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불빛 뒤엔 온톤 지뢰밭"조명과 함께 30년, 스트레스와 성취감 동시에

[직업의 세계-6] MBC 조명감독 정각종
"화려한 불빛 뒤엔 온톤 지뢰밭"
조명과 함께 30년, 스트레스와 성취감 동시에


정각종(55)씨의 간담을 서늘케 한 30분짜리 무용담. 출근준비를 하고 있던 그에게 직원들의 다급한 전화가 날아들었다. 곧 새벽 생방송에 들어가야 하는데 조명 콘솔에 문제가 생겨 스튜디오가 온통 칠흑이라고 했다. 현장이 벌집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차를 몰고 달려가보니 방송 시작 30분전. 들은 대로 콘솔의 고장으로 조명이 죄다 먹통이었다. PD가 급한 대로 옆 스튜디오로라도 옮겨보자고 했다. 하지만 세트가 달라서 또 문제. 꼼짝없는 사면초가였다. 유례없는 초대형 방송 사고가 시시각각 임박하고 있었다.

갑자기 정씨가 PD에게 ‘방법이 있다!’고 외쳤다. 그리고 조명팀 2명과 함께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얼마 뒤 스태프를 모두 놀라게 하는 일이 벌어졌다.

“케이블을 가져와 고장나지 않은 옆 방 콘솔에다 조명등을 다시 연결했습니다. 최소한 방송이 못 나가는 사태는 어떻게든 피하게 정면 라이트만이라도 급히 연결을 한 거지요. 그런데 시계를 보니 아직도 시간이 남은 겁니다. 그럼 하나 더 연결하자, 그리고도 시간이 있길래 하나 더, 하나 더, 그렇게 정신없이 계속 연결하다 보니까 어느새 방송 전까지 다 연결이 돼 버린 겁니다.

결국 평소와 똑같이 방송이 나갔지요. 나중에 다른 분들까지 뒤늦게 그 사실을 듣고 굉장히 놀라시더라구요. 화면이 똑같길래 전혀 몰랐다, 터졌으면 아주 큰 문제가 될뻔했는데, 어떻게 그 상황에 그럴 생각을 할 수 있었냐구요. 아마도 그런 게 바로 경험이고 노하우가 아닌가 싶습니다.”


빛의 세계에 매료

MBC 조명감독 정각종씨는 조명분야에서 일한지 30여년째다. 젊은 시절 연극공연 등을 보며 빛의 세계에 매료돼 국립극장에 입단, 약 16년간 갖가지 공연의 무대 조명을 맡아 활동하던 중 1987년 MBC에 스카웃돼 오늘까지 방송의 길을 걸어왔다.

특히 쇼 분야에서 맹활약을 벌여온 그는 ‘가요초대석’ ‘쇼,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에서 출발해 현재 ‘가요콘서트’ 등의 조명을 맡고 있다. 2001년에는 한국방송대상 조명상을 수상한 바 있다.

방송 중에서도 쇼 프로그램은 조명팀에게 가장 고단위 집중을 요하는 장르 중 하나다. 방송 조명이란 단순히 스튜디오를 밝히는 기술이 아니라 빛을 이용한 또하나의 창작예술이다. 쓰이는 조명기구만 1,000여종. 스포트 라이트와 기본 조명인 베이스 라이트외에도 특정 효과를 내기 위해 선택적으로 사용하는 특수조명 기구까지 모두 합친 수다.

밝기도 500와트에서 2,000와트에까지 이른다. 그것들이 내뿜는 열기만으로도 가히 위협적이다. 앞을 가려놓은 종이 필터가 타기도 하고, 조명인 상당수의 팔뚝에 전구를 교체하다가 데인 화상 자국이 훈장처럼 나 있다.

한 프로그램의 조명계획을 짜자면 미리 대본을 읽고 내용을 파악한 뒤 PD와 미술, 음악 스태프와 협의해 등장 인물과 내용, 동선 등을 자로 재듯 하나하나 계산해 서로의 호흡과 타이밍을 맞춘다. 언제 어떤 색으로 어느 위치에서 얼마만한 각도로 어떤 조명기구를 사용해 비출 것인지 상세그림을 그리듯 조명을 ‘디자인’하는 것이다.

여기까지만 하면 일의 절반은 마친 셈이다. 짜여진 계획을 컴퓨터에 입력한 뒤 방송 때 간단한 콘솔 조작만으로도 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동시에 스튜디오에서는 기계로 해결할 수 없는 조명, 즉 특정 인물이나 물체를 비추는 핀 조명 등을 담당한 조명 단원들이 또 다른 손발이 되어준다.


가요프로그램은 긴장의 연속

4~5분 단위로 가수와 노래가 바톤 터치로 밀려드는 가요 프로그램은 특히 어렵다. 조명도 그만큼 바빠진다. 개중 펑키 락처럼 요란찬란한 노래라도 만났다 하면 짧게는 몇초 단위로 조명을 바꿔대느라 숨이 가쁘다. 대개 방송 며칠 전부터 출연 가수들의 노래 테이프와 방송진행 순서표를 PD로부터 건네받은 뒤 노래의 소절, 소절까지 잘라 해부하며 철저히 준비한다.

무대를 요란하게 휘젓고 다니는 가수는 무엇보다 요주의. 미리 동선을 확인해 두지 않으면 방송 도중 때아닌 가수와 핀 조명의 술래잡기가 벌어져 망신사기 딱 좋다.

무대가 야외로 나가는 날은 더욱 긴장일색이다. 야외용 조명장비는 실내용과 달라 주로 임대업체에 용역을 주어 해결한다. 그래도 연출과 현장 지휘의 임무는 방송사의 몫. 비가 오면 갖가지 사고의 위험까지 겹친다. 비오는 해변에서 공연하던 날, 모래사장에 세운 조명시설이 쓰러질세라 정씨는 방송 내내 모래밭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런 날은 장갑까지 끼고 램프를 만져도 찌릿찌릿 전류가 손을 타고 흐른다. 감전사고의 두려움이 항상 따라다닌다.

야외 방송에 필수로 쓰이는 발전기는 조명팀의 생명선이나 다름없다. 발전기에 탈이 나면 바로 정전사태로 이어진다. 정씨가 아연실색한 사건이 있다. 대학생 이상은의 스타탄생이 예고되었던 무대, 88년 강변가요제때의 일이다. 마침내 대상이 발표되고, 수상자 이상은이 ‘담다디’를 재창하는 것으로 피날레가 장식되고 있었다.

그런데 채 한두 소절이 나갔을까, 갑자기 조명이 모두 꺼져버렸다. 난데없는 상황에 제작팀이 발칵 뒤집혔다. 다행히 해가 아직 완전히 지지 않아 주변이 비교적 환했던 것은 이들에게 천우신조였다. 아찔한 가슴을 안고 겨우 방송을 마친 뒤 부랴부랴 사고의 원인을 추적한 조명팀, 어처구니 없는 사실을 알아냈다. 방송중 발전차 옆을 지나가던 행인이 음료수를 마시고 빈 깡통을 발전기에 던지면서 쇼트가 일어나 전력공급이 끊기는, 그 사단이 벌어진 것이다.

그 같은 사고를 막기위해 이제는 주 발전기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2차, 3차 예비 발전기로 자동 연결되는 철벽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 생방송이 생명인 뉴스의 경우, 아예 스튜디오의 배선과는 다른 별도의 라인을 2중, 3중으로 연결해 조명사고에 무장하고 있다.


콘솔 앞에 앉기까지 10년

어렵고 힘들지만 성취의 즐거움도 적지 않다. 세계적인 명성만큼이나 그 까탈스러움도 국제급이었던 테너가수 파바로티 공연은 정씨에게 스트레스와 기쁨을 동시에 주고 갔다. 1만여명이 운집했던 2000년 잠실 종합운동장의 ‘파바로티의 한반도 평화 콘서트’ 때의 기억이다.

“파바로티는 조명이 마음에 안 들면 공연을 하다가도 그냥 돌아가 버린다는 얘기를 그전부터 들었습니다. 실제로 그런 전력이 있구요. ‘내가 할 때 그러면 어쩌지?’ 더 걱정스러웠는데, 나중에 파바로티측에서 온 스태프와 협의를 해보니, 정말 주문사항이 그렇게 까다로울 수가 없는 거예요. 조명은 45도 각도로 들어와야 된다, 눈이 부시면 안 된다, 객석에는 절대 조명을 주지 마라, 빛을 받는 건 오로지 파바로티뿐이라야 된다 등등.

하지만 방송이라는 건 관객들이 열광하는 모습도 같이 담아줘야 실황 느낌이 사는 건데, 객석에 조명을 주지 말라면 촬영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또 관중은 관중대로 불이 안 들어오니까 어둡다고 난리지, 그래도 파바로티쪽에선 안 된다고 그러지, 도저히 안돼서 나중에 담판을 했습니다.

결국 객석에도 조금 조명을 주는 걸로 합의가 됐는데, 그렇게 방송을 하면서도 저러다 언제 또 마음에 안 든다고 갑자기 공연을 그만두고 가버리는 건 아닌지, 계속 조마조마한 겁니다. 끝난 뒤 반응이요? ‘공연이 잘 되었다’고 흡족해하며 떠났습니다. 국내에서도 그런 대형 경기장에서 치른 음악회로는 거의 처음이었던 큰 공연을, 어쨌든 별 무리없이 무사히 치뤄냈다는 게 뭣보다 마음 뿌듯하고…, 제가 그후 다른 공연을 하는데도 아주 좋은 경험이 되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방송의 지뢰밭을 이만큼 무사히 헤쳐오기까지 국립극장 시절에 거친 혹독한 훈련기를 빼놓을 수 없다. 예술 공연이란 항상 라이브일 수 밖에 없다. 방송으로 치면 엄청난 횟수와 강도의 생방송 예행연습을 일찌감치 치른 셈이다.

콘솔 앞에 앉기까지만 10년 세월이 걸렸다. 그때까지 내내 무대 곁만 지키며 막이 바뀔 때마다 조명등을 치우거나 설치하는 등 온갖 자질구레한 현장 업무 속에서 기본기를 닦았다. 무대에서 조명실로 ‘승급’된 후에도 너무 긴장한 나머지 콘솔의 버튼을 잘못 눌러 엉뚱한 조명을 내보내 심한 질책을 받기도 하고, 공연 때만 되면 심장이 아프도록 두근대던 일, 손바닥에 끊임없이 고이던 땀이 아직도 그의 머릿속에 살아 있다.

요즘같은 자동화 시스템이 등장한 것도 한참 뒤의 일이다. 70년대만 해도 조명의 밝고 어둡기를 조절할 때면 소금물이 든 옹기독에다 구리 덩어리를 담궈 해결하는 것이 당시의 ‘첨단’이었다. 조명기의 높낮이를 바꿀 때도 일일이 손으로 맞춰야 했다. 하나하나 로프로 매달아 그 줄을 당기거나 늦춰가며 위치를 맞춘 뒤 쇳덩어리로 눌러 고정시킨 것이다.

여름이면 잠깐만 일해도 온 몸이 땀범벅이었다. 오죽하면 ‘삐딱선’을 타다가 밉보인 직원은 상급자가 일부러 그리 보내기도 했다. ‘올려’ ‘내려’를 수없이 반복하며 진탕 골탕을 먹이는 것이다. 콘솔이 만능을 발휘하는 요즘은 통하지 않는 전설이다.

“방송계로 온 다음에는 실제 색상과 모니터상 조명색의 차이에 적응하느라 한동안 애를 먹었습니다. 지금이야 눈이 아예 모니터처럼 바뀌어서 보지요. 그외에도, 가령 여러 대의 조명이 한꺼번에 한 곳을 비추고 있더라도 그 중 어느 전구가 나갔는지, 어디 어느쪽의 불이 안 들어오는지 바로 집어낼 수 있을 만큼 노하우가 쌓여있습니다.

어떨 때는 전혀 사고는 아니지만 장비라든가 갑작스런 어떤 상황으로 인해 원래 맞춰놓은 조명색이 제대로 나오지 않고 조금이라도 흐트러질 때, 남의 지적을 받고 안 받고를 떠나서 뭣보다 제 자신이 무척 자존심 상합니다.”


창의력 필요로 하는 작업

방송 조명 분야에서 일하자면 방송사의 기술직 공채를 통해 입사하거나 외부의 용역업체에 취업하는 방법이 있다. 바로 방송사에 진입하지 않고도 외부 용역업체에서 일하며 인정받아 케이블 TV나 민영방송으로 옮긴 사례도 적지 않다. 단순한 기술자가 아니라 조명 연출가로서의 꿈을 갖고 있다면 무엇보다 창의력이 중요하다고 정씨는 강조한다. 경쟁사는 물론 자신의 틀까지도 스스로 무너뜨리고 다시 쌓을 수 있는 사람만이 앞설 수 있다.

한때 방송반 여고생들의 팬레터까지 받기도 했던 베테랑 정씨. 혹시 그와 만날 기회가 있더라도 웬만하면 영화나 드라마 내용에 대한 얘기는 그에게 묻지 말기를 참고로 권한다. 그는 남들과 똑같이 앉아 영화를 보고도, 보고 나면 줄거리가 뭐였는지 한 토막도 입을 떼지 못하는 외눈박이다. 그럼 대체 뭘 본 걸까. 번번이 ‘이러면 안되는데…’ 자신도 걱정을 하면서도 뭐든 봤다 하면 조명밖에 남지않는 사람이다. 벌써 30여년째 증세다.

정영주


입력시간 : 2003-10-02 17:52


정영주 pinplus@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