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학에게 듣는다] 전인초 연세대 국학연구원장



"우리의 것, 우리의 힘을 되찾자"


원래는 국문학도였던 선생이 한문으로 전공을 바꾼 내력에는 최근 우리나라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부쩍 주목받고 있는 한국학의 학문적 특수성이 함께 한다. 그것은 나 스스로를 더 잘 알기 위한 방법론이었다. 선생의 학문적 여정은 학문과 학문. 예술적 장르와 장르 사이에 학문적 혹은 실용적 이유로 점점 더 많은 응용 장르가 생겨나고 있는 우리 시대가 주목해야 할 텍스트이기도 하다.

“나 스스로만으로는 나의 능력을 모르는 법이죠. 다른 사람과 비교해야만 가능해요.” 비교 문학이라는 전가의 보도를 진리 탐구의 수단으로 삼아 평생을 바쳐 오고 있는 전인초(59ㆍ연세대 중문과) 선생이 진리에 도달하는 방식은 민주주의의 모습과 흡사하다.

위당 정인보의 흉상이 모셔져 있는 연세대 국학연구원의 원장이기도 한 선생 국내 한국학 분야에서 선도적 위치를 확보하고 있다. 한림대 한림과학원(원장 유재천),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원장 김흥규), 한국 정신문화연구원(원장 장을병) 등 현재 국내에서 불고 있는 한국학 열기의 한 축을 이루는 연구소이다.

선생은 올해로 26년째를 맞고 있는 그곳의 수장이다. 그러나 그 전신으로서 1948년 설립된 ‘동방학연구소’ 까지 합한다면 55년의 연륜이 쌓인 곳이다. 바로 선생의 나이와 거의 맞먹는 연륜이다. 축제를 앞둔 초가을의 캠퍼스에서는 여유롭게 대중 가요도 제법 들린다. 젊음의 기운을 바로 옆에서 느끼는 선생의 한국학은 그 덕택에 나이 먹을 틈도 없다.

2002년 6월 LA에서 ‘코리언-어메리컨 아이덴티티’ 라는 제목으로 펼쳐졌던 논의의 중심에 선생이 있었다. 당시 이틀 동안 펼쳐졌던 강연회와 학술대회는 최근 교포 사회에서 부쩍 부상한 주제를 처음으로 집중 토론한 자리였다. “미국에서 한국인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그들은 한국인인가, 미국인인가, 아니면 둘 다인가라는 문제를 두고 열딘 토론이 벌어졌죠.”몇 대를 걸쳐서도 단단히 결속하는 유대인 사회를 생각해 본다면, 실제 교포 사회내에서 그 문제는 각별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이민 1세란 나이 30~40에 어린 자식을 데리고 건너 온 사람들이다. 한국적으로 사고하는 그들의 ‘우리나라’는 여전히 한국이다. 다음, 청소년기에 미국으로 온 1.5세대들은 한국적 정체성과 미국적 정체성이 혼재해 있어 충돌을 빚기도 한다. 그러나 월드컵 한국과 미국전 때는 한국을 응원한 그들이다. 이와 달리 미국서 나고 자란 이민 2세는 스스럼 없이 미국을 응원한다. 한ㆍ미 축구 대결이 벌어질 때, 이민 3, 4세들은 당연히 미국만 응원할 것이라는 결론이다.

당시 가장 중요한 해결책으로 제시됐던 것이 어린 세대에 대한 우리말 교육이었다. 뿌리에 대한 인식을 유지하기 위해 방학 중에는 되도록 한국에 자주 와야 한다는 조언이 현실적 방안으로 제시되기도 했다. 선생은 UCLA와 하버드 대학 등 두 곳에서 한국학을 가르치는 조교수급의 1.5세대와 진지한 이야기를 나눴다.

문제점으로 제기됐던 것이 미국내의 신세대 한인들이 미국인의 편향된 시각으로 한국을 바라볼 위험성이 실제로 다분하다는 점이었다. 그 같은 편견은 구조적으로 재생산되고 있었다. “조선 시대를 노예 사회로 규정한 워싱턴대 제임스 펠레 등의 왜곡된 이론을 좇지 않으면 학위를 주지 않죠.”그 같은 상황에서 이민의 민족적 정체성을 역사적 관점에서 최초로 밝힌 그 자??의미는 LA 한국일보 등 현지 언론에서 대서특필하는 등 일대 사건으로 부각됐다.


나 스스로를 더 잘 알기 위한 방법론

원래는 국문학도였던 선생이 한문으로 전공을 바꾼 내력에서는 최근 우리나라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부쩍 주목 받고 있게 된 한국학의 학문적 특수성을 실감할 수 있다. 그것은 나 스스로를 더 잘 알기 위한 방법론이었다. 선생의 학문적 여정은 학문과 학문, 예술적 장르와 장르 사이에 학문적 혹은 실용적 이유로 점점 더 많은 응용 장르가 생겨나고 있는 우리 시대가 주목해야 할 텍스트이기도 하다.

선생은 연세대 국문과 63학번이다. 한문학으로 바꾼 것은 대학원에서였다. 선생은 “국문학을 본격적으로 하기 이전, 중국 문학에 대한 공부가 필요함을 절감했다” 고 말했다.

즉, 한국학을 깊이 있게 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대학 4년 당시 ‘연세춘추’ 지에 실었던 논문 ‘어디까지가 한국 문학이고, 어디까지가 중국 문학인가’ 는 바로 그 같은 문제점을 심화시켜 도출한 출사표였다. 특히 1977년 ‘동방학지’ 에 ‘용비어천가의 고사성(故事性)’ 을 실어 그 작품은 선진(先秦)시대의 고사를 근거로 자신들의 정치적 행동을 합리화하려는 의도를 깔고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국학연구원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하던 때였다.

1984년 동료 학자들과 한국동방문학비교연구회를 창설한 것은 국문학의 얼개를 밝혀내기 위한 시도였다. 청나라 초 구우의 ‘전등신화’ 가 한국에서는 ‘금오신화’ 로, 일본에서는 ‘가비자’ 로 발전됐다는 등 한ㆍ중ㆍ일 3국의 문학은 서로 밀접하게 얽혀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현재 5대째 회장을 맡고 있는 선생은 “결국 우리의 몫이 어디까지인가를 확인하는 작업”이라고 말했다.

진정한 우리 것을 찾아가기 위해 거쳐야 했던 도저한 실험이었다. “한문학을 준(準)국문학이라고 규정해 오던 기존 학계의 어정쩡한 이론적 모순을 극복하려는 시도였죠.” 한국에서 외국의 학문, 더 정확히는 외국의 문학을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띠는 지, 보다 구체적으로는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지에 대한 답을 탐색하는 작업이었다.

그것은 곧 ‘우리 것’에 대한 보다 폭 넓은 인식으로 나아가는 길이었다. “학문의 순수성이란 것도 진실 아래에 놓여요. 우리 문학에 비겨서 말한다면, 그 속에 깃든 다른 문학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 곧 학문의 순수성을 찾는 길이죠.”

선생의 이 같은 인식은 든든한 후학들에게 전승되고 있다. 고려 말 경기체가에는 송나라의 이야기책인 ‘태평광기’ 의 영향이 짙다는 연세대 김장환 교수, 우리의 ‘금오신화’ 가 일본과 중국 등지를 통해 세계로 전파되는 모습을 밝힌 고려대 최용철 교수, 규장각과 중국 각지에 산재한 소설의 판본을 비교한 선문대 박재연 교수 등이 그들이다.


거시적 문제의식에 근거한 국학

선생의 국학(Korean Studies)은 거시적 문제 의식에 근거한다. 우리의 것을 한 단계 더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최소한 동아시아적 시각에서 바라볼 때, 비로소 보다 실체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관점이다. “당나라 ‘앵앵전’ 의 애정고사가 원나라에서 ‘서상기’ 로 이어지더니 조선 시대 ‘춘향전’ 이 된 사례에서도 알 수 있죠.” 최근 젊은 연구자들 간에 비교 문학적 관점이 깊이 수용되고 있는 데에는 선생 등의 선구적 업적이 숨어 있다.

캐나다 토론토대, 캘리포니아 주립대(버클리) 등 유수한 외국대학의 동아시아 학과에서 초빙 교수로 한국학을 강의한 선생에게 특히 잊지 못 할 관계는 대만에서 맺어졌다. 대만의 문화 재단인 히말라야 재단과의 인연이다. 1999년 7~12월 대만 국가 도서관의 한학연구중심(센터)이 초빙 교수로 모셔간 것이다.

그 발단은 히말라야 재단의 이사장 한사오충(韓效忠)이었다. 대만서 CD업계의 큰손으로 군림하는 그는 히말라야 원주민의 삶이 극도로 곤궁한 데 충격을 받아 그들을 돕는 한편 학문적 지원을 하는 독특한 인물이다.

“젊어서 문학을 하고 싶었으나, 본토에서 건너오는 바람에 생활이 너무 곤궁해 꿈을 접어야 했던 사람이죠. 사업으로 번 돈을 값어치 있게 쓰자며 결심했대요.” 우연한 기회에 그를 만나 짧게 이야기 나누었던 것이 지금껏 소중한 인연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중국에는 없는 책들이 한국에 많이 깔려 있는데 정리가 안 돼 있다” 며 이야기를 꺼낸 게 인연의 출발이었다. “서울의 규장각을 정리 중 최용철 교수가 ‘형세언륙인종(型世言陸人種)’ 이라는, 중국서 없는 중국책을 발견했다는 얘기를 했죠.” 영정조 당시 왕실도서관이었던 규장각에서 사신들을 시켜 중국에서 구입해 오게 한 뒤, 규장각에서 인쇄한 책들이다.

중국 문학사를 다시 써야 할만큼 귀한 발견이었다. 이어 선생은 “그처럼 한국 내에 산재해 있는 중국 도서들의 목록을 정리해야겠다” 며 말을 이어 갔? 그러자 한 이사장은 “한국내의 중국 자료를 찾아 세계적으로 이용하겠다니 반가운 일”이라며 “거기에 필요한 서버 구축 작업 등 관련 예산을 제공해 주겠다”고 약속했던 것이다.

이후 선생은 2001년부터 매년 정초마다 한 사장을 직접 찾아 가 제공 받은 예산의 쓰임새 등에 대한 설명을 상세히 해 오고 있다. “나더러 이리(毅力:강하고 단단한 의지력)가 있는 사람이라며 감탄하더군요.” 반대로 선생은 한 사장에 대해 감탄한다.

자기 문화에 대해 연구하고 공개하는 사람에 대해 그토록 관심을 쏟고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사람의 존재는 선생에게도 경탄스런 존재였다. 지속적 후원을 결정한 첫 대화에 걸린 시간이 겨우 30분. 기업 문화, 기업 문화, 마치 유행처럼 되뇌어지기 시작한 한국의 기업들이 돌아 보아야 할 일이라고 선생은 덧붙였다.

요즘 선생에게는 문과대 학장으로서 남다른 고민을 안고 있다. 바로 인문ㆍ사회ㆍ자연계 등 기초 학문 분야의 박사 실업자 문제다. “아주, 상당히, 심각합니다.”80년대 전두환 정권이 졸업정원제를 실시하면서 학생수가 배가하자 따라서 급증하게 된 교수급 인력이 갈 길을 찾지 못 하고 있는 현실을 지적하는 말이다.


우리 민족의 저력은 어디에 있는가?

선생은 아직도 풀지 못한 우리의 숙제를 지적하고 있었다. “해방-혼돈-6ㆍ25-격동-남북 대치 등 어지러운 환경에서 이만큼 버티는 것은 분명 우리 민족의 저력입니다. 월드컵 당시 보였던 민족의 힘은 지금 어디 있느냐고요?”

“조지훈은 ‘맵고 짬’ 이라고, 조윤제는 ‘은근과 끈기’ 라고 했고, 김동욱은 ‘아리랑과 흰 옷’ 이라 했죠.” 우리 민족 저력의 고갱이를 건져내 올린 말들이다. 그렇다면 선생은? “이제 우리는 은근하지도 않고 끈기도 사라졌어요. 역사의 순응과 계발이라고 봐요.” 국학자로서 선생이 제시한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우리 특유의 강인함을 만들어 낸 시간들을 긍정하고 거기서 진정한 민족의 힘을 도출하자는 지적이다.

충북대 국문과 성현자(59) 교수가 부인이다. 자신에게 비교 문학의 유용함을 가르치고 2002년 7월에는 중국 옌벤대에서 열렸던 ‘한중 비교문학 세미나’에 가서 공동 발표하는 등 학문적 동지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학문적 보완 관계죠.” 세미나 등의 행사에 동참하기도 하지만, 선생은 “각자 따로 논다”며 상호 독립성을 애써 강조한다.

장병욱 차장


입력시간 : 2003-10-07 13:38


장병욱 차장 aje@hk.co.kr