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여성을 피해자라 하는가"

[석학에게 듣는다] 이혜순 이화여대 국문과 교수
"왜 여성을 피해자라 하는가"


선생은 '여성이 언제나 시대의 피해자인 양 말하는 페미니스트들의 태도는 올바르지 않다"고 말했다. 선생은 자신의 전공인 한문학 분야는 페미니즘의 사각 지대라는 사실을 전제, 엄격한 남성 중심 사회였던 조선시대에서 조차도 여성이 항상 피해자였던 것만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그리운 어머님께 이 책을 바칩니다.’ 그의 사망모가(思亡母歌)는 그칠 줄 모른다.

한문으로 썼던 논문을 국역해 ‘수호전 연구’(정음사刊)라는 제목으로 출판을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에 어느 누구보다도 먼저 반겼던 어머니 아니었던가.

그러나 번역에 착수하던 때 노환으로 입원한 어머니는 책의 탄생을 눈앞에 두고 끝내 세상을 뜨고 말아 아쉬움만 더 할 뿐이다. 향년 80세였다. 1985년 빛을 본 책의 맨 앞 면에 굵은 명조체로 인쇄된 글자와 글자 사이에는 어머니를 그리는 딸의 마음이 절절하다.

그 딸, 이혜순(61ㆍ이화여대 국문학) 선생은 책에 묻혀 산다. 서재로는 많은 서책들을 감당할 수 없어 바닥에 까지 책을 쌓아 놓은 터라 본디부터 크지 않은 연구실은 소파가 더욱 비좁다. 책이 촘촘히 들어 앉은 연구실에서 그가 별도로 모아 놓은 것이 있다. ‘조국을 찾아서’ 등 어머니 추계 최은희 여사의 글을 모아 펴냈던 전집들이다. 거기 또 한 권이 막 더해졌다.

‘여성을 넘어, 아낙의 너울을 벗고’. 호사가라면 한국적 페미니즘의 탐구 운운해도 좋을 책이다.

문이재에서 펴낸 이 책은 어머니의 유고집이어서 행장이라도 대하는 듯한 마음마저 든다. 추계 여사가 1982년부터 1년여 동안 한 월간지에 연재했던 개화기 여성 실록이다. 을사보호조약 체결 이후 자괴감에 통곡을 하며 들어서는 참정대신 한규실에게 “무슨 면목으로 내앞에 나타나느냐”며 식음을 전폐했던 부인 등 남자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여인들이 등장한다.


한국적 페미니즘의 역사 탐구

책은 페미니즘의 깃발을 단 채 줄을 잇고 있는 서적의 대열에서 그들이 간과했던 역사의 무게를 얹어 준다. 출판 직후 여성학뿐 아니라 관련 학계에서 보내오는 호응이 오늘날 이 책이 갖는 의미를 상징하고 있다.

한성대에서 고시가를 가르치는 신경숙 교수는 “개화기 여성 담론을 준비하던 중 원고를 보고는 감동으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얘기를 나눴다”고 전해 왔다. 현재 우리 국문학계와 여성학계 일각에서 일고 있는 최은희 연구붐은 그런 자연발생적 이야기가 확대 재생산된 결과다.

선생은 “어머니에 대해 신 교수와 이 메일을 주고 받다 직접 만나 이야기도 자주 나누게 됐다”며 “그러다 보니 그리움의 대상이었던 어머니가 감동의 주인공으로 다가 왔다”고 기억한다.

‘추계 전집’(전 5권) 중 제 4권 ‘개화 여성 열전’으로 있던 내용이 선생의 정리와 교정 작업을 거쳐 정음사에서 새롭게 탄생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새로울 것 없는 내용이 이 시대에 감동을 주는 것은 당대 여성들의 진실을 에누리 없이 그려낸 추계의 치열한 기자 정신 때문이다. 선생은 “많은 부분에서 어머님 스스로가 증인이시기도 했지만, 자료의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후손ㆍ친지ㆍ동료ㆍ후배를 방문해 증언을 들으시기도 했다”고 어머니의 작업 모습을 기억한다. 기자로서의 어머니 모습이 그렇게 되살아 났다.

어머니는 그리움이다. 일찍이 홀몸이 돼 3남매를 키워낸 低鍛?

선생이 여고 교사를 하며 서울대 국문과에서 석사 과정을 밟고 있을 때, 우리 고전 문학을 깊이 공부하기 위해서는 중국으로 가 공부를 더 해야 한다는 깨달음이 그를 달뜨게 했다. 그러나 집안은 빠듯했다. 그 외중에 미국 일리노이대에서 석사 과정 학비 면제 유학생을 모집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어머니는 갈등하는 딸의 어깨를 쳐 주었다. “가라. 한 학기 생활비는 대 주겠다.”

한국의 도서관에 없는 자료들을 찾아가며 중문학과 비교문학의 세계로 빠져 가던 그는 내친 김에 거기서 박사 과정까지 밟고 싶었다. 모친께 그 같은 생각을 밝히자 “한국 문학속의 중국 문학을 공부하겠다는 당초 목표는 어디 두고 왜 비교 문학쪽으로 가려느냐”는 답이 돌아 올 정도로 모친은 약속을 중시했다. 가난했던 모녀는 국제 전화를 쓴 적이 없다. 약속대로 1주일에 적어도 한번씩 부쳐 오는 딸의 편지에 어머니는 답장으로 신의를 쌓아 갔다.

그 시절 선생이 국제 전화를 했던 적이 한 번 있다. 대만 국립 사범 대학중문 연구소에서 드디어 박사 학위를 받던 날이었다. 그것이 ‘수호전 연구’였다.


당당한 어머니의 모습은 삶의 축

어머니는 삶의 축이었다. 언제나 당당한 모습은 자식에게 가없는 든든함이었다. 명문 경기여중 출신이었던 추계 여사는 언제나 당당한 모습으로 기억된다. 자신이 이화여대에 합격했을 때 일이다. 치맛바람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학부모 사이에서 ‘학교를 위해 우리 스스로 돈을 걷어 내자’는 제안이 나와 호응을 얻어 가고 있었다. 그 때, 옹골찬 어머니가 그냥 넘어가지 못 했다. 어머니는 교장에게 편지를 썼다. ‘이렇게 좋은 학생을 보냈으니, 학교가 오히려 고마워 하라’고. 선생의 언니는 경기여중에 수석 입학할 정도로 총명했으나, 모친은 선생에게 더 애착을 느꼈다 한다. “제자 어릴 적 몸이 너무 약해 어머니께서는 저를 보며 제발 살아만 다오라고 빌었대요.” 특히 물자가 귀하던 대동아 전쟁의 와중에 태어난 딸이라 마음씀이 각별했다.

모전여전(母傳女傳)인가, 모친의 문재를 이어 받았는가, 약골의 딸은 이렇게 국문학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는 학자로 자라났다. 선생이 동료 학자들과 함께 쓴 ‘한국 고전 여성 문학의 세계’, ‘우리 한문학사의 여성 인식’ 등의 책은 한국의 한문학 작품 내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중과 역할을 밝혀주는 선구적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맨손으로 서 있을 때는 두 손을 앞으로 가지런히 모으는 몸가짐이 편안해 보이는 선생은 후덕한 풍모로 학생들의 귀감이다. 사이버 문명은 그에게 학생들과 더 가까워 지는 길을 터주었다. 1998년 이화여대 홈 페이지에다 개인적으로 마련한 사이트는 인터넷의 부작용이 불거지는 우리 시대, 하나의 예외적 사례가 될 법하다.

과제물마다 일일이 해주는 평이 공개되니 다른 학생들의 과제가 어떻게 평가받는 지를 보는 학생들에게는 그보다 더 생생한 공부가 없을 것이다. 이 같은 태도를 지켜 온 선생은 학생들의 절대적 지지로 학교 제정 ‘베스트 티처 상’을 두 차례 타기도 했다. 매체 시대의 발빠른 감성을 의식해 수업도 쉽고 재미있게 하는 요즘, 매체는 일체 사용하지 않는 그의 재래식 수업 방식은 결국 반시대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선택이다.

선생은 “나는 인문학 특유의 무게를 찾자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여성이 시대의 피해자인 양 말하지 말라

시대 정신인 양 대두된 페미니즘에 대해서는 페미니즘의 도식에 맞는 것들만 강조하는 태도에는 의구심을 제기한다. 선생은 “여성이 언제나 시대의 피해자인 양 말하는 페미니스트들의 태도는 올바르지 않다”고 말한다. 선생은 자신의 전공인 한문학 분야는 페미니즘의 사각 지대라는 사실을 전제, 엄격한 남성중심 사회였던 조선시대에도 여성이 항상 피해자였던 것만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하늘 같은’ 남편의 잘못이 있을 때, 현명한 여인들은 그를 당당히 지적했다.

‘얼마 전 당신께서 누군가를 책망하시는 것을 들었는데 목소리가 지나치게 사나웠으니 이것은 도에 맞는 것이 아닙니다.’ 19세기 여인 강정일당(姜靜一堂)이 남편 윤광연에게 쓴 짧은 편지(尺牘)이다. 불가피한 일로 혼자 삼개월 동안 지낸 것을 푸념하는 남편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내 질책하는 16세기 여인 송덕봉(宋德奉)의 산문도 재미있다. 이런 경우를 못 보고, 또는 안 보고 조선 시대를 여인의 수난 시대로만 치부하는 것은 오류라는 지적이다.

“이 같은 여성은 가난한 선비의 부인이나 기녀 등 여러 계층에서 골고루 확인돼죠. 중요한 것은 개인의 단호한 태도니까요.” 자기 불행의 원인을 사회와 환경에서 찾는 나머지 끔찍한 결과가 초래되고 있는 요즘, 선생의 지적은 금과옥조로 들린다. 남성 성토장이 되기 십상인 우리 시대 페미니즘이 한번쯤 돌아봐야 할 대목이다.

잠시라도 서 있을라치면 으레껏 두손을 가지런히 모으는 선생은 사실 남자가 하지 못 한 일을 이뤄낸 주인공이다. 그것도 딴 나라땅에 가서. 1972년 대만 국립사범대학 중문연구소에서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따낸 중국문학 박사 학위가 그 징표이다. 바로 13년 뒤 국역 출판된 책이다. 요즘말로 그는 대만의 히로인이었다. 택시를 타니 기사가 “리샤오졔(李小姐)!”라며 아는 체 할 정도였다.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캐리커쳐가 났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수호전’은 대표적인 협객 소설이다. 일찍이 ‘대륙 깡패들’을 본토인들보다 더 깊이 연구하고 돌아 온 그에게 최근 한국에서 우후죽순격으로 불어 닥치고 있는 ‘조폭 신드롬’에 대해 물어 보았다. 과연 조폭의 정서와 유사한 대목이 있었다.

“협(俠)이란 약한 자를 도우고 강한 자를 누른다(扶弱抑强)는 뜻이에요. 그들이 말하는 의(義)란 사실 리(利)에 더 가깝죠.” 자신을 인정해 주면, 그 사람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정서라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옳고 그르냐가 아니라, 나에게 이롭게 하느냐 아니냐가 가치 판단의 척도라는 거죠. ‘수호전’의 경우, 자기네들의 협객을 구하기 위해 온마을을 피바다로 만드는 일로 드러나죠.” 바로 요즘 횡행하는 조폭 영화식의 집단이기주의다. 주인공을 미화하기 위해 상대는 악, 그 자체가 돼야 하는 구도다. 에누리 없는 조폭 심성이다.

선생은 중국 무협의 전통을 빗대 중요한 점을 지적했다. “언뜻 민중의 영웅처럼 그려지는 그들의 행동 뒤에 있는 민폐는 간과되고 만다는 것이죠. 중국에서 양산박 패거리가 적극 조명 받게 된 것은 모택동 정권이 자신들을 옹립해 준 농민 봉기의 뿌리를 거기 두었기 때문이구요.”


"1녀1남 낳았죠"

내친 김에 더 물어 본다. 지금 한국은 왜 조폭에 경도돼 있는가? “우리나라가 ‘수호전’과 비슷한 상황이니까요. 약자에게 법은 멀어요. 관이 핍박하니 도적이 돕는다는 논리죠. 마치 ‘수호전’에서 양상박 도적들이 ‘하늘을 대신해 의를 행한다(替天行道)’라고 쓴 깃발을 휘날리며 산하를 누볐던 것처럼.”

듣고 보니, 조폭 신드롬속의 21세기 한국이 과연 난국은 난국이다. 중요한 말을 덧붙인다.“그러나 양산박 도적들은 획득한 것중 극히 작은 일부만을 백성에게 줬어요. 자기 집단의 이익이 최우선이었으니까요.” 우리의 깡패를 돌아다 보게 한다.

전문진(71ㆍ고려대 농화학과 퇴임)씨 사이에 딸 명혜(29ㆍ영국 브리스톨대 영화학), 아들 명수(28ㆍ고려대 사학과 박사)를 두고 있다. “1남 1녀군요”라 하니, “1녀 1남 낳았죠”라고 고쳐 준다.

장병욱 기자


입력시간 : 2003-10-06 09:22


장병욱 기자 aj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