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의 춤인생, 무대를 아름다운 춤의 향연

파격과 도발의 춤꾼 안은미
열정의 춤인생, 무대를 아름다운 춤의 향연

가는 곳마다 화제를 뿌리는 이 ‘삭발 무용가’의 취미가 궁금하다. “영화보기, 술 마시고 떠들기, 쇼핑이죠.” 마치 10대 소녀의 말을 듣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착각마저 든다.

영화 보기와 잡담은 예술적 자양분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쇼핑은 또 무언가? 허구한 날 쇼핑을 즐길 만큼 그리 유복할 리도 없고, 무엇보다 작품 준비 때문에 쇼 윈도를 기웃거릴 시간도 없을 텐데.

그러나 사실 세 가지 모두 그의 작품과 밀접히 관련돼 있다. 영화 보거나 술 마시고 떠들다 보면 예술적 감흥도 일고 때론 좋은 아이디어도 나온다. 그가 말하는 ‘쇼핑’이란 유별나다. 모두 무대와 관련돼 있다.

최근 록그룹 ‘어어부 프로젝트(밴드)’와 함께 가졌던 ‘서울, Please’의 경우도 물론 그렇다(6월 5~8일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 드레스는 뉴욕의, 신발은 리스본의 벼룩 시장서 사 두었다. 안은미(40)는 그런 춤꾼이다.


격을 허물고 새로움을 쌓는다

‘무용이 이렇게 과격하고 재미 있고 파격적이어도 좋은가 하는 의문을 던져주는 사람(영화감독 김지운)’, ‘보는 사람이 민망하리만치 초라한 가설 무대의 춤을 통해서도 생애에서 가장 아름답고 눈부신 춤을 보여주는 사람(문화평론가 서동진)’, 피가 나고, 배설하고, 월경하는, 예측할 수 없는 유기체로서의 몸들; 임산부와 노략자는 조심하시라(건축가 조민석)’… .

문화판의 평이다. 안은미는 그런 춤꾼이다. 무대에서건, 단원들과 모여 작품을 두고 열을 올릴 때건, 때때로는 웃통을 훌쩍 벗어버리는 사람, 그가 안은미다. 그를 가릴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6월 5~8일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 무대 역시 격을 허물어 가는 즐거움과 새로움을 쌓아 올려가는 뜨거움이 가득했다. ‘안은미와 어어부 프로젝트’. 울부짖음 같기도 하고 얼치기들의 음악 같기도 한 밴드의 음악을 배경으로 해 안은미는 자신을 여지 없이 망가뜨려 갔다. 1회용 종이컵에 담긴 물을 마시더니 내뿜기를 반복한다.

어떤 물컵에는 검붉은 물감이 들어 있다. 안은미는 이번에는 손으로 물감을 듬뿍 찍어 목이고, 앞가슴이고 구분 없이 쳐 바른다. 가슴을 가리고 있던 하얀 천은 떨어져 나가 아무것도 가리지 않은 유방이 드러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조명은 녹색으로 바뀐다. 빨간 색은 일순 검은 색으로 변한다. 피가 말라 버리면 저렇게 되지 않을까. 그렇게 얼마 동안을 더 돌아 다니더니, 종내는 바닥에 쓰러져 버린다. 신작 ‘제발 날 죽여줘(Please Kill Me)’다.

남성 중심의 사회, 여성이 여성과 대결을 벌여야 하는 사회 속에서 여성에게 닥치는 운명을 충격적으로 그렸다. 객석의 환호는 극장을 무너뜨릴 태세다. 안씨는 “이번 무대에서는 이웃집 사람, 엄마의 얼굴이 다 있으니 쉽게 봐 달라”고 말했다.

무대 한켠에서 그녀의 동작을 하나하나 지켜보며 시종일관 반주를 넣고 있는 록 그룹이 특이하다. 블루스인지 록인지, 단조인지 장조인지 종잡을 수 없는 음악에다 귀곡성으로 절규하는 남성 보컬의 목소리가 한술 더 뜬다. 1990년 이후 쭉 함께 작업해 오고 있는 ‘어어부 밴드’다. 이들의 작업은 거의 즉흥이다. 안은미가 작품을 설명하고 음악적 뼈대를 요구하면 실제 무대에서 즉흥 연주가 펼쳐진다.

보컬 백현진은 “무대에서 연주되는 음악은 뽕짝, 탱고, 왈츠, 아방가르드, 때로는 약장사 음악 등 장르의 구분이 전혀 없다”며 “진짜 의미에서 동시대 현대 음악”이라고 말했다. 박정희 대통령을 음악적으로 비야냥대는 등 ‘허무와 염세를 조장했다’는 판정을 받아 그들의 노래는 현재 50곡이 공중파에서 금지된 상태다.

백현진의 노래는 가사란 없이, 귀신 같은 목소리만을 연발하기 일쑤다. 이들은 “그 동안 작업을 해 오면서 한 번도 마찰은 없었다”고 말했다. 서로가 서로의 속을 훤히 들여다 보고 있어, 다음에 어떤 식으로 받쳐 줘야 할 지 안다는 것. ‘어어부 프로젝트’의 핵심인 백현진과 장영규 모두 말이 너무 없다.

안은미씨와 나누는 대화라고는 쭉 설명한 안은미가 “알지?”라고 한 마디 던지면 “예” 하는 것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안은미는 “나를 위하는 어어부의 마음은 늘 감동적”이라고 말한다. 예술공동체적 신뢰다.


“마음이 뜨거울 때 작품을 해야”

안은미씨는 대중 앞에 서는 것에 매우 적극적이다. 카메라와 마이크 앞에서 자신이 요구할 바를 당당히 요구한다. 또 렌즈의 요구에 대해 당당히 응한다. TV 카메라 앞에서 인터뷰 중 휴대폰이 울리면 “죄송합니다, 선생님”이라고 취재진에게 말하고는 전화를 향해 “미워할 거야”라고 한마디 쏘아 붙인 뒤, 옆으로 가 통화를 마치고 와 인터뷰를 계속한다.

그는 최근 한국의 무용계에 대해서 우려의 시선을 보낸다. 진짜 프로 무용단이 없는 한 한국 무용의 진정한 발전은 기대하기 힘들다는 지적이다. 그는 “우리는 대학 무용단과 직업 무용단만 있다”며 “21세기를 이해하지 못 하는 작품으로 세계 시장에 진출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1992년 이화여대 무용학과 대학원을 졸업한 그녀는 곧 미국으로 유학해 현대 무용어법을 연구한 뒤, 두각을 나타냈다. 졸업하던 바로 그 해 열린 MBC 창작무용제에서 인간의 자유 의지를 담은 솔로 작품 ‘비상 의지’로 우수상을 받은 것은 작은 출발이었다.

이어 94년 ‘알리랄 알라리오’로 제 18회 서울무용제 연기상을 수상, 분단 등 현실의 문제를 무용으로 형상화해 내기 시작했다. 뉴욕의 예술학교 DTW에서 현대 무용을 익힌 뒤 97년 귀국했다. 당시 그의 바램은 ‘재미’ 무용가가 아니라 ‘재미 있는’ 무용가가 되는 것이었다.

고전이건 현대건, 클래식 음악 반주를 배경으로 발레 동작이 펼쳐지던 기존의 음악 무대는 기상(奇想)이 가득 찬 무대로 변했다. 클래식 음악 대신 에디트 피아프, 장사익, 김대환 등 이른바 대중 음악이 전면에 나섰다. 바뀌어진 건 무용쪽이 더 했다. 토 슈즈는 사라져 버렸고, 그 대신 피에로 옷이나 넝마나 다름 없는 의복이 등장했다. 반응은 뜨거웠다.

2000년 이후 대구시립무용단 단장으로 있는 그는 거침 없는 스텝으로 현대 무용은 즐거운 것이라는 인식을 먼저 대구 사람들에게, 다음 서울 사람들에게 심어 오고 있다. 서울의 LG 아트센터와 대구에서 펼쳐졌던 ‘춘향이’를 비롯, 5월 17일 대구문예회관대극장에서 열린 ‘하늘 고수’ 등은 대구 시민에게 현대 무용의 즐거움을 선사했던 무대다.

티켓이 매진되는 등 대구 시민이 보여주고 있는 성원 덕에 그는 오늘도 카드 빚만 늘리는 무용 공연에 손을 떼지 못 하고 있다. 그 이유는 단순 명쾌하다. 자신의 마음이 뜨거울 때 작품을 해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다.

2년 전 만든 웹 사이트(www.ahnsance.com)에는 그의 도발적 무대에 관한 여러 정보들이 가득 하다. 최근 영화 ‘복수는 나의 것’과 ‘살인의 추억’을 재미 있게 봤다는 그녀는 독신이다. “남자가 없어 결혼을 못 한 것”이라고 이유를 설명하는 그녀는 “혼자 있으니 밥을 거르게 돼 위장이 안 좋다”고 독신의 불편에 대해 말했다.

영화를 위한 안무 작업을 해 봤고, 노래도 즐겨 부른다는 그녀는 작품이 좋다면 영화에도 도전해 보겠다고 말했다. 언젠가 그녀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무대에서 춤출 때면 꼬리뼈에 성냥불을 댕긴 듯 에너지가 폭발한다”고. 기상(奇想)으로 가득찬 자신의 무대에 대한 가장 즉물적인, 그래서 가장 직접적인, 그러므로 가장 안은미적인 답이다. 세상은 언제나 그의 꼬리뼈에 불을 댕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녀와의 충돌을 항상 예감하고 있는 편이 낫다.

장병욱 차장


입력시간 : 2003-10-02 15:00


장병욱 차장 aj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