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질서, 문화 바탕 위에 재편돼야"

[석학에게 듣는다] 김여수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사무총장
"세계질서, 문화 바탕 위에 재편돼야"

열기가 올라가던 인터뷰는 뜻밖의 일로 중단돼야 했다. 정오를 조금 넘긴 서울 중구 명동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사무총장실에 도시락이 배달돼 온 때문이었다. 도시락을 알뜰히 비우고 난 김여수(67)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사무총장은 못 다 한 이야기를 펼쳐 나갔다. 점심 직후 현안 사업에 대한 업무를 처리해야 하는 선생은 뛰며 생각하는 철학자다.

“제대로 된 피서 한 번 가고 싶은데, 어떻게 될 지….” 그러나 올여름은 아무래도 힘들 것 같다. 제 21차 세계 철학자 대회 개최지가 그의 피서지라 해야 할 판이다. 24년째 세계 철학자 대회 연맹(FISP)의 부회장직을 맡고 있는 사람으로서 프로그램 수립 업무에 빠질 수 없기 때문이다. 유네스코 본부 철학윤리국 국장으로 있던 1995~2000년에 업무 관계로 여러 차례 들렀던 도시, 이스탄불이 그 장소다.

아시아와 유럽의 교차로였던 오토만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갖춰진 다양한 풍물도 기다리고 있다. “흑해 입구 보스포로스 해협에 위치해 유럽과 아시아를 가르는 지점이죠. 기독교적 문화 유산이 가득한, 아주 아름답고 잠재력 있는 도시입니다.” 8월 10~17일 세계 철학자 대회 연맹이 주최하는 제 21차 세계 철학자 대회가 열리는 곳이다. 한국에 대해 올해 그 대회가 갖는 의미는 각별하다.

세계 철학자 대회의 차기 개최지가 바로 대회 기간중인 8월 13일 그 자리에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한국은 현재 2개 도시와 함께 강력한 후보지로 물망에 올라 있다. 세계 인류 문화의 고도(古都)인 그리스의 아테네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가 나머지 두 도시다. 문화적 의미를 따져보자면 분명 서울보다 한 수 위다.

특히 아테네는 고대 그리스 문화의 요람이었던 아테네 도서관의 확장 사업을 막 시작했고, 알렉산드리아는 차기 올림픽 개최 예정지로 부각되고 있다. ‘객관적 전력’으로 보자면 이만저만한 우위가 아니다. 선생은 아예 “(그 두 곳은) 브랜드 네임이 서울보다 엄청나게 크다”며 직설적으로 표현한다.


세계 철학자 대회 유치위해 동분서주

일생에 한 번 볼까말까 한 철학 대회를 앞두고, 무슨 상업 협상다루듯 승산 운운하는 자체가 지나친 일일 지 모른다. 노무현 대통령은 6월 14일 쿠쿠라디 회장에게 편지를 보내, 2008년 세계 철학자 대회는 한국에서 개최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노 대통령은 이 편지에서 “한반도는 전쟁과 빈곤을 성공적으로 극복하여 역동적인 근대 국가가 됐다”며 “다양한 문화들이 만나 창조적 대화를 나눴던 한반도에서 전통과 미래를 조화시키는 새로운 방식의 문화를 만들어 나가자”고 제안했다. 이 서한은 그가 대통령에게 요청해 만들어진 것이다. 인문학자로서는 매우 폭넓은 인간 관계가 다시금 상기되는 대목이다. 실제로 그는 국무총리 산하 인문정책연구위원회의 위원장이기도 하다.

2010년 동계 올림픽 유치 외교의 결과에서 국민은 입속 가득히 괴어 오는 씁쓸함을 맛 봐야 했다. 현재 어느 곳 하나 시원한 구석이라곤 없는 한국 사회에서 국민은 한줄기 후련한 소식에 기대를 걸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결과는 허망했다. 그 동안 우리는 일회적 축제성 문화에 너무 길들여져 온 것은 아닐까. 유치 실패가 던져 준 충격에 온 국민이 분노하는 것은 어쩌면 그 증거가 아닐까. 사실 ‘세계 철학자 대회’는 학술 대회지만, 가치나 희소성에 있어서 여타 행사가 비길 바 못 된다.

그는 “한국은 작지만, 아주 특이한 역사적 경험을 한 나라”라며 “한국이 이 세계사적 전환기에 적극 참여한다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라고 말했다. 선생이 한국을 차기의 유력 개최지로 보는 이유다. 서양 문명 중심의 세계화 과정이 전통 가치의 포기를 전제로 한 이상, 역기능이 첨예하게 드러나고 있는 현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문명 간의 대화라고 그는 역설했다. 바로 그 작업에서 한국이 전체적인 틀을 제공하는 것이다.

일반에게는 생소한 이 대회는 전세계 최고의 철학자들이 5년마다 한 번씩 전지구적 문제를 철학적으로 논의하거나, 그 동안의 철학적 연구 결과를 두고 갖는 대토론회이다. 김 총장은 “책을 읽고 교양을 쌓아 가는 고전적 가치가 이 급변하는 시대에 과학과 기술의 합리성과 어떤 관계를 맺는 것인가를 함께 고민하는 자리”라고 의의를 밝혔다. 인간이 현재까지 일궈 놓은 문명은 현재 어디까지 와 있으며, 우리 시대 철학과 세계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밝히는 자리다.

6월 25일 김 총장 주재로 유네스코회관에서 ‘문화다양성 국제 규약 제정의 가능성과 전망’이란 제하로 열렸던 세미나는 21차 대회에서 한국측이 펼치게 될 입장을 예고한 바 있다. 신자유주의 세계 질서가 확립되면서 굳어져 가고 있는 세계화 현상에 대응해야 한다는 논의가 주류였다. 자본주의적이고 남성문화적 문화 등 그 흐름에 딸려 들어 오는 문화 현상을 경계해야 한다는 의견도 높은 지지를 받았다.

그는 “이 일이 성사된다면 아시아권에서 처음 열리는 세계 철학자 대회”라고 밝혔다. 일본이나 중국 등 나름대로 철학의 기틀을 쌓은 국가를 제치고 가장 큰 행사를 치르는 셈이다. 최근 부쩍 상승한 서울의 역사적ㆍ문화적 중요성에 비춰볼 때, 승산은 충분히 있다고 부회장이기도 한 그는 전망했다. 1979년 부회장으로 선출된 김 총장은 올초 독일의 한스 랭크(과학철학ㆍ윤리학), 프랑스의 페라리(형이상학) 등 해외 석학들의 추천으로 차기 회장의 물망으로도 올라 있는 상태다.

FISP는 한국철학회, 미국철학회, 국제형이상학회, 국제사회철학회 등 세계 150개 철학 단체가 결성한 세계 최대의 철학단체다. 소속단체 중 규모가 큰 것은 회원수가 1,000명 넘는 것도 있다. 현재 회장은 터키의 윤리학자인 쿠츠라디. 하제테페 대학의 교수인 그는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을만큼, 강단과 현실에서 두루 인정받고 있다.

FISP 회장 최대의 임무는 5년마다 한번씩 치러지는 이 대회가 원만하게 계속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일이다. 생태, 여성, 사회적 소수 문제 등 당대의 이슈를 철학적으로 밝혀내고 전망을 제시하는 일 또한 중요한 과제다. 분석철학, 해석학(실존철학ㆍ현상학 등), 사회철학(마르크시즘 등) 등 셋으로 대별되는 현대철학의 석학들이 빚어 올리는 열기로 한국에 모처럼 일급 지성인들이 모여 머리를 맞댄다.


한국의 문화적 성숙도 가늠할 기회

이 일은 그러나 현실적으로도 만만찮은 노력을 요한다. 2,500~3,000명의 석학들이 한꺼번에 움직이는 행사이기 때문이다. 김 선생은 “한 번 개최하려면 적어도 15억여원의 예산이 필요하다”며 “참가자들이 내는 비용을 제외한 나머지는 주최지에서 부담해야 한다”고 말했다.

1998년의 경우 보스턴에서 개최됐던 이 대회는 큰 호텔 둘을 전세 내야 했는데, 우리의 경우는 코엑스나 상암경기장 등 대형 시설이 필요할 것이라는 예상이다. 선생은 또 “철학적으로는 오지인 한국에 세계적 석학들을 오게 하려면 홍보 등 유도 작업에서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대회야말로 한국의 문화적 성숙도를 가늠하는 자리가 될 것이고 말했다.

그에게는 세계성과 한국성 등 두 가지 특성이 공존한다.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의 사무총장인 동시에 세계 유네스코의 부회장이라는 현재의 역할이 그러한 상황을 말해준다. 또 차기 세계 철학자 대회 조직위원장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인문-사회학자 중 최상급의 세계적 인프라를 구축한 셈이다.

1996년 FISP가 주최했던 ‘아시아-아프리카 철학 회의’에서 사무총장으로 뛰었던 경력은 그 중 하나. 당시 회의의 주제는 ‘문화 중심의 대이동’으로, 동진(東進)해 오는 현대 서구 문화를 철학자들은 명확히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번 대회에서 한국측 대표들은 타문화의 수용을 전제로, 문화의 다양성이란 문제를 논의하게 된다.

선생은 그를 실현하기 위한 현실적 방안으로 ‘문화 종합’이란 원칙을 제시했다. 각 시대와 장소의 문화들은 문화 종합, 즉 여러 제약 조건들 안에서 그 문화의 생존과 번영을 가장 효과적으로 보장해 줄 수 있는 최적의 종합, 즉 관념 가치 관행들의 최적의 종합을 창출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것은 자기의 문화는 다른 것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편견에서 벗어난 ‘반성적 평형 상태’ 아래에서 가능하다는 평소의 지론이다. 보편성이란 이린?획득된다는 痼甄? 이제 한걸음 더 나아가, 수 백년 동안 서양인들에 의해 만들어졌던 세계질서의 바탕을 이제는 새로운 문화 종합으로 바꿔 놓는 작업에 한국이 앞장 서야 한다는 지론이다.


세계질서의 근간은 문화종합

1992년 철학자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언과 마지막 인간’에서 자유민주주의 시장 체제의 최종적 승리를 선언했다. 그러나 탈냉전의 세계는 서양 유일 체제의 압도적 위력속에서 문화 종교 인종간의 해묵은 반목과 분쟁을 다시 역사의 전면으로 부각시키는 뜻밖의 계기를 가져왔다. 구 소련과 동구권의 민족 분열, 유럽에서의 외국인 배척 운동 등 도처의 파편화 현상이 그것이다.

또 탈냉전 시대의 유일한 초강대국으로서 미국의 군사력과 정치력은 세계 도처에서 도전 받고 있다. 그것은 지배적 문화란 퇴조해 버린 오늘날의 문화 상황에 밀려 미국 사회의 원자화가 급격하게 진행된 때문이다.

선생은 “국제화란 선진 사회에서 만들어진 국제적 게임의 규칙을 내면화하는 과정”이라며 “그러나 국제 질서를 어떤 방식으로 우리가 추구하는 삶의 목표와 융화되도록 정할 수 있느냐는 것은 우리의 임무”라고 말했다. 국제 질서의 재창조 과정에서 우리가 적극 참여할 때라는 것이다.

한국의 철학을 대표하는 단체였으나 임의단체나 다름 없었던 ‘대한철학회’를 1995년 사단법인 ‘한국철학회’로 개칭하고 법인화해 한국 철학의 인프라를 구축한 것은 행동하는 철학자로서의 당연한 행보였다. 당장 1995년 8월 ‘한민족 철학자 대회’가 열린 것은 이후 4년마다 국내는 물론 아시아-아프리카 지역의 철학자들이 모여 같은 이름의 행사를 이어 오게 된 기틀이었다.

이 과정에서 유치한 기업ㆍ방송사 등과의 협찬은 철학의 대중화를 향한 실질적 발걸음이었다. 1995~1996년 그가 한국철학회 회장으로 재직중 이뤄진 일들이다. 그리고 이번엔 동양 초유의 세계 철학자 대회다.

이 시대, 철학의 입지와 발언 영역을 넓히는 작업에 늘 앞장 서는 선생에게 휴가란 당분간은 먼 나라 이야기일 듯하다.

장병욱 차장


입력시간 : 2003-10-02 17:55


장병욱 차장 aj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