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상결렬 불구 피할 수 없는 대폭 개방, 충격 최소화 방안 마련 시급

농업개방 태풍, 속수무책인가?
협상결렬 불구 피할 수 없는 대폭 개방, 충격 최소화 방안 마련 시급

한국 농업이 개방의 길로 치닫고 있다.

9월15일 세계적 휴양도시인 멕시코 칸쿤에서 열린 제5차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가 공동 선언문을 채택하지도 못한 채 폐막됐다.

개최국 장관이 의장을 맡는다는 관행에 따라 WTO 5차 각료회의를 주도한 루이스 에르네스토 데르베스 멕시코 통상장관은 이날 148개 WTO 회원국 대표들이 참가한 전체 회의에서 “도하개발아젠다(DDA) 협상과 관련, 공동 선언문을 채택하지 못했다”며 폐막을 선언했다.

협상 결렬은 폐막 회의 직전 열린 주요국 비공식 회의에서 아프리카ㆍ카리브해ㆍ태평양(ACP) 그룹 등 개도국들이 싱가포르 이슈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반발한 데 따른 것이다. 그러나 싱가포르 이슈는 협상 결렬의 표면적 이유일 뿐 본질적으로는 농업 부문에서 유럽연합(EU)과 개발도상국의 입장 차이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불리한 조항 바뀔 가능성 없어

칸쿤 회의의 결렬에도 불구하고 전문가들은 한국은 ‘농업시장 개방’의 대세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오히려 협상 결렬이 한국에 손해가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송유철 연구조정실장은 “협상 결렬은 한국에 오히려 손해가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농업 개방이 불가피한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DDA 협상과는 별도로 우리나라는 내년부터 쌀 시장 추가 개방 협상에 나서야 한다. 또 비록 합의안 마련에는 실패했으나, WTO 회의에서 한국 농업의 대폭 개방을 불가피하게 만든 초안이 마련됐고 WTO가 협상 타결 의지를 강력히 표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허상만 농림부 장관은 “칸쿤에서의 실패로 DDA 전체 협상이 무산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말했다. 최정섭 농업통상정책관도 “칸쿤 회의가 끝났을 뿐, DDA 협상이 끝난 것은 아니다”고 설명했다. 칸쿤 회의는 3년간 진행되는 DDA 협상의 한 과정에 불과해 회의 결렬로 협상 일정에 일시 차질이 발생할 수는 있으나 농산물 관세를 낮추고, 농업보조금을 감축하려는 대세는 여전하다는 것이다.

최 정책관은 조지 여(George Yeo) 싱가포르 통상장관이 제출한 농업부문 협상 초안은 폐기되지 않을 것이며 향후 협상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했다. 그는 “각료회의에서 채택되지 않아 국제법적 구속력은 없으나, 후속 협상에서도 ‘여 초안’이 계속 첨부자료로 배부되는 등 농업 협상의 토대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문제는 농업협상에서 주도권을 잡았던 미국-EU와 농산물 수출 21개 개도국(G-21)이 우리나라가 반대해 온 관세상한 설정과 관세할당(TRQ) 증량 조항에는 큰 이견을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앞으로도 ‘여 초안’에 포함된 해당 조항들이 수정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DDA 협상이 계속될 경우 칸쿤에서 한국에게 불리하게 정해진 조항들이 뒤바뀔 가능성은 없다는 뜻이다.

칸쿤 회의가 결렬된 후 농민단체 관계자들이 환호성을 올렸으나, 현실은 그와는 반대로 흘러갈 가능성이 높다. 협상결렬이 한국 농업에 더욱 치명적 영향을 주지 않을까 우려된다.


관세화 카드 무산으로 쌀 협상에 큰 차질

가장 화급한 문제는 내년 쌀 협상에서부터 큰 차질이 예상된다는 점이다. 한국은 우루과이라운드(UR) 협정에 따라 내년 쌀시장 추가 개방을 위한 협상을 미국, 중국 등과 벌여야 한다. 한국은 쌀 시장 보호를 위해 관세화를 거부하는 대신 연간 수요량의 4%를 외국에서 의무적으로 수입하고 있는데, 미국 등은 관세화 유예에 동의하는 대가로 8% 이상의 수입을 요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 정부는 당초 DDA 농업협상 세부안이 연내 확정되면, 이를 토대로 쌀의 관세화와 수입물량 확대의 실익을 저울질해 미ㆍ중 등이 무리한 요구를 할 경우 관세화 카드로 맞선다는 방안이었다. 그러나 칸쿤 회의가 결렬됨에 따라 내년 협상에 마땅한 대응 카드도 없이 협상 테이블에 나서야 하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할 것으로 우려된다.

설혹 다자협상인 DDA가 무산된다고 해도 한국 농업은 개방에서 예외일 수 없다. 미ㆍ중 등과 개별적으로 양자협상을 벌여야 하기 때문이다. 즉, WTO라는 울타리에서 집단적으로 개방협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 중국, 일본, EU 등 우리보다 협상력이 강한 국가와 일대일 대결을 벌여야 한다. 늑대를 피했더니 호랑이를 만나게 되는 상황인 것이다.

결국 농업 개방은 거역할 수 없는 대세이고, 개방의 충격을 최소화하는 방안을 찾는 것이 유일한 대안인 셈이다.

싱가포르 이슈
   

공산품과 농산품에 대한 무역장벽 제거를 넘어 자본이나 비즈니스 등의 국제적 이동까지 원활케 하려는 협의를 말한다. 96년 제1차 WTO 각료회의가 열린 싱가포르에서 논의가 시작됐다. 해외투자에 대한 국제적 보장장치(투자),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독점규제 규범(경쟁정책), 세관행정의 간소화(무역원활화), 정부조달시장의 투명성 확보 등 4개 의제로 이뤄졌다. 선진국은 도입에 적극적이지만, 개도국과 후진국은 극렬 반대하고 있다.

조철환 기자


입력시간 : 2003-10-06 13:56


조철환 기자 chcho@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