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BBC 방송, 토니 블레어 총리 상대로 힘겨운 '진실게임'

의도적 '이라크 죽이기'를 심판한다
영국 BBC 방송, 토니 블레어 총리 상대로 힘겨운 '진실게임'

공영방송의 대명사인 영국 BBC 방송이 힘겨운 ‘단독 전쟁’을 벌이고 있다.

전쟁 상대는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이고, 전쟁 목적은 이라크 대량살상무기(WMD) 위협을 과대 포장한 영국 정부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이다. 전황은 BBC에게 결코 유리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전쟁에서 완패할 가능성도 거의 없는 듯 하다.


이라크 전쟁보도 비난이 발단

BBC 최고 의사 결정 기구인 이사회는 7일 성명을 발표, 블레어 총리와의 일전 불사를 선언했다. 이사회가 자사 기자의 보도 내용을 힐난한 블레어를 향해 “BBC가 전쟁에 반대하는 편견을 갖고 보도했다는 그의 비난은 취소돼야 한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성명은 다음날로 예정됐던 해당 기사에 대한 의회의 예비 판정을 앞두고 나왔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을 받았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블레어의 주장을 수용할 수 없고 BBC로서는 끝장을 보겠다는 의지로 읽혀졌다.

이렇게 된 이상 블레어 총리도 정치 생명을 걸고 물러 설 수 없는 한판 승부를 해야 할 처지가 됐다. BBC측 선언을 전해들은 블레어는 “정보를 왜곡 조작해 이라크 전쟁을 일으켰다는 보도는 총리의 존엄성과 인격을 깡그리 훼손하는 것”이라며 날을 세웠다. 정보 조작이 사실로 드러날 경우 국민과 의회를 속이고 영국을 전쟁 속으로 몰아넣은 치욕적인 인물로 평가될 것이기 때문이다.

양측이 건곤일척의 싸움을 벌이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5월 29일 BBC 기자가 지난해 9월 영국 총리실의 이라크 WMD 정보 왜곡 의혹을 보도한 것. 당시 BBC 앤드루 길리건 기자는 정보 소식통을 인용해 “지난해 9월 이라크가 45분만에 생화학 무기를 발사할 수 있다는 내용으로 정보를 윤색하라고 총리 측근이 정보 당국에 요청했다”고 보도했다.

길리건은 후속 보도를 통해 총리 측근은 블레어의 오른팔 알라스테어 캠벨 총리실 공보수석이라고 공개했다. 그러자 캠벨은 BBC 보도를 ‘거짓’이라고 폄하하면서 BBC의 사과를 요구했고, BBC는 자체 보도 경위 조사를 벌인 뒤 캠벨의 요구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이번 갈등은 8일 영국 의회가 이라크 WMD 공개 과정에 대한 조사 보고서를 내면서 1라운드를 끝냈다. 결과는 BBC의 판정승인 듯 하다. 의회는 보고서를 통해 캠벨이 정보 조작에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물증을 찾아낼 수 없었다고 밝혔지만 전반적으로 영국 정부가 이라크 정보를 잘못 처리, 의회와 국민을 오도한 측면이 있다고 밝혔다.

한마디로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다는 것이다. 보고서는 “정부가 45분만에 생화학 무기를 발사할 수 있다는 측면을 지나치게 부각했고, 통상의 정보 문서보다는 단정적인 용어를 사용한 것이 인정된다”고 밝혔다.

이 결론은 문제의 정보가 발표되기 전 진행된 1차 합동정보회의에서 당국자들에게 이미 회람됐고, 2차 회의에만 참석한 캠벨은 “정보 문서는 국민에게 쉽게 전달될 수 있도록 ‘효과적으로’ 작성돼야 한다”고만 말했다는 잭 스트로 외무장관등의 진술에 터잡고 있다. 보는 각도에 따라서는 캠벨과 총리실에 대한 의혹이 전혀 가시지 않은 것이다. 의회는 또 “선출되지 않은 임명직 공직자인 캠벨이 정보회의를 주재한 것은 합당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중도 성향의 파이낸셜 타임스가 “사과할 당사자는 BBC가 아니라 블레어 총리”라는 사설을 통해 BBC의 승리를 선언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영국 언론들은 길리건에게 주어진 당시 취재환경을 살피건대 그의 보도는 공익에 부합한다는 BBC측 주장에 공감하고 있다. 여기에는 진실 보도를 위해서는 오류가 스며들 여지마저도 허용될 수 밖에 없다는 전통적인 영국의 언론관이 녹아있다.


블레어 "거짓말 한적 없다"

1라운드가 이렇게 끝났지만 블레어로서는 순순히 결과를 인정할 수 없었다. 블레어는 보고서 발표 후 의회에 출석, “결코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물론 런던 시중 여론은 이를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BBC도 영국 정부가 밝혔던 니제르로부터의 이라크의 우라늄 구입 시도 정보도 허위라는 후속 기사들을 잇따라 내보냈다.

이런 와중에 블레어는 맒??일격을 BBC에 날렸다. 영국 국방부가 길리건 기자에게 정보를 준 소식통을 색출한 것이다. 국방부는 10일 길리건에게 정보를 준 이로 확산 군축 담당 정부 고문인 데이비드 켈리 박사를 지목하면서 “켈리는 문제의 정보 작성에 관여할 위치가 아니다”라며 공세를 취했다. 점잖은 영국사회에서 정보 제공자를 색출할 정도면 사실 막가자는 얘기나 다름없다.

그러나 BBC는 취재원 보호를 명분으로 길리건이 인용한 당국자의 실명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BBC는 고위 당국자들의 말을 인용, “정부내 최고위 관계자들 조차도 이제 더 이상 이라크에서 WMD가 발견될 것으로 믿지 않는다”며 비판의 수위를 한껏 높이고 있다.

블레어로서는 이번 싸움을 길리건 기자의 보도 건으로만 한정, 명예훼손 사건으로 다루려는 입장인 반면 BBC는 이라크 전쟁 명분 전반으로 문제를 확산시키려는 의도가 더욱 분명해지고 있다.

BBC의 전쟁이 이같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사건의 파장이 미국으로 퍼진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영국 의회 보고서가 나올 무렵 미 백악관은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이 올 1월 연설에서 밝힌 니제르 우라늄 구입시도 정보는 연설 후 허위 정보로 판명됐다고 시인했다.

하지만 워싱턴 포스트 등 미국 언론들은 중앙정보국(CIA)이 연설 전에 정보의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했다고 추적 보도, 백악관을 곤경에 빠뜨리고 있다. 미 상원에서도 정부의 이라크 WMD 관련 정보 공개과정을 전면 조사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하워드 딘 전 버몬트주 주지사 등 민주당 대선 경선 주자들도 부시를 거짓말쟁이로 몰아붙이며 공세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다.

결국 BBC가 시작한 전쟁은 이제 영ㆍ미 언론들이 참여하는 전면전의 양상으로 흘러가고 있다. 이라크 전을 승리로 이끈 블레어와 부시가 정치 생명을 담보로 진실과의 게임을 벌여야 하는 상황으로 발전한 것이다. 전쟁 개시 전 반년 이상 각종 정보를 흘리며 자유자재로 여론몰이를 해왔던 이들은 부메랑처럼 돌아온 ‘진실게임’을 극복해야 하는 다급한 상황으로 몰리게 됐다.

향후 이라크에서 대량살상무기 관련 증거가 발견되지 않는 한 이들은 ‘잠시 국민을 속일 수는 있어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는 고금의 진리를 곱씹어야 할 듯 하다. 이렇게 복잡한 내부사정 때문에 20일 서울을 찾는 블레어의 표정은 그리 밝지않을 것 같다.

국제부 이영섭기자


입력시간 : 2003-10-02 18:06


국제부 이영섭기자 young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