하게 즐길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근의 누드 열풍은 모바일 체제에 근거한 ‘누드 비즈니스’라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모바일 체제에 주력하면서도 인터넷 서비스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인데, 해킹이 누드 사진의 가치를 높여주는 홍보효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범죄의 위험을 무릅쓰면서 해킹하고자 하는 누드라면, 돈을 내고 보거나 소장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방증이 되기 때문이다. 해킹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 누드라면, 별로 매력이 없지 않은가.

누드는 두 가지의 상반된 의미의 경계선에 놓여져 있는 문화적 텍스트이다. 하나는 벗은 몸에 대한 도덕적인 혐오이고, 다른 하나는 있는 그대로의 육체에서 발견되는 자연(自然)이다. 알몸으로 생활하는 동물과 달리, 인간은 의복으로 부끄러움을 표현하는 유일한 동물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알몸은 수성(獸性) 내지는 동물성을 상징한다.

반면에 벗은 몸은 모든 문화적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 또는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생명과 관능의 세계를 상징하기도 한다. 이러한 의미를 존중한다면 누드는 문명에 훼손되지 않은 자연으로서의 몸을 발견하는 예술적인 제의인 셈이다.

누드는 인간의 몸을 미의 차원으로 인도하는 예술의 입구일 수도 있고, 공룡과도 같은 문화산업의 커다란 입일 수도 있다. 물론 누드 비즈니스를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름다움에 대한 획일적인 통념(미끈쭉쭉빵빵)을 일방적으로 강화함으로써, 인간의 몸이 갖는 다양한 아름다움들을 억압하는 일은 경계해야 하지 않을까.

김동식 문화평론가


입력시간 : 2003-10-02 14:49


김동식 문화평론가 tympan@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